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수 金良洙 (1896 ~ 1971)】 「미국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서 일제 총독정치 진상 폭로」
1896년 10월 10일 전라남도 순천군 장천리에서 김영묵(金永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9월 4일에 태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호는 약영(若瓔)이다.
1910년 일본 도쿄 준덴(順天)중학에서 수학하고, 1914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1918년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22년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을 시작해 1924년 약영(若嬰)이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에 「1년간의 세계 대세」 논설을 5회 연재하였다. 같은 해 4월 잡지 『개벽』에 「세력균형주의와 국제협조주의」를 발표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 범태평양회의에 특파원 자격으로서 성명을 통해 일제 총독정치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28년 6월 29일 미국 뉴욕에서 순 한글 신문 『삼일신보』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주필로서 동포들의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35년 조선어어학회에서 역점 사업으로 진행하던 사전 편찬 사업의 재정 후견인 역할을 담당했고, 같은 해 표준말 사정 위원 전북 대표로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에서,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사업 재정 후원 담당 혐의로 12월 23일에 붙잡혀 함남 홍원경찰서에서 가혹한 취조를 받고 기소 처분되어 옥살이를 시작하였다. 1945년 1월 함흥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광복 후 순천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 순천에서 제2대 민의원에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의정 활동을 했다. 1960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첫댓글 "말은 곧 마음의 표현이며, 글은 곧 뜻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