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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나를 위하여
애어로폰연주/申載星목사님/ 어메이징과 아리랑
2001.12.부산한길교회 초청말씀 申載星목사
내주를 가까이/애어로폰연주/申載星목사님
하나되게 하소서/애어로폰연주/申載星목사님
<외조모(故 조예순 전도사)님의 발자취>
1908. 6.24(음) 고 조필현 씨와 이덕순 씨의 1남 3녀 중 맏이로 출생
1924. 고 맹희백 씨와 결혼
1952. 감리회 충서지방 화성교회에서 신앙생활 시작
1954. 감리회 충서지방 장항교회에서 속장으로 임명받음
1955. 감리회 예산지방 대술교회 목회 시작
1957. 감리회 예산지방 오추리교회
1959. 감리회 충서지방 서부교회 (교회건축)
1961. 감리회 예산지방 예림교회 (교회건축)
1964. 감리회 예산지방 상장교회 (교회건축)
1968. 감리회 서산지방 상옥교회 (교회건축)
1972. 감리회 서산지방 신성교회 (교회증축)
1975. 대한기독교하나님의 교회 합천용주교회 (대지구입)
1976. 감리회 청양지방 구티교회 (교회건축)
1978. 감리회 청양지방 비봉교회
1979. 감리회 강릉지방 남애교회 (대지구입)
1982. 감리회 서산지방 생길포교회
1984. 한국기독교침례회 대구지방회 사랑의교회(대지구입과 교회건축)
1986년 1월24일(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심.
아! 자꾸만 외조모님이 보고 싶고 그립다.
지난 밤에는 아주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설날을 춘절이라 하여 가장 큰 명절로 지키는 중국의 섣달 그믐날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섣달 그믐은 여기저기에서 폭죽터지는 요란한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듯 하며, 밤하늘을 불꽃으로 만들어지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림들이 펼쳐진다. 지난 밤만 해도 몹시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였건만, 추위쯤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폭죽 터트리기로 여념이 없다.
현지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중국인들의 대부분은 한 해의 수입 중에서 십분의 일, 즉 우리가 말하는 십일조를 폭죽 터트리는 일에 투자(?)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저들이 터트리는 폭죽은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불꽃을 만들어 낸다. 여러 해를 사는동안 해마다 새로운 폭죽이 밤하늘을 밝히는 모습을 목격하며 저절로 입술에서 탄성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비용이 한 순간의 불꽃과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웬지 마음 한구석에 씁쓸한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2004년 5월에 고국을 떠났다. 올해로 여덟 번째 설날을 맞이했다. 올해의 설날은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면서 아내와 단 둘이 맞이하게 된 첫 설날이다. 결혼 초부터 외조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설날에는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였었다. 고국을 떠나 생활하면서도 지난 해까지 막내 아들과 함께 살았기에 우리 부부만 지내는 설날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해 여름에 막내 아들이 귀국하면서 결혼한지 32년 만에 처음으로 단 둘만이 맞이하는 설날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였을까? 올 설날은 웬지 자꾸만 쓸쓸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자꾸만 26년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신 외조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외조모님은 나를 무척 사랑하셨고, 내게 많은 기대를 갖고 사셨던 분이셨다. 그런 외조모님이 내 곁을 떠나신지 26년이 지나도록 올해처럼 그분이 그립거나 보고 싶다고 여겨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생뚱맞게 자꾸만 외조모님이 보고싶고 그리웠다.
며칠 전이다. 고국에서 사랑하는 벗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벗이 문득 '이제 준비는 다 끝난 것 같다. 단 우리가 그 날이 언제 임할런지를 모를 뿐이다'이라고 했다. 이 글을 읽게 될 이들 중에 눈치빠른 이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으리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였다.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위한 준비는 이미 끝났고, 그 마지막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다'는 말이었다.
벗은 '그 날이 불과 백년 이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소 느긋하게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아니다. 우리 세대가 끝나기 전일지 모른다'라고 반응했다. 벗과 내 나이 이미 60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라면 불과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문밖에 임한 듯이 여겨지는 세대에 살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 날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과 같은 부정할 수 없는 징조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지구촌 도처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런 때에 외조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내일은 1월24일이다. 1908년 6월24일(음)에 태어나셔서 1986년 1월24일(양)에 소천하신 외조모님의 26주년 기일이다. 외조모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77년의 생애를 사시는 동안 마지막 가시던 날까지도 아주 건강하게 사셨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44세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셔서 33년을 사셨지만, 그중에 30여년을 복음 전도자로 사신 외조모님께서는 가장 평안한 모습으로 갑자기 소천하셨다.
