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48
10월19일[연중 제28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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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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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PLOA4Mkua8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인용 도미니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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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루카 복음서는 자비와 치유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넘치는 은혜로운 복음서입니다.
죄인인 우리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지, 읽을때마다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치유사화 한 대목 한 대목 접할 때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똑같은 환자인 바로 나를 눈여겨보시고,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굽어보시고, 나와 접촉하신다는 느낌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계속 봉독하는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대놓고 율법교사들을 도발하시며,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아라.'는 식의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불의와 위선, 사악함과 이중성을 도무지 못견뎌 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토록 부드럽고 따뜻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싸움닭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공개적인 질타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었습니다.
눈에 독기를 품고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며 어떻게든 예수님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려고 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분을 코너로 몰고 갔습니다.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얼굴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도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안쓰러운 마음에 우리를 꼭 끌어안으시기도 하지만 끝까지 정신 못차리고 당신께로 돌아서지 않을때 우리를 당신 품에서 떼어놓으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나 섬뜩한 질책 역시 그분 사랑의 발로입니다. 어서 정신 차리라는! 빨리 당신 품으로 돌아오라는! 땅만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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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jTz1CNHG7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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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갇히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상 지식의 흐름을 막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식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모이면 그 모임 안에는 그 모임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그 공동체에 흐르는 지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지식은 공동체에 담기고 그 공동체에 속하면 그 지식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라며 각자의 지식대로 분열되는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하나이고 그 교회만이 “진리의 기둥”입니다.
류시화의 『인생 우화』는 폴란드의 ‘바보들의 마을, 헤움’에서 일어난 일들을 우화로 엮은 책입니다. 우화의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는데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야기들입니다. 여기에 「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근처의 상업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마을 의회 대표 베렉이 그 도시 시청 벽에 걸린 해시계에 대해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 그 동네에 시간의 기준이 될 해시계가 없어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시계들을 맞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만들어 마을 중앙 광장에 설치하기로 결의합니다.
해시계가 완성되었을 때 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과 재정을 들여 만든 해시계가 진흙 웅덩이 속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또 해시계는 이미 그 마을의 자랑이 되었기에 혹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해시계가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헤움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열어 해시계를 어떻게 보호하면 좋을지 상의하였습니다. 그들은 해시계 옆에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게 하고 지붕을 씌워 비를 맞지 않게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또 막대한 재정을 들여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운 해시계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어떤 도시에도 없는 해시계 박물관을 보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해시계는 지식의 총체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한 공동체 안에 갇히면 어떻게 될까요? 쓸모없게 됩니다. 해시계는 해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교만하여 항상 그 지식에 담을 쌓고 지붕이 되려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담과 지붕을 헐어내어 하늘의 빛을 받게 해야 합니다.
저는 논문을 발타살의 교회론에 관해 썼습니다. 처음 논문 제목은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폰 발타살은 교황청 교회 일치성 장관이었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현대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논문을 다 읽으신 지도 신부님은 “발타살 신학과 마리아-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로 바꾸어 책을 내주셨습니다. 발타살 신학 안에 저의 논문 내용이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타살 신학 안에서의”가 아니라 “발타살 신학과”로 바꾸어 저의 생각과 바타살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삼위일체 신학이 발타살과 다릅니다. 발타살은 삼위일체를 남자와 여자로 볼 때 성령을 그 자녀로 보았지만, 저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선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성령께서 그 관계 안에 들어가 있으셔야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성립된 후에 태어나는 자녀가 성령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저는 논문을 쓰면서도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고 하여도 그 안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참 스승은 예수님이시고 그 지식을 지닌 공동체는 상지의 옥좌이신 성모님으로 하는 가톨릭교회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학파에 속하면 분명 완전한 진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자세를 취할 때 “네가 발타살과 그의 학파 박사 신학자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고 똑똑하다는 말이냐?”라며 교만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진정한 스승은 그리스도, 마리아, 가톨릭교회뿐입니다.
