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는 물리적 제약(하부구조)이 인간 정신(상부구조)에 어떻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탐구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 '시녀'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계는 참혹하다. 이 세계에서 시녀들은 극도로 억압적인 체제의 부속품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기능적 관점으로만 파악하도록 요구받는다.
우리는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그릇이자 걸어 다니는 성배다.
238쪽
익히 알려진 대로 성모 서사는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단골 메인 테마이면서 꾸준히 비판받아왔던 지점이기도 하다. 어머니란 존재를 성스러운 메시아를 담는 그릇으로만 파악하려 들었던 작품들은 여지없이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소설 『시녀 이야기』는 그런 비판의 원형을 제공한다. 세계는 여성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또한 바라봐야 하는가. 아니, 어쩌면 시선의 방향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왜 여성은 언제나 시선의 객체로 소비되는가. 『시녀 이야기』에서 주인공 시녀는 그녀가 속한 세계에서 철저히 대상화된 객체이면서 동시에 소설 전체, 즉 한 세계를 힘 있게 끌고 나가는 예리한 시선의 주체이다.
『시녀 이야기』는 성서의 「창세기」에 적힌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라반의 딸들이자 야곱의 아내였던 두 여자는 남편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기 위해 처절한 경쟁을 벌였다. 레아가 아들 넷을 낳는 동안 태기가 없었던 라헬은 급기야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들여 두 아들을 얻고, 이를 본 레아도 자신의 시녀 실바를 동원하여 두 아들을 얻는다. 이후 레아와 라헬이 각각 아들 둘씩을 추가로 낳아 야곱은 총 열두 명의 아들을 갖게 되고, 이들이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게 무슨 난장판인가 싶지만, 고대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건 아니다. 그리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해체하고 섬세하게 재구성하여 『시녀 이야기』에 풀어놓는다.
이야기 속 배경은 개신교 근본주의와 남성 우월주의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세계다. 이곳에서는 지배계급인 '사령관'이 그의 한 명뿐인 '아내'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면 '시녀'를 배당받는다. 시녀는 '아주머니' 계급의 통제하에 '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임신과 출산에 최적화된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그것을 선한 것이라 여기도록 교육받는다. 시녀는 때가 되면 아내의 감시 하에 사령관과 동침한다. 이를 '의례'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 반체제인사로 발각되면 사형당해 '장벽'에 효수되거나 '콜로니'라 불리는 고되고 위험한 수용소로 보내진다. 여성의 경우, 불임 여성으로 판정되거나 가느다란 연대의 조짐만 보여도 그와 같은 형벌을 받을 수 있다. 여성들은 '눈'이라 불리는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으므로 혼자 있을 때에도 안심할 수 없다. 자살은 금지되어 있으며, 시녀들의 생활 반경에 자살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도구는 모두 제거되어 있다. 이 세계의 이름은 '길리어드'다.
아, 나는 얼마나 낭비해 버렸던가. 그 방들, 남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그 자유로움을.
우리가 빌린 권리를.
91쪽
엘리자베스 '아주머니'는 마취제를 쓰지 않는 것이 아기에게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말도 해 주었다. '내게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으리니(창세기 3:16)'
199쪽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366쪽
고통은 싫다. (……) '장벽'에 걸린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다. (……)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가고 싶다. (……) 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나는 비굴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실감한다.
495쪽
길리어드가 집권하기 전 주인공 시녀에게는 '준'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녀들은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준'은 프레드 사령관의 소유이므로 '오브프레드(Offred)'가 되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프레드는 간혹 인간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관습적인 규칙을 위반하면서까지 오브프레드에게 접근하던 사령관은 급기야 아내 몰래 은밀한 만남을 요구한다. 어쩔 줄 몰라 고민하다 결국 마주 앉게 된 자리에서 프레드는 황당하게도 '스크래블'이라는 보드게임을 제안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응한 만남에서 보드게임이라니. 그런데 몇 번의 보드게임 이후에 가진 '의례'에서 둘은 이전과 다른 묘한 기류를 느낀다. 심지어 사령관은 아내 앞에서 시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뻔했다. 둘 사이의 인간적인 감정이 아내에게 발각될 것이 두려운 시녀는 다음번 만남에서 사령관에게 말한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
뭘 말이요? (……)
그걸 할 때……. 그렇게 만지려고 하지 마세요……. 사모님도 계시는데.
내가 그랬소?(……)
강제로 임지를 옮겨야 할지도 몰라요. 콜로니로. 아시잖아요. 더 나쁠 수도 있어요.(……)
미안하오. 그가 말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소. 하지만 그 일이 너무…….
어떻다고요? 사령관이 얼버무리자 내가 따져 물었다.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지.
그걸 깨달으시는데 참 오래도 걸리셨군요. 내가 말했다. 사령관을 대하는 나의 말투만 봐도, 벌써 우리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
279-280쪽
물론 프레드 사령관이 이 깨달음을 계기로 반체제인사로 돌변하는 판타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쉽기 때문에. 프레드는 속물이고, 타인 특히 여성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는 인물이다. 준 이전에도 또 다른 오브프레드가 있었음을 준이 깨닫는 과정은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됐죠?"