그렇지만 외조모님은 그렇게 갑자기 가실 것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외조모님은 생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직접 맞이하게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사셨기 때문이다. 그런 외조모님의 삶은 하루하루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직 한 영혼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며 사셨다. 누가 듣든지 안 듣든지 상관하지 않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뿐이라 여겨 열심히 사셨다.
외조모님의 이런 생활을 가시던 날까지도 계속되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 소천하시던 날도 아침식사를 마치시고 잠시 누워 쉬었다 일어나서 전도를 위해 나들이를 준비하신 후, 누워 쉬시는 중에 조용히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신 까닭이다. 그런 외조모님이 내 곁을 떠나 소천하신지 벌써 26년이 흘렀건만 그동안 난 한 번도 외조모님이 보고 싶거나 그리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새삼스럽게 자꾸만 외조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외조모님은 원래 유학자 집안에의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외조모님의 부친께서는 '여자는 공부할 필요없다'는 완고하신 생각으로 언문(言文)을 가르치려 하지 않으셨다. 결국 외조모님은 학자의 집안에서 배우지 못한 문맹자로 사셨다. 그런 외조모님이 언문을 깨우쳐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후 교회의 사모님으로부터 '가갸거겨'를 배우면서였다.
예수님을 믿기 전 외조모님의 생애는 파란만장하셨다. 성년이 되어 맹씨 집안에 시집을 가서 자녀를 낳고 금슬좋은 부부로 사셨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 '맹씨 집안의 후대를 끊었다'는 자책감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남편에게 '새장가를 들어 후사를 얻으라'는 말을 남기고 가출했다. 그러나 끝내 외조부님은 재혼하지 않고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하나만을 어렵게 키우며 사시다가 일찍 별세하셨다.
맹씨 가문에서 가출하신 외조모님의 삶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어려운 삶을 살다가 끝내는 재혼하셔야 했다. 그렇지만 외조모님의 재혼이 당신을 행복하게는 하지 못했다. 외조모님은 재혼한 가정에서 아들 형제를 낳았지만, 나라에서 일어난 변란인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두 잃어 버리는 불행을 당해야 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출산한 자녀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은 연약한 여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외조모님은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남겨진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을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20세도 안된 어린 딸을 시집보내고 혈혈단신 당신 혼자만의 삶을 살았다. 이때부터 외조모님의 마음은 단단하게 굳을 대로 굳어져 소망없이 죽지 못해 사는 처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외조모님께 생명의 빛이 비취기 시작했다.
외조모님께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3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바로 밑에 남동생, 그리고 그 밑으로 나란히 여동생이었다. 외조모님의 형제들 중에 큰 여동생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믿으며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한 동생은 언니를 전도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렇지만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질대로 굳어진 외조모님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도무지 동생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외조모님의 남동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징용에 끌려갔다. 그는 징용살이를 하는 동안 나라가 해방되었다. 그는 곧 바로 귀국하지 않고 해방된 후에도 몇 년을 일본에 더 머물러 있는동안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후에 귀국한 후에 큰 여동생이 당신처럼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며 남매가 함께 외조모님을 전도하기 위해 힘썼다. 그래도 외조모님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복음을 받아드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외조모님을 구원하기로 택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외조모님의 마음에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감동을 주셨다. 이에 외조모님은 동생들에게 '딱 한 번!'을 전제조건으로 교회에 가 주기(?)로 했다. 당시 마침 동생이 출석하던 교회에 유명한 부흥강사였던 고 양춘식 목사님의 부흥회가 열렸다. 동생들은 외조모님을 부흥회로 안내했다. '딱 한 번!'이라는 전제조건으로 동생들을 따라 참석했던 부흥회는 하나님께서 외조모님을 찾으신 날이었다.
