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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좋아하는 인간, 사랑하시는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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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01 05:18
- 좋아하는 인간, 사랑하시는 하느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의 주제는 ‘인간이 버린 사람을 하느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인간이 죽인 사람을 하느님께서 살리신다.’로 해도 좋을 겁니다.
요즘 들어서 우리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쓰레기로 만듭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인간이 버립니까?
그것을 저는 저희 아나바다 장터에서 실감하는데
전국에서 여러분들이 물건을 보내 주시는 덕분에
저희 장터는 성업 중이고 의미 있는 사업이 되었지요.
그래서 그냥 쓰레기가 될 것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신 여러분에게 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칸마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소유와 소비를 부추기는데
우리 프란치스칸들조차도 이 부추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밖의 건전한 가르침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규정하고
우리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는데
신자유주의는 소유욕과 욕망들을 죄악시하지 말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신자유주의는 그러면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기업이 잘 돌아가고,
그래서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내게 하기 위해서지요.
부추김, 이것이 실은 창세기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다 가졌고 다 따먹는데 낙원 한가운데 저 나무 열매만은
못 따먹는 것 아니냐고 일깨우고 따먹으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는 순간
하느님만 아셔야 할 선과 악을 인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생겨난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고,
그래서 선이란 하느님 좋으실 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란 대로 된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 된 것이며,
바란 대로 된 선 곧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바란 대로 되지 않은 악 곧 싫어하는 것들은 버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하고는 버립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덜 좋은 것을 버려 쓰레기로 만들고,
새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쓰던 것을 싫증 내고는 쓰레기로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것은 이 자기중심적 소유와 소비가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 욕망과 필요에 따라 인간마저 소유하고 버립니다.
욕망 때문에 애를 낳고는 성가시다고 애를 버립니다.
좋을 때는 사랑한다고 하고는 싫어지면 사랑을 버립니다.
하느님마저도 필요할 때는 소유하고
욕망의 순간이나 필요 없을 때는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렇게 버린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인간이 버린 주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좋아하고 소유하는 인간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그 큰 차이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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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주인은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점심을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이 점점 몰려들어 장사는 나날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가게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글쎄 저녁 술값에 다음 날 점심값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도둑놈 심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공짜만을 좋아하고 또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발전이 공짜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이 있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신앙인 덕분에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계속 공짜 인생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그 어떤 노력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기도의 연속은 아니었습니까?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갚아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다음 소작인들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존중할 거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욕심과 이기심이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삶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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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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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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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하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 자격을 잃은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 는 옛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바로잡으려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모퉁이의 머릿돌”(마태21,42)로 삼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언제나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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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총각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고, 노총각은 의사인 친구에게 찾아가서 아이와 자신이 닮은 곳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인 친구는 아이와 아빠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이야기 해 줍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얼굴도 닮았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노총각은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라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예전에는 닮은 곳을 찾으면서 나의 자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체질과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님은 일찍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혈압이 높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아서 40이 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질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있어서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유순한 성격입니다.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남을 이끄는 편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저는 부모님의 자식이 확실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질투하고, 시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둘째, 은전에 팔렸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은전 스무 닢을 받고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에게 팔았습니다. 셋째, 요셉은 이집트 관리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물리쳤지만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넷째,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였고,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와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섯째,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으로 이웃을 괴롭힌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삶이 우울하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 때문에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죽이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인 소작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이웃에게 봉사한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긍정의 마인드와 희망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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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언 발에 오줌을 누면 얼어있는 발이 녹는 듯 보이지만 이내 다시 얼어버리고 맙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아닌 아주 어리석은 해결책이라는 뜻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말도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것이 두렵다고 해서 눈을 가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소작인들은 이런 아주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출을 받아 오라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도 죽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과연 그 밭의 주인이 소작인들로 바뀔까요?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의 분노만 샀을 뿐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우리 삶을 통해 이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이 아무리 그 일의 방향을 틀고 싶어도 결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독서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함정에 빠뜨리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하느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원의 씨앗으로 삼으십니다. 나중에 요셉은 이집트의 제상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돕습니다.
이렇듯 인간적인 계획은 하느님 안에서 수정되고 보완됩니다. 그것이 어두운 계획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지금의 아픔과 지금의 고난도 신앙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계획 안에서 씨앗으로 해야 할 역할을 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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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청춘
이 세상의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박 영감인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 아빠의 청춘
아주아주 오래된 가요입니다.
어디서든 무엇이든
가족을 위해 이겨내고 견뎌내고
수많은 어려움을 넘고 넘어온
가족에 대한 노래입니다.
입춘이 지난 지 오래입니다.
파릇파릇한 옷을 입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이 몸부림치고 있네요.
겨울을 넘어, 두꺼운 껍질을 뚫고 새로움이 피어나옵니다.
이것이 사랑 아닐까요? 이것이 희생 아닐까요?
