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시인은 주께서 선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였는데 그것은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시 73:2-3).
그의 영적 시력이 왜곡되어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였으며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얼마나 많이 오해하였는지요.
그의 시각이 바로 저의 시각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내가 바로 그 악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육의 눈으로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 했던 시인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시인은 성소인 아버지 집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종말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시 73:17).
내가 가야 할 그 파멸과 미끄러운 곳에 간 그들은 그 죄와 악한 행위로 인함이지만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심에도 죄인이 되어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오니 오늘 이 시간 크고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죽기에 합당한 이 죄인을 주께서 그 크신 은혜로 구원하셨으니 나의 남은 평생을 주께 드립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일 이후 새로 시작하는 한 주간입니다.
순간순간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뜻인 영생을 알고 날마다 누리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9:1-10
제목 :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 40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나의 묵상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사실을 통하여 아주 통쾌한 쾌감을 느끼면서 이제 북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신앙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뿌리깊은 북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그리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합으로부터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사실을 전해들은 이세벨이 즉각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1,2절).
즉 그녀는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일 그를 잡아 죽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이세벨의 반응은 이제 북이스라엘에 새로운 신앙 개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던 엘리야로서는 실로 낙심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그의 생명 유지를 위해 일단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의 브엘세바로 피신하였다.
브엘세바에서 동행한 사환을 머물게 하고 자기는 하룻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였다(3,4절).
이는 기대에 비하여 너무나 큰 실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무력감을 느끼며 죽기를 구하다가 지쳐 쓰러져 잠든 엘리야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보내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하시고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하셨다.
그렇게 두 번 먹고 마신 후에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라고 지시하신다(5-8절).
이에 엘리야는 그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40일을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기 있는 동굴에 들어가 머물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말씀하셨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한다.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의 제단을 허물고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지금 살아남은 선지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혼자 남은 나까지 죽이려 합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도 큰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 선지자였다.
어느 누가 감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1로 대결하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는 선지자 중에 선지자이다.
그는 그 영적 대결에서 한 판 승을 거둔 후에 그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에서 다 죽였다.
거기에 모인 수많은 백성들과 함께였다.
바알과 아세라는 신이 아니라 거짓 신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확실히 증거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에 아합 왕에게 비 소식을 전하였다.
그 비는 아주 작은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손바닥 만한 구름은 사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없음’이다.
그런데 그 없음에서 큰 비가 내렸다(18:45).
나라면 그런 손바닥 만한 구름을 보고 비가 내릴 것이라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다.
그는 아합에게 큰 비 소식을 자신 있게 전하고 기도할 때 작은 구름이 일어나자 이를 허투루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엘리야는 큰 비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마차를 타고 가는 아합 앞에서 왕궁이 있는 이스르엘까지 달려갔다.
그는 완전한 한 판 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왕궁에 들어간 아합은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을 시시콜콜 다 고자질한다.
그 이야기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살해되었다는 소식까지 들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사신을 보내 엘리야를 내일 이맘때 반드시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엘리야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남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로 간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냥 그렇게 두지 않고 천사를 보내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하신다.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하시고 힘을 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갈 것을 명하신다.
엘리야가 누구인가?
그는 선지자 중에 선지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고작 이세벨의 엄포 하나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남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를 거쳐 광야로 도망을 간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충분히 그럴 만 하다.
이세벨이 보통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을 뿐 아니라 지금 자기 혼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로 들어간다.
광야는 무덤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덮친 낙심과 절망 그리고 두려움은 곧 무덤과 같은 죽음이다.
거기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고 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인 천사를 보내어 그에게 떡과 물을 공급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떡과 물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예표한다.
이것을 먹고 힘을 얻어 하나님이 지시하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그는 죽음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것이다.
(요 6:54-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님의 무덤에 연합한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당도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떨면서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신적 권능으로 찾아가셨다.
그리고 평강을 선포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요 20:21-22)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엘리야가 두려움에 떨며 죽기를 구했던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 후에 두려워 떨며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사명을 받아 주의 일을 감당한다.
나는 이 땅에 살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사역에 거의 목숨을 걸었던 자였다.
사역의 열매가 있으면 살 것 같은데 열매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다.
물론 사역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던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 살 맛이 났으며 삶의 의미도 충분해서 자신감도 넘쳐났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가 맺히지 않고 쪼그라들면 삶의 의욕도 말라버렸다.
이런 나는 이 땅에서의 사역이 전부인 줄로 알았고 그것에 목숨을 걸었던 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로 인하여 어떠한 의욕도 다 사라졌고 목회마저 그만 두고 사임하려고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은 내게 복음을 듣게 하셨다.
그 때 내가 들은 복음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그런 복음의 소리를 듣기 원했지만 정작 복음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장사복음이라는 무덤의 복음을 들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이 땅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다면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타 다른 종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영생에 있기에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깊은 수렁으로 이끄시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장사복음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복음이 아님을 나는 그제야 깨달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장사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제는 가는 곳마다 종교로써의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써의 예수를 전한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이것은 영원한 나라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모른 채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열과 성을 다했다는 것이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물론 우리에게 주신 이 땅에서의 삶 역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땅의 삶이 현실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 곧 묵시의 세계가 진짜 현실임을 알고 영원한 그 나라를 오늘도 누리며 살아가는 자로 서기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한 때는 선지자 중에 선지자요 큰 선지자였던 엘리야가 겨우 이세벨의 엄포에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 도망한다고 비웃으며 무시했던 자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 나서 복음으로 다시 보니 그야 말로 복음대로 산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도 그런 복음을 알아 날마다 우리 주님의 생명과 연합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나의 현실이 아니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이 계신 묵시의 세계가 나의 현실임을 믿습니다.
그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이 하루도 기쁨과 감사로 살기 원하오니 나를 붙들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