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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보약국 문을 열면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동훈 대구 법림회장을 만날 수 있다. 갖은 시련에도 우직하게 부처님을 향해 나아갔던 순간순간이 모여 오늘의 미소를 만들어 냈으리라. | 문득 내려다본 보도블록 틈 사이로 빠끔히 고개 내민 풀잎처럼, 일렁이는 바람결에 눈부신 생명력 흘려보내는 늦봄 들녘처럼, 부처님은 늘 그곳에 있었다. 누가 바라봐주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진리는 찬란하게 빛나며 서 있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몸과 마음이 무너지려할 때마다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준 부처님. 점점 여위어지는 가슴에 감로수 되어 쏟아지던 정법(正法)의 말씀들. 부처님은 시나브로 삶에 스며들어 어느새 생의 나날들을 환히 비추는 빛이 됐다. 그렇게 박동훈(65, 원산) 대구 법림회장의 삶 속 부처님은 어둠 가득한 망망대해에 떠 있는 북극성처럼, 나아갈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머니의 불영사 기도로 출생 명보약국 운영하며 성공 예감 약 무료 조제 등 지역과 호흡 어머니 죽음에 공허함 시달려 감사로 재직한 신협 파산으로 약국건물·약초 키운 땅 압류 대장암 진단까지 받으며 고통
수행·봉사의 보살행으로 전환 이제열 원장과 인연으로 환희 대구·대전약사회 창립도 견인
박동훈 대구 법림회장은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명보약국 약사이자 전문포교사다. 명보약국은 1978년 설립돼 현재까지 자리를 지켜오며 몸을 치유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온 것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사랑방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약국 문을 열면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을 맞는 주인장을 만날 수 있다.
누구라도 절로 포근함을 느끼게 만드는 진심어린 미소에는, 오래 묵힌 된장처럼 구수한 사람내음이 전해진다. 갖은 시련 앞에서도 부처님에 의지해 우직한 걸음을 걸어 나갔던 뚝심이 오늘의 미소를 만들어냈음이다.
그는 경북 청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은 부모님은 막내로 아들 한 명 더 얻고자 불영사에서 기도를 드렸다. 특히 어머니는 부처님에게 공양 올릴 음식을 머리에 이고 산을 넘어 불영사로 향할 만큼 정성이 대단했다. 그가 나고 자라 중학생이 될 무렵 부모님은 논밭을 팔아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약학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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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훈 전문포교사는 아내의 권유로 불교대학에서 부처님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 군대에 입대할 즈음 지금의 아내 한애자(63, 연화정)씨와 손편지로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당시 아내는 간호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제대 후에도 인연을 이어오다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됐고 봉덕동에 자리를 빌려 명보약국을 시작했다. 한방을 통해 병을 치유하겠다는 소년의 꿈이 약사가 되면서 비로소 현실이 됐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새벽부터 약국을 열어 통금시간이 끝나기 직전까지 약을 조제했다. 고향 인근에 작은 땅을 사서 직접 약초를 기르기도 했다.
6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한 결과 1984년, 근처 땅을 매입해 3층 건물을 올릴 수 있었다. 조금 무리하게 돈을 빌리긴 했지만 예의 성실함으로 5년 만에 빚을 청산했다. 그 사이에도 틈틈이 봉사활동을 했다. 동사무소에서 보건강의를 했으며 약을 조제해 무료로 나눠줬다. 매주 한 번씩 무료급식봉사에 참여도 했다. 아이 셋을 낳아 기르는 수고로움도 있었지만 순간에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당시까지 그의 삶에서 부처님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존재였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고 불자 아내도 맞이했지만 스스로 부처님 제자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내를 따라 사찰 불교대학에 등록해 1년 동안 공부도 했다. 졸업을 하고는 포교사 품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부처님은 늘 그곳에 계셨지만, 마음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배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다음날 눈을 감고 말았다. 어머니가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산을 넘어 향하던 불영사에서 49재를 지냈다. 삶이 부질없게 느껴졌고 죽음은 공포로 다가왔다. 정신없이 내달린 끝에 움켜줬다 믿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저만치로 달아나버렸다. 가게 문을 잠시 닫고 불영사에 머물렀다. 허무하게 흩어져버린 것이 남긴 공허를 부처님 법이 메우기 시작했다. 삶이라는 웅덩이에 고여 있던 그가 걸음을 떼자 어렴풋이 부처님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뇌는 여전히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무보수 명예직 감사로 있던 봉덕신협이 파산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역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자비를 털어 활동했음에도 책임은 그에게 돌아왔다. 약국이자 가정의 보금자리이던 건물, 약초를 키우던 땅이 압류 당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했지만 진행은 더뎠다. 울화병에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속에 신음했다. 아내의 눈물겨운 병간호가 이어졌어도 번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틈만 나면 팔공산을 올라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고 기도했다. 소송을 포기하고 벌금을 납부해 압류가 풀렸음에도 마음의 병은 쉽사리 낫지 않았다.
