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49
10월20일[연중 제2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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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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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9aURUcFqNU
[의정부교구 김현균 야고보 신부님 집전(탄현동 본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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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저희 피정 센터를 찾는 형제자매님들 중에, 가끔 레지오나 반모임, 꾸르실료 등 본당 활동 중에 만난 형제자매들이 열두 서너 명 소규모로 피정을 오십니다.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깨가 쏟아지고 이박삼일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앙 안에서 만나니 그렇게 우애가 깊은 듯합니다. 친형제 자매 ‘저리 가라.’입니다. 세월이 삼십 년 사십 년 흘러도 그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래서 신앙이 좋은 것이로구나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나이 불문하고 시간이 ‘순삭’입니다. 그동안 겪었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간 갈고 닦은 아재 개그들을 나누다 보면 금방 시곗바늘이 자정을 넘깁니다.
나름 수도생활 연식이 오래된 형제들끼리 만나면 더 재미있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꽃미남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영락없는 영감님들입니다.
아랫배도 불룩 튀어나오고, 머리도 희끗희끗, 무엇보다도 제일 큰 관심사요 대화 주제는 현저하게 줄어든 머리카락입니다. 그나마 아슬아슬 남아 있는 서로의 머리숱을 바라보며, ‘관리 좀 하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이 샴푸를 써보라.’ ‘저 피부과로 가보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현저하게 머리숱이 결핍된 형제 중에 한 분은 대뜸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깔깔 웃습니다.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자신은 머리숱이 적으니 그만큼 죄가 적다며, 위안을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머리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롭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대의 삶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대는 존귀합니다. 그대는 일어서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울며 애통해하는데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 그분의 사상, 가치관, 행동방식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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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YFIKbq3h0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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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공포 아니면 축복?>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나에게 공포일까요, 축복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선은 거짓말입니다. 자기 속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는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모조리 아는 분이 계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지은 후의 아담을 부르시는 하느님께서 이미 그들이 죄지은 사실을 알고 계심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솔직히 자신들의 잘못을 주님의 자비에 맡겨야만 했을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는 줄거리는 몰라도 제목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공포영화입니다. 내용보다 그냥 제목 자체가 공포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야기는 4명의 고등학교 친구가 7월 4일과 다가오는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면서 시작됩니다. 축하 행사를 마치고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따라 운전하던 중 우연히 보행자를 들이받았습니다. 당황하고 반향을 두려워한 그룹은 시체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는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쥴리는 1년 후 집으로 돌아와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라는 소름 끼치는 쪽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갈고리를 휘두르는 한 인물이 친구들을 표적으로 삼는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헬렌과 배리는 갈고리를 휘두르는 신비한 살인자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쥴리는 겁에 질려 자신들이 때린 남자가 물에 빠졌을 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미스터리를 더 깊이 파헤쳐가면서 쥴리는 그들이 때린 남자의 이름이 데이비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쥴리는 그날 밤까지 일어난 사건을 종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그 사고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절정은 살인자가 데이비드가 아니라 오히려 딸, 수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데이비드를 죽인 후 우연히 위 네 명에게 사고를 당하고 수장당할 뻔한 수지의 아버지 벤 월리스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차로 치고도 수장시키려 했던 이들에 대해 복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가 한 일을 알고 있다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도 우리가 한 일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끔찍한 기억이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다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알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 닥쳐올 징벌로부터 피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솔직히 의견을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이전보다 훨씬 솔직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놓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아신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이니 더욱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다 아시고 계신다는 믿음은 나를 솔직하게 그분의 자비에 맡기게 만듭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 가서 헌금하라고 어머니께서 주신 50원으로 오락실에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제가 성당 안 가고 오락실 간 것을 이미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보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보를 가지고 오락실에 가서 주보를 가져다드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제일 싫다고 솔직하여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헌금은 안 하고 동전을 헌금함에 넣는 척만 하고 그것으로 오락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꼼짝없이 성당 주일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다 아시고 계시다는 사실은 공포가 아니라 축복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만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 거짓이 없도록 합시다. 위선은 우리가 정말 그러한 존재로 알게 만들어서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어떠한 존재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믿어봅시다. 그러면 두렵겠지만, 그냥 숨기고 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를 솔직함과 회개,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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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약하냐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이 적습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와 어부들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때의 두려움은 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풍랑을 마주한 제자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우리의 삶에는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기 마련입니다.