외조모님은 처음으로 교회를 가던 날부터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되어 일생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딱 한 번!'이 아니라 그 이후로 일생동안 교회에 출석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동생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외조모님은 삶의 거처를 처음 예수님을 믿도록 말씀을 증거하신 양 목사님이 계시는 곳으로 옮겼다. 가족이라고는 출가시킨 딸 외에는 아무도 없는 혈혈단신이었기에 거처를 옮기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외조모님은 양춘식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1년 후에는 속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채 못되던 어느날 양 목사님은 외조모님께 '어느 시골교회에 피난민 청년이 혼자 전도사로 일하는데 그를 어머니처럼 밥도 해주며 돕지 않겠는가?'라고 물으셨다. 그 때 외조모님은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목사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시골교회를 찾아갔다.
외조모님이 찾아간 곳은 20대의 젊은 청년이 혼자 기거하며 나이든 몇 분의 노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가난한 교회였다. 그런데 외조모님이 그곳에 당도하신지 며칠도 되지 않아 전도사가 사라졌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한 밤중에 슬그머니 교회를 떠나고 만 것이었다. 급하게 양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이미 목사님은 자세한 내용을 이미 알고 계셨다. 외조모님만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목사님은 외조모님께 '교회에 파송할 전도사가 아무도 없다'면서 '속장님이 그 교회를 맡아 보세요'라고 하셨다. 황당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외조모님은 목사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목사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신이 거부하면 비록 노인들이지만 몇 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교회를 문닫아야 한다는 사실이 외조모님으로 하여금 목사님의 제안을 거부할수만은 없었다.
당장 당황스럽고 염려가 되었다. 신학을 배우거나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바 없으며, 게다가 신앙생활을 시작한지도 이게 겨우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외조모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쩌랴. 할 수 없이 목사님께 인사드리고 머무시던 교회로 돌아왔다. 교회에 돌아와서 외조모님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 뿐이라는 생각으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학문이 전혀 없으니 기도인들 체계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되든 안되든 생각할 겨를 없이 생각되고 입에서 말이 나오는 대로의 기도였지만 중심의 간절함만은 아주 처절할 정도로 진실된 기도였다.
첫 번째 주일날, 예배시간에 되어 교회에 나온 교인들과 어떻게 예배드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작한 교회는 하나둘 새로 믿는 사람들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채 못되어 이제는 전도사를 모실 수 있을 정도의 교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외조모님은 상회에 시무 전도사 파송을 요청하고 당신은 그 교회를 떠나 전도자를 모실 수 없는 또 다른 가난한 교회로 옮겼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목회를 위해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체계적인 성경공부도 전무한 외조모님이셨다. 40대 중반에 겨우 문맹을 벗어난 외소하기만 한 중년의 홀로된 과부였다. 그런 외조모님을 통해 교회는 기적을 일으켰다. 교회가 없는 동네에 교회가 세워지고, 목회자를 모실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교회가 교세가 확장되어 작은 예배당을 짓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분명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교회의 형편이 한 목회자가 편안하게 목회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미련없이 교회를 다른 젊고 유능한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떠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시작한 외조모님의 목회는 소천하시기까지 13개처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시거나 미자립교회를 자립교회로 성장시키셨다. 그 중에 다섯은 순수한 개척하여 후임 목회자를 모실 수 있는 교회로 성장시키셨고, 또 다섯 교회는 미자립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예배당을 지을 땅을 구입하거나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도 여덟 개 처나 되었다.
외조모님께서 섬기신 13개 교회 중에는 나와 함께 하신 교회도 3개 처가 된다. 그 중에 하나는 외조모님이 개척하여 섬기시는 교회를 내가 협동하면서 대지를 구입하였고, 다른 두 곳은 내가 개척하여 섬기는 교회를 외조모님께서 협동하여 한 곳은 대지를 구입하고, 다른 한 곳은 대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까지 이룬 바 있으며, 이 교회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셨다.
