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봄이 걷는 길
노란 유채꽃 사이에서 만난 느림의 시간
바다를 건너 섬으로 간다는 것은 육지의 시간을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배가 항구를 떠나는 순간부터 마음의 시계도 조금 느려진다. 물살을 가르며 멀어지는 육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일상의 소음도 함께 멀어지는 듯하다. 그렇게 바다 끝에서 만난 섬이 청산도다.
이름부터 푸르다. 청산(靑山). 푸른 산이라는 두 글자를 품은 섬은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 산은 바다를 향해 완만하게 내려오고, 마을은 그 품에 조용히 기대어 있다. 돌담은 밭과 길의 경계를 만들고, 바람은 그 사이를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드나든다. 봄이면 그 풍경 위에 노란 유채꽃이 한꺼번에 불을 밝힌다.
4월의 청산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유채꽃이었다. 길 양쪽으로 노란 꽃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 산, 노란 꽃이 층층이 포개져 있다. 어느 화가가 이처럼 대담한 색을 한 화면에 펼쳐 놓을 수 있을까. 봄은 색을 아끼지 않았다. 길 가운데 한 사람이 천천히 걷는다. 배낭 하나를 메고 꽃길을 따라가는 뒷모습이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이상하게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 역시 걸음을 늦춘다. 이곳에서는 빨리 걸으면 무언가를 놓칠 것만 같다.
청산도의 길은 목적지보다 과정이 아름답다. 몇 걸음 가다 뒤돌아보면 조금 전과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돌담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봄이 기다린다. 낮은 돌담 아래 작은 풀꽃이 피어 있고, 밭고랑에는 겨울을 건너온 흙의 냄새가 남아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유채꽃 무리가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꽃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며 파도를 만드는 것 같다. 청산도에서는 돌담도 풍경의 한 부분이다. 섬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밭에서 나온 돌을 하나씩 쌓아 담을 만들었다. 반듯하지 않은 돌들이 서로의 틈을 메우며 벽이 되었다. 시멘트로 단단히 붙이지 않아도 오랜 바람을 견뎌 온 담을 바라보면 사람살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양도 크기도 다른 돌들이 서로 기대어 하나의 길을 지켜낸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혼자 단단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며 버티는 것.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을 약함이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세월을 살아보니 기대어 산다는 것은 오히려 삶의 지혜였다. 청산도의 돌담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보여준다.
길을 따라 걷는다. 유채꽃 사이로 난 길이 산자락을 향해 부드럽게 휘어진다. 곧게 뻗은 길이었다면 이토록 아름답지는 않았으리라. 어디로 이어지는지 한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음 풍경이 궁금해진다. 굽이 하나를 돌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열린다.
우리 인생도 직선보다는 굽은 길에 가깝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돌아가야 했던 길도 있었고, 멈춰 서야 했던 시간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 우회로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이 삶을 더 깊게 만들었다. 곧은길은 빨리 갈 수 있지만 굽은 길은 많은 것을 보게 한다. 청산도를 걷다 보면 ‘느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곳의 느림은 게으름과 다르다. 오히려 제 속도를 되찾는 일에 가깝다.
도시에서는 늘 다음 일이 기다린다. 식사를 하면서도 다음 약속을 생각하고, 길을 걸으면서도 목적지를 확인한다. 빨리 도착하는 것이 좋은 삶인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속도를 높인다. 그러다 문득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면서도 무엇을 보며 왔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청산도에서는 그 속도가 어울리지 않는다. 유채꽃 한 송이 앞에서 멈추어도 좋고 돌담에 기대어 바람을 맞아도 좋다. 길모퉁이에 서서 산을 오래 바라본다고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줄어드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넉넉해진다.
그것이 여행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새로운 장소를 많이 보는 일이 아니라 익숙했던 자신의 시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이다. 집에서는 하루가 짧다고 말하면서 여행지에서는 꽃 한 송이를 오래 들여다본다.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돌담과 나무 한 그루에도 눈길을 준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이다. 바람이 유채밭을 지나간다. 수천 송이의 꽃이 동시에 흔들린다. 한 송이만 보면 작고 여린 꽃인데 함께 피어 있으니 들판을 바꿀 만큼 장엄하다. 작은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계절을 만든다.
문득 사람의 삶도 저 유채밭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하루는 작아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누군가를 만나고, 일하고, 돌아와 잠드는 평범한 날들이다. 하지만 그런 하루가 모여 한 사람의 생애가 된다. 특별한 몇 날이 인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수많은 날이 우리의 삶을 완성한다. 산자락으로 눈을 돌린다. 낮은 산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그 위로 파란 하늘이 크게 열려 있다. 하늘이 유난히 넓어 보인다. 마음도 덩달아 넓어진다. 여행지에서 하늘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가 평소 너무 자주 고개를 숙이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본다. 지나온 길이 노란 꽃밭 사이로 길게 놓여 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걸었던 길인데 멀리서 바라보니 하나의 풍경이 되어 있다.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걷는 순간에는 힘들고 복잡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길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너무 자주 자신의 길을 평가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아직 걷고 있는 길의 아름다움은 그 길 위에서는 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청산도의 오후가 조금씩 깊어진다. 햇빛을 받은 유채꽃은 더욱 노랗게 빛난다. 돌담에는 따뜻한 볕이 내려앉고 바람은 꽃향기를 싣고 길을 건넌다. 나는 천천히 걷는다.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잡을 이유도,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야 할 곳도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어쩌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속도를 되찾았을 때가 아닐까. 청산도는 무엇을 더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 빨리 가라고도 하지 않는다. 잠시 멈추어 하늘을 보라고, 돌담 옆 작은 꽃을 바라보라고,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할 뿐이다.
섬을 떠나면 다시 빠른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약속과 일이 기다리고,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할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그래도 예전과 조금은 다를 것 같다. 마음 한편에 청산도의 길 하나를 간직하게 되었으므로. 살다가 너무 빨리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길을 꺼내 볼 것이다. 파란 하늘 아래 산은 푸르고, 돌담 너머 유채꽃은 노랗게 출렁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간다. 어디에 먼저 도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걷는 동안 자신에게 돌아가는 사람처럼. 청산도에서 나는 봄을 본 것이 아니라 봄의 속도로 걷는 법을 배웠다. 그날의 유채꽃은 오래전에 길가에 두고 왔지만, 노란 꽃길 하나는 아직도 마음속에서 천천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