(……)
"목을 매달았소."
(……)
기르던 개가 죽으면, 한 마리 더 사면 되는 거다.
(……)
"저도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326-327쪽
준의 방에는 샹들리에가 없다. 밧줄을 걸 수 있을 만한 물건은 그들이 모조리 들어내 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방 한 구석에 비밀스럽게 새겨져 있던 뜻 모를 낙서도 이전의 오브프레드가 남겼을 것이다. 준은 프레드를 통해 그 낙서의 의미가 '그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였음을 알게 되지만,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절망은 희망보다 강하다.
Nolite te bastardes carborundorum(그 빌어먹을 놈들한테 절대 짓밟히지 말라). 덕분에 그 여자 신세 퍽도 좋아졌겠다.
뭐하러 싸운단 말이냐?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을 텐데.
390쪽
희망과 절망, 긴장과 이완 사이를 오르내리는 이 흐름은 소설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7),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1905)과 같은 작품들에서 생생하게 묘사된 바 있는 위압적인 가부장 세계의 모습이 『시녀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창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오래된 표본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시사성과 시의성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는 오싹하고, 그만큼 재미있다. 『시녀 이야기』는 페미니즘 문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SF 장르문학으로서도 훌륭한 원형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소설의 후속작이 34년 만에 나오는 건 분명 드문 일일 것이다. 당대 화제작이었던 <돈키호테>(1605)의 속편이 10년 뒤에 나온 것도 늦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한 세대를 훌쩍 건너뛰어 나온 속편에는 특별한 사정을 있지 않을까. 어림에 그 사정은 작가 내부의 것이기보다는 외부 사정일 가능성이 높다. 캐나다의 대표 작가로 평가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와 그 속편 <증언들>(2019)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두 작품을 연결시켜주는 건 작가의 내적 동기라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의 반복이고, 그 시대성에서 독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시대성인가. <시녀 이야기>가 출간된 1980년대 중반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기로 전세계적으로 보수주의가 팽배하던 때였다. 당초 스탈린체제의 소련을 겨냥한 조지 오웰의 <1984>(1949)가 정작 1984년에는 새로운 억압과 감시체제로 화살의 방향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1960~1970년대의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세대로 성장하고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애트우드에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레이건 시대의 미국을 가상의 신정국가로 비유한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다(두말할 것도 없이 <증언들>이라는 늦은 속편의 배경에는 트럼프 시대의 등장이 있다).
애트우드는 소설에서 묘사되는 가부장적 전체주의 국가 길리어드가 미래의 국가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 소설의 말미에 놓인 ‘<시녀 이야기>의 역사적 주해’에서(이 주해 역시 소설의 일부다) 22세기 말 한 역사학회 발표자의 주요 업적이 ‘이란과 길리어드: 일기를 통해 바라본 20세기 후반의 두 유일신정국에 대한 연구’라는 설정을 통해서 레이건 시대 보수화된 미국의 가까운 미래상이 이란과 같은 신정국가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지만 이슬람 신정국가 이란이 길리어드의 모델인 것은 아니다. 길리어드는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이 세우고자 했던 기독교 신정국가를 그대로 실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교리를 그대로 구현하고자 한 길리어드는 남성 권력자 사령관을 정점으로 모든 것이 위계화된 가부장제 사회다. 구성원들의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통제되며 여성은 가임과 출산으로만 역할이 한정된다. 그에 따라 여성은 아내와 시녀(대리모), 하녀, 아주머니 등으로 계층화, 위계화된다. 얼핏 <1984>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희망도 갖기 어려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트우드는 적어도 오웰만큼 부정적이지는 않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오브프레드가 자유를 박탈당하기 이전의 이름과 가족에 대한 기억, 그리고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도 희망을 갖게 하는 설정이다. 게다가 오브프레드 같은 시녀들뿐 아니라 길리어드 체제의 내부자들조차도 규칙에 대한 위반을 거리낌없이 제안하거나 저지른다. 주인공 윈스턴의 반란 기도가 철저하게 무력화되는 <1984>의 결말과 비교되는 점이다.
다만 <시녀 이야기>의 희망은 그 ‘역사적 주해’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 의해 자행된 마녀사냥을 다시 소환하여 환기시키는 오브프레드의 기록을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식으로 ‘시녀 이야기’라고 이름붙이고 ‘이야기’(tale)에 여성을 비하하는 ‘꼬리’(tail)라는 뉘앙스를 얹어서 희희덕거리는 이들이 후대의 주해자들이다. 그들은 과거의 진실은 암흑에 갇혀 있기에 지금의 선명한 빛으로도 정확히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시녀 이야기>의 독서 혹은 해독은 이러한 역사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가능하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여성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독자가 오브프레드의 증언의, 애트우드의 메시지의 정확한 수신자가 될 때에라야 이 반복은 중단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