이제 내일은 외조모님이 내 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신지 꼭 26년이 되는 날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령충만의 감당하기 어려운 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라고 서원한 후, 성장하면서 외조모님의 목회현장을 목격하고 한 때 심한 갈등에 휩싸여 어렸을 때의 서원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끝내는 서원의 길을 저 버릴 수 없었다. 외조모님께서 끝까지 배후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젊은 시절, 나는 외조모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배움의 학문이 전무한 분이시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외조모님의 고결한 삶은 내게 귀감이었다. 따라서 마음 깊이 닮고 싶은 모습이 바로 외조모님이었다. 한 영혼을 향한 뜨겁고 간절한 사랑과 날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대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결된 삶이 나로 하여금 고개숙여 존경하며 닮고 싶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나는 외조모님의 이런 삶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내게서는 한 영혼에 대한 뜨겁고 간절한 사랑은 서서히 냉각되고 말았다. 생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확신한 채 사셨던 하루를 허비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사셨던 외조모님의 삶을 잊은 채 너무 태만한 나날을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비로소 최근에서야 다시 깨달아지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아려오는지....
난 그동안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전부라 할 수 있을까? 난 그동안 물질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언제나 물질에 초연한 가난함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녕 옳은 삶이었을까? 그런 삶의 태도로 인해 내게 주어진 가족들이 힘들고 어려워했던 지난날의 삶들이 정말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항상 육체적인 욕망의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며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삶이었다는 긍지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정결한 삶의 전부라 할 수 있을까?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결한 삶을 지켰다고는 하나, 그것이 마음속의 정결함까지 지켰노라고 장당할 수 있는 것일까?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기대하시거나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속량하여 구원하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 하나의 구원으로 자족하며, 나 하나의 성별된 삶을 위한 노력을 최선이라 여겨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진정 그런 것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하여 스스로 만족한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그럴까? 과연 그 뿐일까?
외조모님의 참 숭고한 삶을 사셨다. 비록 그녀가 남긴 유산이라곤 전무한 빈손 뿐이셨지만, 내게 진정한 유산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삶을 사셨다. 갈기갈기 찢겨진 지난 날의 상처들을 스스로 어루만지며 복음을 저하는 열정 하나만으로 아낌없는 생애를 사셨던 외조모님은 내게 큰 유산을 남기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나는 미처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렇듯 초라한 초로의 황혼길을 걷는 길손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다.
아! 외조모님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던 나의 현주소가 지금 이렇듯 초라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외조모님으로 인해 목회자의 서원을 자진 반납하려했던 반란을 잠재우고, 이제는 일생을 바쳐 외조모님처럼 살겠다고 다짐했던 지난 날의 돌이킴을 어디에서 잃어 버렸더란 말인가? 비록 외조모님의 외형은 단신의 작은 체구였지만 전도자의 삶을 당당하게 사셨던 그 의연함의 상속으로 만족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언제 이루어질런지, 어쩜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다시 무장되고 싶다. 그런데 이런 마음들이 내 마음에 견고하게 뿌리내려 내 삶을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마음의 생각일 뿐, 아직도 이러저러한 핑계로 일관하며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다. 환경과 여건만을 탓하고 있다. 극복해야 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머뭇거리고 있다.
그렇다. 이런 모습이 바로 불성실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모습이 스스로 처량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을 어찌 변명할 수 있으랴. 아! 그래서 외조모님이 자꾸만 그리워지나 보다. 아! 그래서 자꾸만 외조모님이 보고 싶어지나 보다. 외조모님으로부터 한 마디 책망의 말씀이 듣고 싶어지나 보다.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치며 가장 가까웠던 외조모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면서, 내 어찌 거룩하신 영원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랴.
"오 주여! 종을 이제 긍휼히 여기소서.
오 주여! 이제 종의 연약함을 붙드사 도와주소서....."
<역대하 36:1~10>
"올바른 선택을 위해 더욱 신중하게 하소서."
http://m.cafe.daum.net/MyLoveBible/jN3R/66?svc=cafeapp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이 되고 만 요시야가 오지랖이 넓어 유다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쟁에 끼어들면서 유다는 빠르게 쇠락(衰落)하고 말았다. 따라서 유다는 불과 십여 년 만에 세 명의 왕이 외세(外势)의해 강제로 바뀌게 되었고, 잠시잠간동안 유다의 왕위에 올랐던 그들이 애굽과 바벨론으로 각각 포로되어 붙잡혀 가게 되는 참담한 일들을 반복하여 겪어야 했다.