세 번째는 물위를 걷던 베드로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의 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근심과 걱정’입니다. ‘미득선수실(未得先愁失) 당환이작비(當歡已作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근심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쁨이 먼저 떠나간다는 뜻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네 번째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입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허망하게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죄가 커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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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7: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절) 말씀하신다. 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겉꾸밈, 즉 위선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4-5절). 그분은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마태 10,28) 분이시다. 그분만이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인 자를 두려워하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그분은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 자녀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까,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할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할 때, 즉 당신의 말씀과 뜻 그리고 당신의 일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차지할 수 있게,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율법 교사나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단돈 두 닢에 팔리는 참새 다섯 마리조차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지 알 수 있다. 미물까지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알고 또 올바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외면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이 재현되지나 않는지? 그분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증언하고 있는지? 이러한 여러 가지를 반성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성소이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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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1ㄷ-7)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또는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현세적인 복’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재물을 섬긴 사람들입니다.(루카 16,14)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라는 말씀을 앞의 말씀에 붙여서 읽으면, “심판 날이 되면 위선자들의 위선은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이고, 위선에 대해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뒤에 있는 말씀에 붙여서 읽으면, “신앙과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알려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마련이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알려질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신앙과 복음을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벗’은(친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해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 무서워서 복종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벗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또는 “박해자들의 힘에 굴복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라는 말씀은,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 또는 “주 하느님만 섬겨라.”라는 뜻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라는 말씀은, “온 세상은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행 실천과 사랑 실천을 아주 세세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과 선행과 사랑 실천은,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간에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은, “너희의 신앙생활이 헛일로 끝날까봐 두려워하지 마라. 충실한 신앙인은 반드시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신앙인들의 고귀한 영혼을 하찮은 참새들과 비교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박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 권력’의 ‘하찮음’을 부각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신앙인의 충실한 신앙생활은, 그리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의 영혼은, 세상의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더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여기서 ‘참새’를 ‘박해자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박해자들은 세속에서는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하찮은 참새들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악행을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자들은 반드시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라는 말씀은, “너희의 영혼은 박해자들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히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면서, 그분들과 함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요한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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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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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복음 12장 1절-7절)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하고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지요.
우리는 매일 나름대로 바둥대며 살 때가 많아요. 해야 하는 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 이것 갚고 저것 쓰려면 빠듯한 예금통장의 잔액, 그리고 해야할 업무들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의미도 없는 일상생활에서 익숙하다 못해 길드는 우리의 모습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지하철에 몸담은 승객처럼 ‘어느 역에 내리세요’라는 말에 따라 하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도착합니다. 아침에는 그 반대이고요.
그런데 다행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선물은 어떤 댓가가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에 사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할 말은 없지요.
우리에게 수십 억 년 그것도 숫자로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그런 세월 속에서 이 땅에 이 시대, 그리고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의 주제는 이 세상에 힘 있는 세력, 그것이 사람이 쥐고 있든, 아니면 돈이 쥐고 있든 그 앞에서 기죽고 살지 말라는 말씀이시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의 위세는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해석할 권한을 잡고 있었지요.