불덩이 같은 번뇌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그는 2005년 대구불교약사회 창립이라는 결실을 거둬냈고 회장을 역임했다. 발기인 9명으로 조촐하게 시작했지만 3년 만에 회원을 100여명으로 확대하는 성과를 일궜다. 매월 야간법회를 열고 분기마다 한 번씩 전국 각지를 순례했으며 철야정진을 열었다. 약사회 사물놀이패를 구성해 지역 내 크고 작은 행사에서 공연을 했다. 회원의 생일이 되면 꽃을 들고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불교약사회를 전국조직으로 도약시키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대전불교약사회 창립을 이끌어냈다. 불영사에서 희미하게 목격했던 부처님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삶은 그를 다시 한 번 밑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늦가을 어느 날,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아 올라왔다. 병원에서 징후가 좋지 못하다는 소견을 듣고 내시경 전문 병원으로 옮겨 진단을 받았다. 대장암 3기. 청천벽력 같은 상황이었다. 병원을 나온 그는 휴대폰을 열고 대구불교약사회 실무자와 통화를 했다. 정기모임 장소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번뇌의 밤들을 헤매다 불현듯 부처님을 발견했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그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는 염주를 돌리며 관세음보살 명호를 외웠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대구불교약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해 여름 봉정암 순례가 있었다. 항암제로 인해 손발톱이 물컹해지고 발바닥 피부가 종이처럼 얇아졌지만 계곡 물에 피멍 든 발을 식히며 오르고 또 올랐다. 포기하지 않은 끝에 마침내는 부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때 봉정암 순례는 마치 그가 살아낸 삶과 같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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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에 자리 잡은 명보약국. 약사의 꿈을 실현한 공간이자 그가 법을 펼치는 도량이다. | 2009년 전문포교사 품수를 받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비웠으니 이제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여기고 남을 위한 수행·봉사의 보살행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게 발원을 되새기던 그에게 놀라운 인연이 찾아왔다. 불교경전연구원 이제열 원장과의 만남이었다. 불법에 대한 풀리지 않은 갈증을 내심 안타까워하던 마음에 이제열 원장의 법문이 단비처럼 내렸다. 일주일간 ‘불교의 사상과 실천체계’ 특별법문을 들으며 가슴이 뻥 뚫리는 희열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제열 원장을 스승 삼아 정진할 것을 서원했다. 2013년 이제열 원장이 지도법사로 있는 재가신행모임인 대구 법림회의 회장으로 추대돼 신행활동의 외연을 확장했다.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대구에서는 이제열 원장의 법문이 펼쳐진다. 하지만 장소가 여의치 못해 한동안 그의 약국 건물과 아파트 휴게실 등을 전전해야 했다. 이를 안타까워하다 도반들과 함께 힘을 모아 올 5월 여법한 법당을 마련해 법회를 개최하고 있다. 지금도 그는 매주 화요일 6시40분이 되면 약국 문을 닫고 한달음에 법당으로 달려간다.
험난했던 여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늘 그 자리에 계시던 부처님이었다. 칠흑 같던 어둠 속 실루엣마냥 가물거리던 형체가 보였고, 좌절하는 대신 다만 우직하게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현재, 부처님은 그곳이 아닌 이곳에서 그와 함께하고 있다. 부처님 앞에서, 남은 삶을 정법 홍포에 매진하겠다는 뜻을 아로새겼다. 시나브로 스며들던 부처님이 어느새 생의 나날들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됐다.
대구=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
첫댓글 ^^ 훌륭하신 박동훈 대구 법림회장님의 글 잘 읽고 감동 받고갑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