2018년 [오전 6:44] [
<행 16:19~40>
"마귀의 어떤 훼방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http://m.cafe.daum.net/MyLoveBible/eSad/47?svc=cafeapp
바울과 실라는 갑자기 심한 매를 맞고, 발에 차꼬가 채워진채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봉변을 당한 것은 마귀짓이었다. 마귀가 바울로 하여금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훼방하기 위해 꾸민 짓이었다. 바울과 실라도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참담한 봉변에도 당황하지 않고 매우 침착했다. 발에 차꼬가 채워진 채 깊은 감옥에 갇혔지만, 한 밤중에ㅡ 옥중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와 찬송을....
http://m.cafe.daum.net/MyLoveBible/eSad/47?svc=cafeapp
본문/ 시137: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제목/ 교회여! 저항하라!
오늘을 나눌 말씀의 제목을 ‘교회여! 저항(抵抗)하라!’로 정했다. ‘저항’이란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拒逆)하거나 버팀’이다. 또한 ‘거역’이란 ‘힘 있는 자의 뜻이나 지시 따위를 따르지 않고 거스름’이다. 본래는 ‘교회여! 보복(報復)하라!’고 했었다. ‘보복’이란 ‘해(害)를 입힌 자에게 원한(怨恨)을 풀기 위하여 해(害)를 주는 행위(行爲)’인바, 이것이 본문에서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을 문자적(文字的)으로 가장 적절(適切)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강(强)한 적대감(敵對感)이 드러내는 낱말이기에, 이를 완곡(婉曲)하게 하여 ‘저항’으로 바꾼 것이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8절 한 절로 했지만, 137편 전체를 함께 상고(詳考)해야 한다. 137편의 시편은 표제도, 시를 쓴 사람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江邊) 거기에 앉아서’라는 말로 시작(始作)한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자손들의 분단되어 다윗의 후손들에 의해 왕국으로 유지되던 유대 왕국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滅亡)하여, 바벨론의 포로(捕虜)로 붙잡혀 유대 땅에서 바벨론의 여러 지방(地方)으로 끌려가 흩어진 곳에서 살며 쓴 시로 여겨진다. 그래서 시인은 ‘시온을 기억(記憶)하며 울었다’고 하여, 하나님의 선민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그리워하며, 향수(鄕愁)에 젖어 슬퍼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윗 왕이 다스리던 때는 열방(列邦)을 호령(號令)했다. 따라서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은 주변(周邊)의 열와(列王)들을 제압(制壓)하여, 다윗은 마치 제국(帝國)의 황제와 같았다. 그러나 다윗 왕의 후계자(後繼者) 솔로몬이 왕이 된 후기부터, 이스라엘 왕국은 이방인의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범죄(犯罪)하기 시작했고, 다윗의 손자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南北)로 분단(分斷)되어 두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이스라엘 자손의 왕국은 다윗의 시절에 누렸던 영화(榮華)는 다시 있지 않았고, 북왕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왕조 유다왕국은 바벨론에 각각 멸망(滅亡)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다.
바로 그 시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인의 여러 땅에 흩어져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고, 때때로 가까운 강변에 모여 강가에 우거져 자라는 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竪琴)을 걸었다’며 자신들의 포로생활로 인한 가련한 신세(身世)를 한탄(恨歎)하며 살았다. ‘수금’은 히브리 최고(最高)의 현악기(絃樂器)로 음색(音色)이 밝아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기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나, 하나님을 찬미(讚美)할 때에 주로 연주(演奏)하는 악기였으나, 그들은 더 이상 수금을 연주할 필요(必要)가 없어, 그것을 강가에 우거져 자라는 나무의 가지에 걸어두어 방치(放置)했던 것이다.