저는 최대한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지식을 “직접”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거쳐서 오는 지식은 오염되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성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이것의 진위는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금서로 지정했다가 결국엔 신자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출판을 허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볼 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눈은 우리가 어떤 특정 학파나 집단에 속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가려집니다. 사람을 따르지 맙시다. 요한 사도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1요한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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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미주 지역은 사는 곳이 넓고, 시차도 있기에 한곳에 모여서 강의를 듣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 기획팀’을 발족하였고,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면서 강좌를 기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좋은 강의를 준비해 주시는 강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에 함께 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열정과 헌신으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기획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9월에는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 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구체적인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작성한 ‘사학징의(邪學懲義)와 형추문목(刑推問目)’에는 천주교인들의 현황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초대 한국 천주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압수한 물품에는 다양한 성물과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은 한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책은 한글로 번역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책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고, 신앙생활의 규범을 배웠습니다. 교우들은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미 순교한 신앙인들의 머리카락과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를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여성과 양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명도회는 오늘날 사목회와 비슷한 조직인데 명도회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는 천주의 영광을 밝게 드러냄(明顯天主光榮), 둘째는 성모의 공덕을 찬송함(頌揚聖母功德), 셋째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침(訓誨愚蒙), 넷째는 냉담자를 일깨움(提醒冷淡), 다섯째는 곧 죽을 어린이에게 대세를 줌(洗將死之孩), 여섯째는 임종의 어려움을 도와줌(助臨終之險), 일곱째는 이단의 주장을 물리침(闢除異說), 여덟째는 미혹한 길을 열어 인도함(開導迷途)이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조선교회가 100년간의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도, 감옥에서도,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서 교우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2박3일을 걸어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마치면 다시 2박3일을 걸어갑니다. 고백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우들의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박해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를 성찰해 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80%가 넘는 교우들이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본당마다 예비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불 때도 선교했는데 선교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사제 성소가 줄고 있습니다. 박해의 시간에도 신학생을 선발하였고, 멀리 마카오까지 보냈던 교회입니다. 환영의 꽃다발이 아닌 포도청의 몽둥이가 기다릴지라도 굳센 믿음으로 사제가 되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교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욕심, 원망, 불평, 교만’한 사람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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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47-54: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이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다. 유다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정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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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47-51)
여기서 ‘너희’는, 복음 말씀 안에서는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데(루카 11,46), 말씀의 뜻을 생각하면 ‘모든 위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위선자들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은,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입니다. <확정된 일에 대한 예고는 아니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47절과 48절은, 위선자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겉으로는 예언자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과 다르지 않다.”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실제로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있으면서도,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존경하는 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아비에 그 자식들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라는 말은, ‘지혜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49절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박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박해를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박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박해자들의 범죄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하시는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것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50절과 51절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처벌하실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이것은 그만큼 박해자들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심판이 엄중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모든 시대의 모든 박해자’입니다. ‘아벨’은 창세기에 나오는 그 아벨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아벨을 첫 번째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는 역대기 하권 24장에 나오는 사제입니다. 역대기 하권은 구약성경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마지막 역사서이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즈카르야를 마지막으로 살해된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 후에도 많은 예언자가 박해를 받았고, 살해당했습니다. <신약시대 때에는 세례자 요한이 박해를 받았고, 살해당했고, 예수님의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박해가 외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위선자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요즘에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받는 박해에 관한 말씀을 해설하면서,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는 예수님 편에 서 있고, 예언자들 편에 서 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자칭 ‘열성적인 신앙인들’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는 일이 많았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일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유대교만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도 함께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열성적인 신앙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위선자들인 경우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기준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충성을 다 바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이 그 마음 안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그 사랑.(마태 5,44)> 그런데 사랑은 없고, 미움과 증오심만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마음에는 미움과 증오심밖에 없고, 바로 그 미움과 증오심은 그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선과 사랑’의 실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내 마음 안에는 정말로 사랑이 가득 차 있는가? 사랑을 위해서 박해를 감수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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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율법 교사를 향한 불행 선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시는 불행 선언을 듣고 있던 율법 교사는 그분께 불만을 품고 반문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함께 율법 교사를 향하여 위선적 행위를 지적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를 향하여 불행을 선언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던 조상들의 행위를 증언하면서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준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율법 교사들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배척하고 있음을 비판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같은 운명에 놓이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불행 선언의 두 번째 이유는 율법 교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식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지혜가 세운 집에(잠언 9,1 참조)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이해와 형식적 준수에만 관심을 가졌고,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풀어내고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율법 교사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을 비판하던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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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과 기념물을 건축하면서, 마치 자신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예언자가 오시리라 예언한 분이시며, 스스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고, 그래서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그릇된 인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마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 하였고, 특히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공부해서 전문가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이런 오류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늘 신앙의 기본 정신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합니다.