심지어는 사두가이와 합세해서 성전을 배경으로 최고 종교회의 산헤드린(סנהדרין)은 재판기구의 배경은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들의 눈치를 볼 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세력 앞에 맞서신 주님께서 생명이 위협을 받으신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복음 12장 5ㄱ절) 그러시면서 이어서 주님께서 오늘의 주제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복음 12장 5ㄴㄷ절)
주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비록 세력이 세상에서 나를 좌지우지하며 생명까지 위협하고 육신을 죽이는 힘이 있어서 두려울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앞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하느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의 세력 앞에 주님처럼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거두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참새까지도 먹이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아끼시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복음 12장 6절-7절)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절대적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로마서 4장 2절-3절)
사도 바오로는 이이서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죄 중에 있었다 하더라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용서받고 행복을 누린 사람.’으로 사도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설명했듯이 세상에서 어떤 일의 대가로 보수를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세상의 인간관계를 넘어서 사랑으로 용서하고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우리는 사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실 아쉬운 것이 없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며 행복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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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몇 가지 단편의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이 부분의 본문에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하나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그 사이에 ‘두려워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처음 언급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마지막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한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감정은 대개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신 하느님을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소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를 극진하게 아끼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며 보살피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공포가 아닌 경외심으로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나는 지금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가 공포에만 머문다면,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하느님마저도 공포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히는 공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깨달음이 오늘 은총 안에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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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요?>
무엇인지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고,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고요를 찾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감사도 침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기도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서운함 없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루카12,7)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주님은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떤 것을 아는 체, 가지고 있는 체하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만져놓고서는 향내가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고 겉꾸민다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들은 바를 가슴에 새기고 또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본당 생활을 하다 보면 피정이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겸손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더 교만해지고 뻣뻣해지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됩니다. 받은 은총을 말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21,2).“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만큼 삶의 모범을 드러내야 합니다. 은총을 증거 하지 못한다면 바리사이의 위선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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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올해 11월 16일이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접고 대신 주님 안에서 평화와 위로의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수능을 생각하다 보니, 요즘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때 이런 말을 선생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사당오락’ 네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불합격한다는 말입니다. 참, 이런 말도 있었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남편) 얼굴이 바뀐다.’, ‘공부 안 하면 거지 된다.’, ‘이 교실에 앉은 애 중 태반은 남의 들러리로 살 게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잠을 줄여가면서 또 하고 싶은 것도 꾹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는 취업 공부에 진입하게 됩니다. 취업에 성공한 뒤에도 끝이 아니지요. 이제 직장에 들어가 승진 시험 속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행복의 실체 안에서 행복과는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고 말하는 많은 젊은이를 봅니다. 행복은 언제 올까요?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행복은 체험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행복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더 자주, 더 쉽게 행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스펙을 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종잣돈을 모으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적금을 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재테크에 뛰어들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불합리한 일과 고된 노동을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복을 찾기 위해 지금 전혀 노력하지 않고, 또 지금 행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과연 그런 준비를 했다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막연한 미래가 아닌 확실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살펴볼 수 있어야 지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육신이 죽은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대상은 하느님보다 결코 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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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벗>
루카 12,1-7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의 벗>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12,4)
주님 곁에 있으니
주님의 벗
주님과 함께하니
주님의 벗
주님을 따르니
주님의 벗
주님을 닮으니
주님의 벗
주님처럼 사니
주님의 벗
주님처럼 죽으니
주님의 벗
주님과 영원히
주님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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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나는, 귀한 존재>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귀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도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귀하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어찌 제자들 곧 우리가 귀한지 생각해봅니다.
귀하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니 대략 세 가지였습니다.
고귀하다. 그러니까 미천하지 않다. 가치 있다. 그러니까 하찮지 않다. 희귀하다. 그러니까 흔하지 않고 희소가치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참 미천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르듯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지극히 높으신 데 비해 우리는 땅에 살고 미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지요. ‘당신은 누구시오며 벌레만도 못한 저는 누구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느끼게 되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고 고귀하게 여기시며, 그래서 하늘에서 이 땅에까지 내려오셔서 눈높이를 맞추는 사랑을 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당신 신성에 참여케 하십니다.