시인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수금을 버리듯이 방치하게 된 이유를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請)하며, 우리를 황폐(荒廢)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는 이방인의 지배자(支配者)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얕잡아 보아 조소(嘲笑)하거나 빈정거리며, 자기들의 가증(可憎)스러운 우상숭배의 향연(饗宴)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러 거기서 수금을 연주하고, 노래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어리석고 무례(無禮)한 강요(强要)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악기인 수금을 습도가 높은 강가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가지에 걸어놓아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현악기는 습도가 높은 곳에 방치하면, 그것은 악기를 망가지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금을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연주하느니, 차라리 수금이 망가져 사용할 수 없게 되길 바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자손들로서는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서 수금을 연주한다는 것은 가장 치욕적(恥辱的)인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강압(强壓)에 의해 치욕적인 행위에 수금을 연주하도록 강요(强要)받는 것은, 그들 개인적(個人的)으로도 모욕을 당하는 일로, 그들의 자부심과 긍지인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명예(名譽)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의 요구에 순응할 수 없었다. 차라리 더 심한 압제를 당하게 될지라도 저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 수금을 높은 습도에 방치시켜 사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 높은 저항의 수단이었다. 결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연한 결단이 바로 수금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것은 이방인들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시인은 갈등(葛藤)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라며 번뇌(煩惱)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부르는 ‘여호와의 노래’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부르던 거룩한 노래였다. 그런 노래를 세속적인 지배자들의 우상숭배가 벌어지는 가증한 자리에서 부르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지배자들의 요구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권까지 철저하게 무시하는 광란의 폭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응(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인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라 탄식했다. 계속하여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며, 강력(强力)한 거부 의사(拒否意思)를 밝힘으로 저항했다. 이는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위험(危險)한 결정(決定)이었다. 그럴지라도 그는 모든 것을 각오(覺悟)한 의지적(意誌的)인 결단(決斷)을 내려야 했다. 차라리 목숨을 내어 놓을지언정 이방인들 앞에서, 특히 우상숭배가 벌어지고 있는 가증한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악기인 수금을 연주하며 노래할 수는 없었다.
최근에 한국교회는 아주 비참한 모욕을 당했다. 현 정부의 몰염치한 정책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벌써 몇 달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대 재앙이다. 이것을 현 정부는 은근하게 교회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한 음흉하고, 아주 교활한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교회가 마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확산시키는 온상이라도 되는 듯이 몰아가고 있다. 이를 위해 전면에 나선 사람이 정세균 국무총리다. 그는 알려진 바로는 모 교회의 안수집사라고 한다. 안수집사라면 교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교회박해를 위한 지시문을 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재갈을 먹이거나 족쇄를 채우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300만 원의 벌금을 징수한다는 협박을 곁드린 내용이었다. 어떤 지방정부에서는 교회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앱을 만들어 신고자에게는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단다. 기가 막힐 일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잘못된 정책을 펼치는 정부에 저항해야 한다. 무조건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침묵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온갖 악법들이 양산될 위험에 처해 있다. 자칫하면 지금 선진국이라 여겼던 구미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제 일상적으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기독신앙의 역차별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초읽기에 돌입한 상황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도 안일과 무사주의에 빠져, 지금 한국교회가 대한민국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무관심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듯이 여기는 들이 더 많다. 한국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현정국의 잘못된 정책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무리들도 적지 않아, 교회를 분란시키고 있다. 이런 일들이 어찌 거룩한 성도들의 태도라 할 수 있을까? 무조건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정권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든, 마치 무관심한 듯한 태도로 일관하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수용해야 한다는 무기력한 생각으로 대처하는 것이 과연 복음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일어나야 한다. 이제 깨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곳의 세력자들이 수금연주를 요청할 때, 그들이 힘이 없어 힘으로는 거부하지 못할지라도, 수금을 습도가 높은 곳에 방치하여 쓸모없게 하는 행동으로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여’라 부르짖으며,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記憶)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라고 기도(祈禱)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 15일에 이루었던 대한반도의 광복이, 3.8선 이북의 북한이 해방 70여년 동안에 어떻게 파멸되어 오늘에 이르기게 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가 무조건 북한의 괴뢰정권에게 굴종적인 저자세를 보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 맹복적인 평화를 외치기 말고, 현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이제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올바른 복음의 시각으로 저항해야 한다. 북한이 지난 70여 년동안 어떻게 파멸되어 왔는지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들에게 맹종하는 거짓된 평화놀음으로부터 정신을 차려 저항하여, 복음으로 통일되는 새로운 전략을 세워가는 일에 한국교회의 진정한 지략이 하나로 집약될 수 있도록 해야 하다.
