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의 기원과 성직자 사례비
씨프리안(200-258)은 성직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관습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레위인들이 십일조에 의해 지원받았던 것처럼 크리스천 성직자도 십일조에 의해 생활비를 지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레위인 제사제도는 철폐되었고, 우리가 모두 다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십일조를 요구한다면, 모든 크리스천들이 서로에게 십일조를 해야 한다!
씨프리안의 주장은 그 당시에 아주 보기 드문 주장이었다. 한참 후에 가서야 그것이 크리스천 다수에 의해 도입되었다. 씨프리안 이외에 콘스탄틴 이전의 다른 누구도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십일조를 주장하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 300년이 지난 4세기에 가서, 몇몇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성직자를 위한 크리스천의 관습으로 십일조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8세기까지는 크리스천들 중 널리 퍼지지 않았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처음 700년 동안엔 십일조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각주 - Edwin Hatch, The Growth of Church Institutions(Hodder and Stoughton, 1895), p.102),
크리스천의 십일조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십일조는 국가로부터 시작해서 교회 안으로 옮겨갔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서유럽에서 땅을 빌려준 대가로 임대료를 징수하는 관습이었다. 유럽 전체에 교회들이 점점 더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자, 10%의 임대료를 교회들에 바쳤으며 10% 임대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을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와 동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도화된 크리스천 십일조는 구약의 관습과 이교의 제도의 혼합물에 기초한 것이다.
8세기 무렵에 십일조는 서유럽의 여러 곳에서 법으로 제정되었다. 10세기 말에는 임대료로서의 십일조와 구약의 도덕적 요구 사항으로서의 십일조의 구분이 희미해졌다. 십일조는 이제 유럽에서 의무가 되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8세기 전에는 십일조가 자발적인 헌금으로 실행되었었다. 그러나 10세기 말에는 국가 교회를 지원하기 위한 법적 의무로 귀속되었다(성직자에 의해 요구되었고 세속 관리들이 그것을 집행했다).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은 십일조를 법적 의무와는 떼어 놓았다. 그러나 십일조의 관습은 법적으로 묶어 놓았을 때 못지 않게 오늘날도 팔팔하게 살아 있다. 물론 당신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해서 겉으로 심판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에서 십일조 교인이 아니라면, 당신은 수많은 사역의 기회들에서 원천 봉쇄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강단으로부터 영구히 죄인의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성직자의 사례비에 관해서는, 사역자들이 처음 3세기 동안은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틴이 등장해서 교회와 지방 금고와 국고에서 성직자에게 고정적인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를 제정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해로운 관습인 성직자의 봉급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일만 악의 뿌리
믿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결정 또는 확신에 의해 십일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십일조가 모든 믿는 자들을 묶어 버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나타난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의무적인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가난한 크리스천들이 더 심한 가난으로 곤두박질쳐졌다. 십일조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쳐질 때, 힘겹게 간신히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죄책감 때문에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좋은 소식"으로부터 복음을 철수시켜 버렸다.(각주 - 마태복음 11:5; 누가복음 4:18; 7:22; 고린도전서 1:26-29; 야고보서 2:5-6). 좋은 소식이 아니라 그것은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자유가 아니라 압박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하신 원래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거꾸로 말하면, 현대의 십일조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수입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10%가 얼마 안 되는 분량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부자들의 양심을 마비시킨다(그들의 생활방식에 별로 큰 충격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상당수의 부유한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수입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10%를 헌금 바구니에 넣고서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에 대해 아주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시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상기해 보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은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각주 - 누가복음 12:1-4).
애석하게도 십일조는 종종 제자도의 리트머스 테스트로 간주된다. "당신이 좋은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십일조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엉터리로 적용한 것이다. 십일조는 크리스천의 헌신도를 말해 주는 증거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1세기 크리스천들은 헌신되지 않은 사람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십일조를 하라고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며 서성거리고 있는 배후에는 성직자 사례비라는 뿌리가 있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그들에게 생활비와 목회 활동비를 지원할 의무가 회중에게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십일조가 계속 굴러 들어오게 하려고 물질 축복의 약속이나 물질적 저주에 대한 두려움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의 십일조는 크리스천 복권에 버금간다 할 수 있겠다.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돈으로 갚아 주실 것이요, 십일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 생각은 좋은 소식으로서의 복음의 심장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성직자의 사례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신약성경의 근거가 희박하다. 사실 성직자 사례비는 새 언약 전체의 기본 성질과 전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각주 - 사도행전 20:17-38.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부탁한 마지막 말들을 주목하라. 그래서 더 중요하다; 데살로니가전서 2:9; 베드로전서 5:1-2). 1세기의 장로들(목자들)은 결코 봉급을 받은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양떼들로부터 취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에게 주면서 살았다.(각주 - 사도행전 20:33-35).