신적인 사랑을 하면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기를 비하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가 고귀하지 않기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에 고귀한 줄 모르고 비하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고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은 또 우리를 무가치하게,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가치란 값어치의 뜻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무가치란 값어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새는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릴 만큼 값어치가 없지만 사람은 그렇게 값어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값을 매겨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나 참새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께 우리 인간은 흔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이 많아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하고, 그러기에 우리는 흔하거나 도매금으로 팔릴 수 없는 존재로 하느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하시며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 인간아’하고 부르시기도 하지만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시고 부르시며 당신 사랑의 파트너요 벗으로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는, 나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요 대화의 파트너입니다. 그러니 귀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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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 55,23)
오늘 새벽 밤하늘도 북두칠성이 뚜렷이 빛나니 기분이 좋습니다. 제 성소는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이 날마다 강론을 쓰게 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바로 이 말마디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하나가 더 붙는다면 완벽한 하느님의 정의가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중 다음 말씀은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 믿는 모든 이를 주님은 벗이라 합니다. 공관복음을 통틀어 여기서만 제자들을 벗이라 말합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벗이란 말마디가 너무 고맙습니다. 그러니 벗인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벗인 주님과 우정의 여정중 우정이 날로 깊어지면서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말마디인지요! 여기 요셉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상은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예수 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나다”, 바로 주님인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추호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23장 1절,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첫 구절입니다. 일부 말마디를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그러니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목자이자 벗이기도 하니 이런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도 은혜로이 기억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지요.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두려워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증폭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무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가 365회 나옵니다.
주님은 일년내내 하루하루 날마다 우리를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제가 고백상담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 여섯째 숙부께서 임종전 1주일 동안 꼭 붙잡고 지냈던 성구이기도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시편41,10)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언젠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사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도 옛 성현(聖賢)들처럼 늘 신독(愼獨)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감”이란 신독(愼獨)의 뜻이 참 좋습니다. 이어 거침없이 쏟아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최악의 적이 아니라 조만간 맞이할 자연스런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옥에 던지시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키기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옥은 하느님 탓이 아닌 스스로 선택함으로 자초한 재앙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건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敬畏)의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괴물같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말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을 경외할 때, 두려워할 때 비로소 주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성심상 배경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산, 불암산이 흡사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주님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에게 많이 선물했던 책중 하나가 “눈속에서의 삼개월”인데 거기 나오는, “나뭇잎 하나도 하느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한구절이 지금도 생각나는 데 오늘 복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눈속에서의 삼개월”과 더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참 많이 아이들 생일때 선물했던 책입니다.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신망애(信望愛)의 하느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두려워하느냐?” 질책후 예외없이 이어지는 말씀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무지의 어둠도, 무지에 의한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의 찬사를 받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의로움으로 인정받는 믿음을 지닐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해방입니다. 하느님께서 행위와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다윗은 시편(32,1-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런 의로움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도록 도와 주시어 우리 모두 의로운 삶, 두려움 없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이 즉 신망애(信望愛) 하느님을 경외함이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당신 구원, 그 기쁨을 내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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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루카12,7a)
<주어진 사명!>
오늘 복음(루카12,1-7)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누룩은 곧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은 오늘 복음 앞에서 전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잘못된 행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데, 이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의 여정에서 따라오는 힘듦의 상황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세상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찮은 참새조차 잊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소중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겠느냐?'
'당연히 돌보아 주신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 분,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께서 도와주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 '해야 할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의 사명입니다.
'예언직'은 '친교(코이노니아), 곧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왕직'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희생과 봉사'입니다. 이 두 사명을 위해 필요한 것이 곧 '사제직의 사명'입니다. '사제직'은 '성화(聖化), 곧 내가 거룩한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해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에 기쁘게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기쁘게'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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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q9vrqq58e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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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 7)
황금들판의
가능성이
소중한 수확의
결실로
되돌아옵니다.
두려움을 벗고
소중함을
되찾게 하시는
소중함의
주님이십니다.
두려움
속에서는
결코
우리자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소중함과
두려움은
다릅니다.
두려움을
치유하시는
소중함의
주님이십니다.
소중함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기적의
첫걸음입니다.
우리의
소중함을
지켜주시며
소중한 것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소중함은
소중함을
알아보고
소중함을
끌어안습니다.
소중함에서
멋지고 맑은
삶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더 귀하고
소중한 마음에서
구체화됩니다.
소중함이
가장 좋은
가능성입니다.
가능성이
우리 존재의
복음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소중함이 있습니다.
소중함이
자유로움이며
소중함이
우리를 이끌고
지켜주시는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소중함이 있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소중함이
사랑이고
끌어안음이 또한
소중한 관계입니다.
우리 존재를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만나는
오늘입니다.
가장 큰 용기는
두려움을 이기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은
사랑 안에 사는
우리들의
가치입니다.
더 귀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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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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