이제 시인은 ‘멸망할 딸 바벨론아’라고 부르며,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선포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성도들로 하나된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은밀하게 압박하여 괴롭히는 잘못된 정치적인 세력들을 분리하실 것을 믿는다. 이는 한국교회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지 않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 교회를 은근하게 탄압(歎壓)하는 정치적 집단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의 정치생명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게 될 것을 그들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나라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이 담겨진 애국가의 나라다. 대한민국 국회가 처음으로 개원되던 날, 기도로 시작하여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기도로 세워진 나라다. 수 많은 성도들의 기도로 세워진 나라. 그들의 기도가 대한민국에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세계 최 빈국에서 불과 60년 만에 세계 10위 권의 부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런 우리나라가 잠시동안 20위 권으로 곤두박질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지지만, 아직 우리는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닯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시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을 믿는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권력의 시녀로 스스로 비하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는 과감히 맞서 저항해야 한다. 무조건 권력의 사주에 순응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는 정세균 총리의 무뇌적인 행정명령으로 곤혹을 치른 바 있다. 총리의 지시를 받은 ‘중앙사고대책본부’는 지난 7월 10일 18시부터 전국교회를 대상으로 소모임, 행사 금지 등을 의무화하는 ‘핵심 방역수칙 의무화 행정명령’ 곧 ‘집합제한’ 조치를 발령했었다. 이 일로 한국교회는 발칵 뒤집혔다. 터무니 없는 왜곡된 정보로 교회를 억압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비로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친 행정명령이 발령된지 만 2주 만인 지난 7월 24일인 금요일 18시부로 해제했다. 한국교회의 조용한 저항이 정부가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 있었던 교회들만을 대상으로 발령된 교활한 교회억압 정책은 교회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간보기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의 불량한 정책 입안자들은 한국교회에 재갈을 먹이기 이한 탄압정책을 아주 교묘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시도할 것은 아주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 더욱 깨어 있어 과감하게 맞서 저항해야 한다. 이번에 정세균 총리의 추악하고 비겁한 행정명령은 불과 두 주간만에 철회했지만, 점점 한국교회에 족새를 채우기 위해 불량한 정책 입안자들은 더욱 철저하게 준비하여, 호시탐탐 한국교회를 박해하기 위한 악법들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될 것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라. 제도권에 무조건 저항하기 위해 어떤 세력을 형성하거나, 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력으로 저항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1919년 3월 1일 일제의 강압에 맞서 저항했던 당시의 우리 선열들의 정신으로 저항하자는 것이다. 당시의 주도적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불의에 저항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된 우리가 먼저 앞장서야 할 일임을 깨달아야 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했던 수금을, 우상숭배하는 일에 사용하느니 차라리 습도가 높은 강가 우거진 나무에 수금을 걸어놓아, 악기를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망가지는 희생을 감수했듯이, 한국교회도 세속의 힘 있는 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요청되는 일일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 놓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일이다.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땅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우리의 목숨이랴. 그러므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의한 어떤 정책에도 우리는 과감하게 맞서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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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7월 26일 (주일) 오후 2:30
* 북한산성교회 등산인과 함께 하는 오후 예배에서
* 불꽃 申载星 목사
2020년 07월 27일 (월) / 시141:1~10 / 어떤 비난에도 마음이 요동치 않게 하소서
본문의 표제(標題)는 ‘다윗의 시(詩)’다. 또한 이는 다윗의 기도(祈禱)다. 다윗은 ‘여호와여’라며, 다급(多急)하게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速)히 내게 오시옵소서’라 기도했다. 당시(當時)에 그는 하나님의 신속(迅速)한 구원(救援)이 절실(切實)한 상황(狀況)에 직면(直面)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音聲)에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탄원(歎願)하여, 당면(當面)된 위험(危險)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焚香)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祭祀) 같이 되게 하소서’라 했다. ‘분향’이란 ‘하나님을 예배(禮拜)할 때, 향로(香爐)에 불을 붙인 향(香)을 넣고 향기(香氣)로운 연기(煙氣)를 피우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穩全)한 헌신(獻身)을 상징(象徵)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매우 중요(重要)한 의식(儀式)이다. 또 ‘나의 손 드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權威)에 순응(順應)하여 투항(投降)하는 행위를 상징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자신의 행위를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기를 구(求)한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매우 중요(重要)한 관례적(慣例的)인 예배가 하루에 두 번씩, 매일(每日) 반복(反服)했다. 이는 모세가 그들에게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며,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라’고 가르친 것이었다(출29:38~39), 따라서 당시는 하나님께 예배할 때는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 번제(燔祭)로 드렸고, 그것은 제사장들이 대행(代行)해야 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번제를 드리는 동안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막(聖幕) 안뜰에 엎드려 기도해야 했다. 이런 그들의 아침제사는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依賴)하는 것이었고, 저녁제사는 하루의 삶을 반성(反省)하여 회개(悔改)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勸勉)했다(살전5:17). 그러므로 이런 기도는 오늘의 성도들이 본(本) 받아야 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표상(表象)이다.