신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신앙인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교회를 대표하여 신앙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강변하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믿는 신앙과 몸담은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처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혹여 우리의 행실이나 태도가 사람들을 잘못된 인식으로 이끈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이런 꾸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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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이행하는 것을구원의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율법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의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원형을 무시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너무 덧칠을 하고 고정을 시켜놓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보다는 조상의 전통과 해석을 더 중요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주의에 갇혀 있는 구원의 말씀이 되살아 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정통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고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견해차를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2)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을 통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시고 흘렸던 피의 댓가로 인간은 죄에서 속량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자비가 당신 아들을 통하여 너그러움과 관용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골자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3,28-30)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유대인들의 구원관에서 이제는 세상 구원으로 향하는 한 분이신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을 유대인, 조상들의 관습과 전통으로 묶고 법의 정신보다는 형식적이고 글자의 율법으로 묶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빼앗었는데 마치 자신들은 그 책임을 회피하고 조상들과는 반대의 행동을 감춥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에게 미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그들이 썩은 뼈를 땅에 묻고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느님 율법의 정신은 왜곡시키고 인간적인 해석과 전통을 우선시하는 그들을 보고 올바로 깨닫는 사실을 망각한 사실을 집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그렇지 않아도 군중 앞에서 서슴치 않고 당시 누구도 그 앞에서 바른말을 할 수 없었던 위치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을 품기 시작합니다.
루카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루카 11,53-54)
우리 말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의 속담이 있습니다. 누구나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아부하지 말고 바른말을 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은 쉽지만 이 말을 실행하기란 얼마나 힘든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다 보면 바른말 해서 미움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느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침묵보다는 상대방에 맞추어 대충 추려서 말하거나 아니면 듣기 좋은 말로 바꾸라 할 수 있습니다. ‘둘러치나 메치나 매한가지’라는 말대로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용은 간단 한것, 다시 말해서 타협이나 꾸미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주님으로부터 ‘예언직’의 소명도 받았습니다. 때로 어렵고 걱정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변함없는 원칙은 ‘솔직하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의 태도나 시기 슬기로움이 따라야 하지만 어떻든 꾸미거나 변한 말을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말씀하시기에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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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트집을 잡는 사람>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 11,47)
요즘 정치 현실을 보면,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고, 발뺌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자기만 살면 되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우리가 뽑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 불행을 발판 삼아 행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내년 총선에는 꼭 기도하고,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은 거짓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전기는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말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실을 포장하려고 하다가 진실을 잃고 맙니다. 진실은 그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새 삶이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그들의 나날은 행복으로 뿌듯하고 즐거움이 해마다 철철 넘칠 것이오.)(욥기 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러실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물자를 얼마나 많이 만들고 있는지요?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히브 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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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어느 가정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해서인지 습관처럼 방문한 집의 책장을 주의 깊게 봅니다. 이 집의 책장에는 대부분 의학서적, 그리고 건강에 관한 책이 가득했습니다. 의료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가족 중에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의료 관련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뇨. 제 아내가 암 환자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런 책만 보게 됩니다.”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의료 관련 서적과 건강에 관한 책들을 계속 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알려는 그 형제님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더 알고 싶었던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건강이 좋아지는 음식이나 운동 등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왜 나 힘들게 아픈 거야?’라면서 짜증만 낼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보다 자기 고통이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문제는 아픈 아내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라면서 따끔한 회초리를 날리십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 사회에서 분명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쓴소리를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라면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오히려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더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바라면서 그 이웃을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위선과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사랑을 보지 않았고, 사랑의 대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만 최고라는 위선과 교만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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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은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불행한 이유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케 되지요. 지식이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이고 들어간다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인지.
단순 명확하게 얘기한다면 들어갈 곳은 천국이고, 지식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아는 지식이며, 그러니까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다는 말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법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율법 학자들이 치워버렸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오늘 로마서 말씀과 연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는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의롭지 않으며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면 의롭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도 믿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결국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율법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율법 학자가 율법에 대해 많이 알기는 하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요.
복음을 보면 율법에서 제일 중요한 두 계명에 대해 현명하게 대답하고,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 사랑 실천이 더 낫다고 대답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은 율법 학자도 있지만 대다수는 율법의 정신과 핵심을 잘 알지 못하여 율법에 얽매이는 율법주의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는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곧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만 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천국 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도 내가 열어드려야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처럼 천국 문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셔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열어주시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준수나 나의 공로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 곧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열어주시기를 청할 때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열어주십니다.
은총과 자비는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잖아요? 천국 문을 내가 억지로 열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요.
이것을 아는 것이 천국 문을 열기 위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은총을 믿고 청하는 것이 천국 문이 열리는 행복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지식과 같은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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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예수님만이 참행복이시다-
오늘 루카복음은 여섯의 불행선언중 마지막 두 개입니다. “불행하여라”를 읽는 순간, “회개하여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원하셨고 하신 것은 불행선언이 아니라 “행복하여라”로 시작되는 행복선언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진복팔단으로 시작됩니다.
행복이냐 불행이냐? 행복도 불행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원하는바 행복이요 불행을 택할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바 참행복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선택-훈련-습관의 영적 도식입니다.