한 청춘을 디딤돌로 다시 피어나는 새로운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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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꿈쟁이’자 ‘꿈나무’인 우리들
-하느님 꿈의 실현-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편105.4-5ㄱ)
오늘 3월1일은 제105주년을 맞이하는 3.1절로, 1919년 3월1일에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입니다. 일제의 통치로부터 한민족의 독립의 꿈이 한반도 전체에 활짝 꽃처럼 피어났던 날입니다. 또 오늘은 사순시기로 3월 첫날이자 ‘성 요셉 성월’의 첫날이자 마지막 3월31은 부활대축일로 영적 황금기의 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난국에 처한 이 나라를 위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로 정의와 평화의 꿈이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참으로 절박한 3월이라 하겠습니다. 여전히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온전한 독립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느 일간신문 1면 톱기사, “0.65명...또 ‘최저’ ‘출구’없는 저출생”이란 커다란 활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한민족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대로 꿈이, 희망이 사라져가는 나라 현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살아있는 것들만 꿈꿉니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못합니다. 2009년 15년전 봄철에 써놨던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꽃나무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숨쉰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꿈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꿈꾸는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꿈이 꽃처럼 피어났던,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분들입니다. 역시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나이에 관계없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요셉처럼 “하느님의 꿈쟁이”임을 깨닫습니다.
교황은 “모든 사제는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꿈꾸는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 정의했습니다. 또 위대한 꿈을 꾸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어제 독일에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절 단식 권고 내용을 읽으면서 교황님의 기발한 가르침에 명실공히 하느님의 꿈쟁이임을 확인했습니다.
1.걱정을 단식하고 하느님을 신뢰하세요.
2.불평을 단식하고 단순함을 묵상하세요.
3.스트레스를 단식하고 기도하세요.
4.슬픔을 단식하고 감사로 채우세요.
5.쓰라림을 단식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세요.
6.남을 사냥하는 말을 단식하고 상냥한 말을 사용하세요.
7.비관주의를 단식하고 희망으로 채우세요.
8.화를 단식하고 인내로 채우세요.
9.이기심을 단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지세요.
얼마나 멋진 참된 단식인지요! 영적황금기 3월 이런 단식으로 하느님의 꿈이 활짝 피어나는 꿈나무로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어떻게 실현되어가는 지 보여주는 시초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어 50장으로 끝날 때 까지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가는 과정이 참으로 장관입니다. 요셉만이 아니라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예수님을 정의하면 사랑의 시인, 신비가, 영성가, 관상가이자 활동가, 꿈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역시 평생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으니 바로 “하느님 나라”가 그분의 평생 꿈이였고 이 하느님의 꿈은 우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노래하는 시편 역시 하느님의 꿈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꿈이 가득 담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시인이 되고, 하느님의 꿈은 우리를 통해 꽃처럼 피어나고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요셉의 일화와 마태복음 21장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요셉은 그대로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그대로 요셉의 수난은 그대로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의 아들이 상징하는 예수님의 수난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그대로 창세기의 요셉 형제들의 말과 오버랩됩니다. 세상 악의 세력들은 예나 이제나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키려 음모와 온갖 획책을 시도하지만 결코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음을 봅니다. 마침내 부활을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킨 하느님이요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다음 시편의 꿈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42;시편118,22-23)
예수님 제자들의 시편을 렉시오디비나 한 솜씨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대로 이들의 영성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통해 당신 꿈을 꾸시고 실현시켜 나가십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꿈쟁이이자 꿈나무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선행에 힘쓰고, 언제나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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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사랑해요>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우리 사랑해요
우리
처음부터
사랑이었으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처음부터
사랑할 수 있었으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야
사랑할 수 있으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하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야
늘 사랑할 수 있으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게 되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야
사랑일 수 있으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마저 빼앗기리니
우리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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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큰 돌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용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악한 자들이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입니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모두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듯, 그리스도 신앙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파멸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바위라고 하는 것은 이 런 뜻입니다. “그 돌위 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다”(루카 20,18: 참조: 시편 118,22-23: 이사 8,14-15).
부서지는 것과 으스러지는 것은 다릅니다. 부서진 것들 가운데에는 큰 조각들도 있지만, 으스러지면 티끌이 되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들을 돌이 부수는 것이 아니라,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들 스스로 부서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히브 11,37).
우리는 순교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구절, 곧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었습나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복되도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그대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면”(마태 5,11: 참조: 마태 10.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죽었다”는 표현은 첫째, 우리가 이 세상과 삶 속에서 겪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뜻입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끝이 있지만,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보상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둘째, 우리의 생명이 죽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가 서로 돕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과 불행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129)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새로 세례받은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기쁨
그렇기 때문이 이제 이들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 안에 모든 존재 사물들의 창조주이시고 사람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면 그 말은 아버지와 성령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이러한 사람은 아직 이 땅위에서 살고 있다 해도 그는 동시에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동경을 하늘을 향해 두고있기 때문에 악마의 공격들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마가 이전에 지신의 손이귀에 있던 사람이 이제 얼마나 많이 변화되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는지를 보게 되면,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이들이 가진 강력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들의 빛나는 얼굴이 악마의 눈을 부시게 하기 때문에 돌아서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새로운 군사들이 되었고, 오늘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등록되었으며, 이 영적인 집에 초대되어 임금의 식탁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받는 큰 은총에 합당한 열성을 내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하늘의 더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선한 분이십니다.
만약 당신이 주신 은총을 우리가 감사하게 받아들여 매우 깊은 주의로 그것을 잘 지켜 나가는 것을 그분이 보시면,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더 풍부하게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작은 공헌을 덧붙여도 주님께서는 큰 선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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