다윗은 ‘여호와여’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내 입에 파수(把守)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門)을 지키소서’라고 호소했다. ‘입’은 ‘몸의 입술에서 후두(喉頭)까지의 부분’을 말하며, 이것은 ‘음식(飮食)이나 먹이를 섭취(攝取)하며, 소리를 내는 기관(機關)’이다. 그리고 ‘입술’은 ‘소리를 발음(發音)하는데 아주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하는 지체(支體)’다. 또 ‘파수꾼’은 ‘경계(警戒)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하며, ‘문’은 ‘출입(出入)을 통제(統制)하기 위해 설치(設置)된 시설(施設)’이다. 결국 다윗은 사람이 가장 실수(失手)하기 쉬운 것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께 자기가 조심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말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통제해 주실 것을 간구한 기도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 죄를 범한다. 인류의 조상도 뱀의 거짓말에 속아 범죄하게 된 것도, 뱀의 거짓말에 반응(反應)하여 말로 응대(應對)한 것 때문이었다(창3:1~6). 이런 말은 보통 사람이 자기 마음의 생각을 소리로 표현(表現)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기를 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면 하와와 같이 스스로 죄의 올무에 걸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입과 입술을 제어(制御)해 주실 것을 부르짖어 호소한 것이다. 이런 다윗의 사려(思慮) 깊은 기도의 태도(態度)를 우리는 본 받아야 한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軟弱)한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 마음이 악(惡)한 일에 기울어 죄악(罪惡)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먹지 말게 하소서’라고 호소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선동(煽動)에 취약(脆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엉뚱하게 충동(衝動)되어 잘못된 일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매사(每事)에 더욱 신중(愼重)하게 처신(處身)하기 위해 노력(勞力)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세속(世俗)된 이들과 쉽게 어울려 그들의 선동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防禦)할 수 있는 도움을 하나님께 호소했던 것이다.
사람들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을 지적(指適)하여 판단(判斷)을 당하거나, 어떤 비판(批判)이나 책망(責望)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의인(義人)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恩惠)로 여기며, 책망(責望)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拒絶)하지 아니할지라’고 고백했다. 다윗이 호인(好人)이어서였을까? 그래서 그는 자존심(自尊心)도 배알도 없어서였을까? 하지만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그는 겸손(謙遜)하게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智慧)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자신을 지적하여 판단하거나, 그것으로 비판과 책망을 받으면, 그것을 자기 반성(自己反省)의 기회(機會)로 삼을줄 알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마음의 상처(傷處)가 되지 않고, 자기 발전의 동력(動力)이 되어 ‘그들의 재난(災難) 중에도 내가 항상(恒常) 기도하리로다’라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윗은 계속하여 ‘그들의 재판관(裁判官)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져졌도다’라고 했다. 다윗은 누군가에 의해 자기가 어떤 비판이나 책망, 심지어 비난을 받기에 이른다고 할찌라도, 그것을 구차(苟且)하게 변명(辨明)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수용(受容)하여, 언젠가 상대방(相對方)이 자기에 대한 오해(誤解)와 편견(偏見)이 해소(解消)될 것에 대한 기대심(期待心)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는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라는 자신감(自信感)을 감추지 않았다. 따라서 다윗은 오히려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 같이 우리의 해골이 스올 입구에 흩어졌도다’라는 말로 상대방을 동정(同情)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어떤 비난에도 마음이 요동(搖動)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 그래서 그는 본시에서 다시 한번 ‘주 여호와여’라며, 하나님께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靈魂)을 빈궁(貧窮)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또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陷穽)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라 부르짖으며,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穩全)히 면(免)하게 하소서’라며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기도를 했다.
[기도]
주님. 어떤 비난에도 마음이 요동치 않게 하옵소서. 어떤 일을 당해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글/ 불꽃 申载星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