“무기들이 침묵하게 하소서. 가자지구에서의 상황이 절망적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대문자 말마디가 절박한 상황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요 불행한, 참혹한 현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평화를 위해 10월27일 모든 신자들에게 기도와 단식을 호소한 교황님입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로 인한 전쟁이요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마태복음의 참행복이란 주제하에 전개되는 진복팔단의 내용들은 늘 들어도 정신이 새로워집니다. 가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이라 하여 참행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행복을 나눕니다. 정말 오늘날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목마르게 와닿는 이런 참행복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참행복 선언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결론같은 말씀도 참 고무적입니다. 아니 하늘에서 상을 받기 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참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근거는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두 말마디와 황옥연의 “사랑”이란 시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없이 보낸 날은 웃지 않고 보낸 날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의 희망은 겨울의 서리처럼 녹아버리고, 허비된 물과 같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바닷가에 서면
조가비만한 나
치악산에 가면
여치만큼 작은 나
그런데 하느님은
나를 산보다 바다보다
더 크대요
더 크대요”-
하느님 사랑은 이처럼 감동적입니다. 교황님의 사도적 열정이란 주제로 나눈 어제 수요일(10,18) 주중 알현시간 강의는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꼬의 일화입니다. 성인은 모든 이들에게 '온유함의 사도'로 보편적 형제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하루중 12시간을 감실앞에 머물러 기도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중에 활동케 하시도록 하라”란 주제로, ‘침묵중에 복음 선포’, ‘온유함의 사도직’ ‘애덕의 기쁨’이란 내용으로 성인의 삶을 압축했습니다.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미소로, 그분의 단순함으로 샤를로 형제는 복음을 증거했다. 결코 개종이 아니다. 결코 개종이 아니라 증거다. 복음화는 결코 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증거(witness)를 통해, 매력(attraction)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참사랑의 참행복만이 복음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깊이 젖어 살았던 성 샤를로 후꼬 성인의 영성이 그리워지는 참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탄이 대상이 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엘리트 집단이요 유식한 집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無識)하지 않았으나 무지(無智)했습니다. 참된 회개가 사랑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해도 하느님 사랑 공부 안하면 무지의 사람들일뿐입니다.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떠난 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역설적으로 현재까지 여전히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악행을 반복하는, 폭력의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됩니다.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저야할 것이다.”
인류사는 전쟁사이자 폭력과 보복의 역사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늘 이 세대에게 주는, 참으로 전격적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단호히 단(斷)!, 끊어버려야 할 무지의 악과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에 이어지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질책이자 하느님을 잊은 오만한 오늘의 식자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왜곡 부패 변질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는 법, 너무 부패 변질되기전 회개해야 함을 배웁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이 병이요 죄이며 악입니다. 이들의 행태가 점입가경 구제불능입니다. 마치 발악(發惡)하는 악마같습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이성을 잃었을 때, 상식과 양식을, 공정과 정의를 잃었을 때, 얼마나 사람이 악해질수 있는지, 잔인할 수 있는지,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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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루카11,52)
<위선과 자비!>
오늘 복음(루카11,47-54)은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 곧 예언자들을 거부한 행위를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로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그리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자비!'
'위선'은 '믿음과 삶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바라보면 모두가 위선자이지 않을까? 이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위선자가 되어 '죄인'이 되고, 어떤 사람들은 이 위선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인'이 됩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고, 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꾸지람을 듣게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의로운 행위'와 함께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절대적 전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자비'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이 자비로 돌아갑시다! 그래서 나의 위선으로부터 해방됩시다!
그래서 다시 믿고, 믿는 바를 다시 살아냅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1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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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wcp1gMcB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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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 50)
골짜기마다
가을 들꽃으로
가득한
요즈음입니다.
복음을 바로
보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상황을 똑바로
보아야
풀어나갈 길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예언자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책임감도
생기는 것입니다.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하는
거기에서
만나게되는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입니다.
깊은 역사의식과
민족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쁘고 악한 것을
쳐내는
지혜의 칼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골짜기를
흐르는 수많은
예언자들의
의로운 피를
기억합니다.
빈약한 변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책임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숙한 삶의
시작입니다.
용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실천에서
삶은 새로워집니다.
끝없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는
피의 역사는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새로움은
책임을 딛고
일어납니다.
책임이 있는 곳에
참된 용서가 있고
참된 희망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피가 우리들의
교훈이 되고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회개의 빛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서로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예언자적인 삶에
충실한 사랑의
자녀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눈물의 골짜기가
기도하는
백합의 골짜기가
됩니다.
성찰과 기도
교훈과 지혜는
이 시대를
밝히는
예언자들의
등불입니다.
등불과 함께
환히 타오르는
신앙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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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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