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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순교자로서 삶의 주인공,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평화의 사도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20-2005, 재위 1978-2005)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은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소리를 높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은 가장 무거운 죄임을 천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행된 전쟁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생토록 ‘전쟁과의 전쟁’을 주도하셨던 그분의 평화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약해보니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길 내용이더군요.
“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선언합니다. 폭력은 악입니다. 폭력은 결코 건설의 도구가 아닙니다. 폭력만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는 외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간의 품위에 맞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폭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길을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니다. 극단의 야만에까지 떨어진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한국 교회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그분은 순교자들의 땅이자 분단국가, ‘전쟁 발생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을 각별히 마음에 두셨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기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셨던지 교황 재위 시절 두 차례나 방한하셨습니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성체 대회 참석차 방한하셨는데, 당시 주제는 한반도 평화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평화와 정의 속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비극적 분단을 가슴아파합니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고난은 분열된 이 세계의 상징입니다.”
2011년 5월 1일 바티칸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감동 깊게 묘사하셨습니다.
“저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2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저를 로마에 부르셨습니다. 저는 23년 동안 그분 바로 옆에서, 매일 그분을 뵈면서, 그분의 인격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켰고 든든히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복잡다단한 직무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의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하나 그분의 모든 것을 벗기셨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바위로 남아 계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6년 5개월이란 긴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총 104회, 129개국을 방문하셔서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하신 세계 지도자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지구를 서른 바퀴 도는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기록적인 순례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라진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리는 다름 아닌 평화의 다리, 반전(反戰)의 다리, 사랑의 다리,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겹겹이 둘러쳐져 있던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부자와 빈자 사리의 수많은 벽을 허물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정의의 실천, 가난한 이웃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국가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행 위험 지역이라며 측근들이 만류할 때조차도 사랑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 평생은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중단 없는 긴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깨어있게 하시는 이유와 깨어있는 방법>
복음: 루카 12,35-38
스페인 베니돔에 건설 중인 47층 높이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계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스페인 매체 에코노미아가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20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개발자가 욕심을 부려 47층 269개의 방으로 변경해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최초의 설계에서는 20층 건물에 적절한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건물로 바꾸며 엘리베이터를 추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변경된 계획으로 인해 비용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사임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부실 자산이 되어버린 이 빌딩에 대한 권한은 2012년 갈릭시아에서 스페인 배드뱅크로 넘어갔습니다.
설령 건축디자이너가 잘못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투자한 사람들이나 승인하고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건축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이상하다고 여겼을 텐데 왜 수많은 사람이 설계를 보고 거의 다 짓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돈과 명예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눈이 멉니다. 욕망이 우리 영적 감각을 잠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매우 무섭거나, 혹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이 무섭다고 여겨질 때는 주인이 나가 있을 때 주인이 없을 때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할 때는 일상이 더 개인의 욕망에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멀면 엘리베이터가 없이 고층 빌딩을 지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성모님은 술도 드시지 않으셨겠지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습니다. 욕망은 타인은 신경 쓰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의 욕망은 왜 강해지는 것일까요?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해 우리 안에 넣어 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 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실험자에게 집어던집니다. 실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 버립니다. 옆의 원숭이에게도 위협을 가합니다. 주인도 싫고 옆의 원숭이도 밉습니다. 인간도 이렇게 욕망이란 것이 하느님과 이웃들에 대한 원망이 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치 하느님께서 없는 것처럼 욕망에 물들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욕망은 사람은 모기로 만들어서 자기만 생각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습니다. 누가 모기와 함께 살고 싶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이도 먹지 못하는 다른 원숭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꿈에서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 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사제관이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감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제가 된 것에 대해 이전에는 그만큼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니까 조금 더 깨어있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불만을 욕망으로 채우려 하는 게 줄어들고 감사하는 분을 위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깨어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이를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의 욕망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타인을 미워하는 삶에서 해방해줍니다. 사랑하면 그분이 올 것 같아 환청도 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샤워하다가 사랑하는 이의 전화인 줄 알고 물이 흐르는 채 전화기로 왔지만, 환청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면 세상 욕망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감사하려는 노력의 열매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2,35-38: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있고, 우리의 등불을 밝히고 허리에 띠를 띠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저는 조카가 많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봐왔던 이 조카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조카들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면서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그 순간 ‘나도 늙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을 봅니다. 아직 검은 머리가 훨씬 많지만, 흰 머리카락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또 얼굴의 주름도 많아지고, 깊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외모만 봐도 분명 늙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 듦의 결정적 표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삶에서 설렘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날의 설렘이 생각납니다. 신학교 입학할 때의 설렘, 사제가 되었을 때의 설렘, 인사이동 되어 새 부임지에 갔을 때의 설렘. 그런데 이제 그 설렘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설렘 대신 커진 것이 있다면 걱정이 아닐까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설레십니까? 사실 25년째 묵상 글을 쓰면서 매번 새로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복음 말씀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지금 상황에 따라 새로워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설렘은 사라지고 있는데, 주님 말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렙니다. 하긴 주님 나이에 비한다면, 지금 나는 ‘점’에 불과하니 설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까요?
설렘을 느끼려면 더 알아야 하고, 더 자세히 봐야 했습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서 설렘을 사라지고 걱정만 늘어납니다.
젊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설렘을 갖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더 자세히 보면서 보다 젊게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어떤 종이 충실한 종이라면서 주인에게 칭찬받겠습니까?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깨어 있는 이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시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다른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습니다. 주인이 띠를 매고 그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설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단,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당신을 자세히 보기 위해 시선을 마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행복은 긍정적 믿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닐까(나란).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인간이 된
우리는 모두
하나로 결합되어
거룩한 영의 성전으로
지어지고 있다네.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날마다
모든 이들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거룩한 성전을 지어간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삶은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 깨어있는 삶이 곧 영적인 삶입니다.
이 영적인 여정은
절망에 빠지거나 자기만족에 빠지려는 위기와 유혹을
수없이 넘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한 번 넘었다고 해서 끝나는 길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영적 여정의 깨어 있음은
결단과 투신을 요구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깨어 있음은 하느님 행세를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 깨어 있음은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분명히 아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깨어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12-22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