목회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것은 그들을 전문 직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비즈니스로 둔갑시키는 성직자 계급을 만들어 놓는다. 목사와 다른 교역자들이 "봉급"을 받고 사역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문 직업인들이다.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의지하는 상태로 빠져 버린다.
만일 크리스천 모두가 주님의 집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확실히 안다면(그리고 그들이 그 부르심에 따라 실지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즉시 질문 하나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목사에게 봉급을 줘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그러나 수동적인 제사장 제도가 존재하므로 그런 질문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교회가 제대로 기능이 발휘된다면, 전문직 성직자는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곧, "이것은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은 이단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간단히 표현해서 전문직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구별된(그리고 위험한) 문서라서 오직 자격증 가진 전문가만 다룰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도록 조장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목사에게 봉급을 주는 것은 그로 하여금 사람을 기쁘게 하도록 강요한다. 목사를 사람의 종이 되게 한다. 그의 식권이 얼마나 회중이 그를 좋아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튼튼한 십일조 교인들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자유롭게 말할 자유가 없다. 여기에 목사제도의 두통거리가 놓여 있는 것이다.
유급 목사제도의 또 하나의 위험은, 그것이 아무런 기술(자비량 할 수 있는)도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 이교 문화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웬만큼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는 전문직 목회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사람들 대부분은 목사제도의 압도적인 권위 앞에 너무 순진하다.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씹어서 뱉는 것에 지칠 줄 모르는 정체 불명의 제도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전문적 목회자의 존재를 의도하신 적이 없다. 그런 직책에 대한 성경적인 의무나 정당성은 없다. 사실 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변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교회 예배 중에 헌금을 수거하는 일은 봉사위원(usher)들이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회중에게 "헌금접시"를 돌려서 수거한다. 헌금접시를 돌리는 관습도 사도 시대 이후에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1662년에 시작되었다. 물론 그 전에는 교회당 안에 구제헌금을 위한 접시나 함이 비치되어 있었다.
봉사위원 제도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영국 국교회의 의식을 재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봉사위원들의 임무는 사람들이 어디에 앉았는가를 파악해서 헌금을 수거하고, 누가 성찬에 참여했는지를 알아 내어서 기록하는 것이었다. 봉사위원의 전신은 교회 "관리인(porter)"이었다. 관리인은 3세기부터 교회에 생기기 시작한 하급 사역자(일종의 낮은 계급 성직자)였다. 관리인들은 교회당의 문들을 잠그고 여는 것, 건물의 제반 관리, 그리고 집사들의 일반적인 지시 사항을 주관했다. 관리인은 종교개혁 시대를 전후로 영국에서 "교회 관리장(churchwarden)"으로 대체되었고, 나중에 봉사위원으로 대체되었다.
결론
결론적으로 십일조가 성경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천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셨다. 1세기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300년 동안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것을 행하지 않았다. 십일조는 8세기까지 크리스천들 사이에 널리 시행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의 헌금은 성도의 능력에 따라 드리는 것이었다. 크리스천들은 사도들이 교회들을 세우러 다니며 여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이외에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했다.(각주 - 다른 성도들을 돕는 것: 사도행전 6:1-7; 11:27-30; 24:17; 로마서 15:25-28; 고린도전서 16:1-4; 고린도후서 8:1-15; 9:1-12; 디모데전서 5:3-16, 교회 세우는 사람들을 지원한 것: 사도행전 15:3; 로마서 15:23-24; 고린도전서 9:1-14; 16:5-11; 고린도후서 1:16; 빌립보서 4:14-18; 디도서 3:13-14; 요한삼서 5-8. 지갑과 마음과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관복음의 여섯 절 중 한 절이 물질에 관한 것이다. 신약성경의 38개의 비유 중 12개가 물질에 관한 것이다.). 초기 교회의 가장 대단한 간증들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힘써 도와준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철학자 갈렌Galen 같은 사람을 포함해서)로 하여금 초기 교회의 놀랍고도 매력 있는 힘을 목격하게 했다("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를 보라").
십일조는 신약성경에 4번밖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 중 크리스천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십일조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특별한 제사장들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제도가 필요했던 구약 시대에 속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율법의 변화"가 생겼다. 옛 것은 폐지되었고 새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다 제사장이다(하나님의 집에서 자유롭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율법, 옛날 제사장 제도, 그리고 십일조는 모두 십자가에서 못박혔다. 이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전의 휘장, 성전 세금, 그리고 특별한 제사장 제도가 없다. 친애하는 크리스천이여, 당신은 십일조의 굴레와 비성경적인 성직제도를 지원할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 지음 이영목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