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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훈울산지회장님의 가족사입니다"
이글은 울산지부방에 올린 글을 옮긴 글 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님께서는 5남매를 모두 잊어버리시고(홍역등으로 모두 사망) 일본으로 향합니다,
나고야에서 다시 6남매를 낳아(총 11명을 얻었으나) 해방이 되면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되지요,
고모님 세분과 큰아버지,아버님,삼촌 이렇게 3남 3여를 데리고 그립고 그립던 고향을 찾지만
막상 손에 가진게 없으니 처갓집 동네로 찾아서 안착을 합니다.
위로 고모님 세분을 출가 시키나 제일 큰 고모부를 제외한 두 분 고모부님은
너무도 가난한 시절이라 좌익에 빠지고 말았으며 결국 총살을 당하고 맙니다.
가운데 고모님은 아직도 피붙이 하나 없이 부산에서,그리고 막내고모님은 딸을 두었지만 재가를하시고
아들을 얻었지만 교통사고로 먼저가고 그의 아들이 지금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 방패맞이로 나가있죠.
지난해 안양 농민자 대회 참가자에게 쇠파이프에 맞아 18주의 진료를 받고 다시 쇠고기 집회 막으러...
아버님 위에 큰 아버님이 계셨는데 19세되던해 6.25참전에 동원되어 어느고지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자식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던 할아버님은 술로 세월을 보내시다 (사위의 주검과,자식의 주검앞에 속수 무책이었지요)
아버님이 17세 되던 해에 장가를 보내지요,현재 73세로 지금 부산의 고당봉 어르신과 연세가 비슷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듬,이듬해(아버님19세) 저가 장남으로 태어 나게 되었고(아버님과 저는 18세차이)
다시 남동생 하나가 태어나는 것을 보시고는 영영 눈을 감으셨답니다.이후 아버님도 7남매를 두셨으나
사내 하나를 부주의로 잃게 되지요.
큰아버지가 결혼을 하지않아 제사도 없고 저가 양자를 가지 않아도 되었으나 문제는 그분의 흔적입니다.
사망 소식도 몇 개월 뒤에 알았으며 그 흔한 국립묘지의 비석에 이름 석자도 남겨지지 않았죠.
그래서 매년 현충일이면 지방의 작은 충혼탑에서 향불 피우고 묵념 한 번하고는 잊어 버린답니다.
그 누구보다 슬픈 현충일이지요(물론 부모님보다야 덜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삼촌이 월남전 파병 1차에 차출되어 훈련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아버님은 황소 한 마리를 팔아
강원도 철원으로 달려갔지요,큰아버지와 같은 꼴을 볼 수가 없으셨던 거지요.
결과는 파병은 되지않으셨고 동기중 1명만 살아서 돌아왔다네요.
참고래님 형님! 전화 주셨지요? 고맙습니다. (전화받고 큰놈에게 전화해서 제가 작성한 글을 내리라고 하였죠)
나름대로 아픔이란게 현충일을 현충일답게 보내지 못하는 것 이었답니다.
시골 찾은김에 부모님 농사일 좀 거들어 드리고요,조금전 저녁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도 보리 농사를 짓는데 수확기에 비가 잦아 애를 먹고 있길래 발걸음이 무거워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울산방을 지켜주신, 그리고 이웃에서 챙겨주시고 다녀가신 모든회원님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항상 행복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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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성훈님의 가족사 슬프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