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사회
필자 한병철은 고려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 후 독일로 건너가 철학, 문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교수로 강의 중이다. 피로 사회, 투명 사회는 독일어로 발표하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김태환이 번역한 글이다. 철학 서적으로 128쪽의 문고형 책으로 내용이 어렵지만 쪽수가 적어 빨리 읽고 요약한다.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이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다. 냉전 역시 이러한 도식을 따른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냉전의 어휘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장치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사회는 면역학적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구도로 빠져들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특징으로 한다. 면역의 근본 특징의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편에서 타자를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은 부정성에서뿐만 아니라 긍정성에서도 나올 수 있다. 이질적인 것, 낯선 것뿐만 아니라 같은 것도 폭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그것 탓에 죽는다.” ‘보드리야르’의 글이다. 보드리야르가 구성한 적의 계보학에 따르면 최초 단계의 적은 늑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늑대는 외부의 적으로서 사람은 이런 적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짓고 성벽을 쌓는다. 다음 단계의 적은 쥐의 형태를 취한다. 이 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위생학적 수단으로 퇴치할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적은 해충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바이러스 적 형태의 적이 출현한다. “네 번째 단계는 바이러스이다. 바이러스는 사실상 사차원에서 활동한다. 적대성은 바이러스 적 형태를 띠는 경우에조차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그러나 적대성 계보학은 폭력의 계보학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 눈에 덜 띈다. 긍정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 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는 여전히 노오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란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돌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 구도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 부담의 증가도 시간과 주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인간만이 갖는 능력은 아니다.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인간 삶만 아니라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탈 서사화되었으며 Entnarrativisierung(근대에 이르러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이야기가 붕괴하였다는 의미)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탈 서사화는 삶을 벌거숭이로 만든다. 벌거벗은 생명에 적확히 조응하는 활동이다.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들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 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며 가해자라는 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제성 성격장애, 소진 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무젤만‘은 탈진하여 완전히 무력해진 수감자들로서, 극심한 우울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무감각 상태에 빠져 육체적인 추위와 감독관의 명령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의 과업을 거론했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를 니체는 고상한 문화라 했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신력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분노는 짜증과 구별된다. 분노는 어떤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니체의 아니오라 말할 힘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하는 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인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 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空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의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 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라, 필자는 주장한다.
2024.08.17.
피로 사회
한병철 독일어로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