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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 더 큰 사랑에 더 감사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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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더 큰 사랑에 더 감사하는
<05:56. 우선 올림 >
http://www.ofmkorea.org/ofmhomily/546540
< 06:51. 게재>
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02 05:43
- 더 큰 사랑에 더 감사하는
오늘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실은 자비의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제이고
그래서 자비의 하느님 비유가 제목으로 맞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의 캐릭터 보듯 하나하나 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작은아들은 눈치나 상황을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굴곡 많은 캐릭터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요구되는 역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이기에 굴곡은 없지만 억울한 캐릭터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자비는 큰아들에게보다는 작은아들에게 잘 나타납니다.
왜냐면 자비는 사랑 중에서도 죄인에 대한 은총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미사 때마다 통회의 기도 다음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을 바치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작은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자비를 받습니다.
반면 큰 죄를 짓지 않은, 아니, 어쩌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큰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또 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아버지의 자비를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동생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한 억울함,
동생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억울함을 아버지에게 토로합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을 제대로 잘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랑에서 박차고 나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사랑을 늘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버지 사랑 안으로 달려들지도 못해 억울한데,
그런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입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하지만
작은아들은 기쁨 곧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기쁨을 드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기 몫을 챙겨 떠나는 작은아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강제로라도 자기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자유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떠나는 죄를 짓지만
이 자유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큰 죄인인 우리를 자비로이 받아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 위험한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더 큰 사랑에
더 감사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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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오’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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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진정한 사과는 먹구름을 걷어내고, 거친 바다를 잠잠하게 하며, 새벽의 부드러운 빛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한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첼 E.굿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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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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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느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 숨게 됩니다. 내가 그분을 멀리할 뿐입니다. 나를 애타게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 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 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아들이 배고픔에 지쳐 돼지나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을 때는 집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회개한 것은 아마도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하고 연습한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고 하시며 먼저 받아주셨을 때일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같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큰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살았으니 오랫동안 아비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사람을 살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며 목을 뻣뻣이 하는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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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들과 뉴욕에서 댈러스까지 자동차 여행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이 제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까지 가는 길에 동행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운전해 주었고, 가는 길에 숙소를 예약해 주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던 것처럼 먼 길을 가는 제게 신부님들이 함께해 주니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교회에 관한 이야기, 정치에 관한 이야기, 사제 생활에 관한 이야기, 문학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기에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숙소를 예약한 신부님은 그동안 쌓아 놓은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에 업그레이드된 숙소를 잡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도 업그레이드된 항공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저의 마일리지를 보고서 저도 얼마든지 업그레이드된 숙소와 항공을 예약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비로소 보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에도 업그레이드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일리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저는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능력이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는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맬지라도 회개하면 밝은 광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방탕하여 하느님과 멀어졌을지라도 회개하면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였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에 심취했고,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개하였고, 위대한 교회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회개하였고, 쓰러져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간직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였던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여 업그레이드 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업그레이드된 신앙을 선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큰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들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고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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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지금까지 수많은 묵상과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그만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풀어보고자 합니다. 복음에서는 비유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렇습니다. 죄인들과 음식을 먹는 주님과 제자들에 관한 비아냥으로 오늘 복음의 비유는 시작됩니다.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 곁에 있는 죄인들은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처진 어깨와 죄의식에 빠져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요. 주님 곁에 있는 죄인들은 모두 밝은 표정으로 기쁨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함께 있는 그것만으로 그들의 어두움이 밝음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은 만으로도 우리 어둠은 밝아집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느님 앞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처럼 자기 잘못과 어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모든 것은 다시 밝아질 것입니다. 진홍같이 붉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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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명강연으로 유명한 강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강연을 그렇게 잘하나요?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잘 헤아려 주나요?
강사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강연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못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을 담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체험이기에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아쉬웠던 것, 그렇게 못했던 것을 우리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명 강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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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
-"나는 누구인가?"-
요즘은 홈페이를 열어 뉴스 확인하기가 겁납니다. 어디나 어둡고 불길한 뉴스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느낌도 듭니다. 다만 교황님 홈페이지는 가장 먼저 열어보는 살아 있는 영성의 보물 창고입니다. 늘 어둔 세상에 길을 열어주는 희망과 지혜의 빛 가득한 뉴스와 기사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눈에 들어오는 여러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그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불림받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믿고 선포해야 할 진리가 되었다.”
“‘성 이념(Gender ideology)’은 우리 시대의 가장 추한 위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없애는 것은 인간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대신 ‘남자와 여자는 풍요로운 ‘긴장’가운데 존재한다(Man and woman exist in a fruitful ‘tension’).” 성 이념에 종지부를 찍는 얼마나 지혜로운 통찰인지요!
오늘의 다산 어록과 맹자의 사단설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고차원의 덕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일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다산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맹자
오늘 복음은 늘 들어도 늘 새로운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pure Gospel)’이라 칭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는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비유’라함이 적절할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이처럼 감동적인 예화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 묻고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이라 이 복음을 대하면 늘 넘치는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되며 오늘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루가복음의 결론같은 가르침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가6,36)
우리의 평생과제가 부여되니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갈파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하면 정주와 환대의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두편의 자작시입니다. 24년전 감동을 담은 “아버지 산처럼”이란 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서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품으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아버지 산처럼!”-2000.11.17.
늘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아버지를 닮은 불암산같은 요셉 수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침묵의 저녁 불암산!”
한량없이 크고 깊고 고요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 시를 썼을 때의 감동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이런 산같은 분입니다. 제1독서 미카 예언자가 고백하는 하느님도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와 일치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오늘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제 고백상담 집무실벽에 수십년동안 걸려있는 바로 귀환한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은 삶의 밑바닥까지 갔다가 거지가 되어 생환한 작은 아들의 환대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일체의 책임 추궁은 말끔히 사라지고 잃었던 아들을 찾음에 너무나 기뻐 얼싸안고 환호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은총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종들에 대한 명령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존재감 없는 거지같은 신분에서 왕자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의 신분을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채 존재감 없이 무명의 거지처럼 세상 속에 살다가 불쌍하게 죽어가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외아드님을 통해 날마다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귀환을, 생환을 환영하시며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불타오르는 질투에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는 큰 아들 역시 소위 잘 산다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우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산 큰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 아버지와의 신뢰 관계가 참으로 빈약했던 큰 아들입니다. 수십년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생각없이 타성적으로 정주하다보면 우리 또한 이런 큰 아들이 될 위험성도 다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의 속내가 환히 드러납니다. 너무 화가 나니 말에는 사실과 어긋난 과장도 왜곡도 심합니다. 아우가 아닌 저 아들이라 하며 아버지와 작은 아우를 하나로 몰아 붙입니다. 큰 아들의 태풍같은 분노를 미풍으로 바꿨을 다음 자비하신 아버지의 온유하고 진실한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네 것이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사가는 큰 아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남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반응을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효성스런 아들인 예수님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복음을 묵상할 때 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효성스런 아들로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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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회개>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
아직은
멀리 있어도
가야할 곳이
있으니
벌써부터
힘이 솟습니다
아직은
아득히 있어도
안길 품이
있으니
벌써부터
따뜻해집니다
아직은
그러하지 못해도
그리 될 수
있으니
벌써부터
새로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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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2.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루카 15,11-12)
바리사이들에게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라고 이르는 비유
이 비유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비유의 배경을 살펴보며 그 진실을 알아봅시다. 루카는 앞에서 우리 모두의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온유함을 베푸시는 데 대해 투덜거렸습니다. 자기들 보기에 부정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가르치시는 주님을 사악하고 불경스런 태도로 비난했지요. 그러자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만유의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이 확고하고 거룩한 행실로 세인의 칭송을 받는 이라도 당신의 뜻을 성실하게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지요. 아무리 평판이 나쁜 사람이라도 회개하면, 마땅히 함께 기뻐하며 그의 과거 때문에 나쁜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셋째, 우리 자신을 마치 죽은 자처럼 여겨, 사랑이나 슬픔이 우리를 거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성의 대가는 말합니다. “그 무엇도 하늘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라. 이 말은 각 개인이 천상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물은 사람을 거스를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또 다른 대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헛된 것이거늘, 그것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쉽게 등지게 하니, 이 어찌된 노릇인가? 영혼이 제 아무리 작다고 해도 하늘과 만물보다 더 위대하지 않은가?"라고. 그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눈곱만큼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을 마땅히 존중했더라면, 그들이 은혜에서 추락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마치 죽은 자처럼 처신해야 함을 가르치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철저하게 죽은 사람만큼 하느님을 충만하게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13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그는 본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명상하면서 찬송가 404장 1절과 2절을 이루는 종교시를 썼다. 레만 목사가 어려운 목회 사역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부인이 도시락 속에 어떤 종교시 한 구절을 인용한 쪽지를 넣어 주었는데 그 시에 영감을 받아 404장 3절을 추가로 적어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꾸란> 제31장 27절의 내용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아마 레만 목사의 부인이나 레만 목사 자신은 전혀 몰랐겠지만, 도시락 종이 쪽지에 적힌 시구가 <꾸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는지도 모론다. <꾸란>의 그 성구는 다음과 같다.
“지상에 있는 모든 수목이 펜이 되고 일곱 개의 바다를 더하여 물로 가득 찬 바다가 잉크가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 모두를 기록할 수 없나니, 실로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롤 충만하심이라.”(<꾸란> 31:27)
넷째,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이 전통 아랍 부족들이 신봉하던 ‘통속적 알라 신앙’과 크게 다른 점은 최후 심판 사상과 죽은 자의 부활 신앙에서 나타난다. 메카의 전통 아랍인들이 처음 무하마드의 예언을 거절하고 빅해한 이유 중 히나는 그의 신앙 속에 최후 멸망의 날에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과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생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말 사상은 후기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묵시 문학적 종말 신앙과 맥을 같이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슬람교가 유대교나 특히 그리스도교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슬람교에는 ‘대속적 속죄 구원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은 유일신 알라의 자비와 은총을 앞세우면서도 보다 철저한 윤리적 책임과 인과응보 사상을 강조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이라는 말 자체가 ‘복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은 알라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강조하고, 그렇게 ‘복종’하지 않는 자에 대한 응분의 심판을 강조한다. <꾸란>의 한구절을 다시 인용해 보자.
"알라께서 증언하사, 그분 외에는 신이 없으며 천사들과 학자들도 전지전능하신 그분 외에는 신이 없음을 확증하노라. 알라의 종교는 이슬람뿐이며, 이전에 성서를 받은 이들도 달리하지 아니하였으나, 그후 그들에게 그른 지식이 도래하였더라. 알라의 말씀을 불신하는 자 알라의 심판을 곧 받으리라."(<꾸란> 3 : 18-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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