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기 / 류돈규
이번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은 요즈음 많은 여행객들이 선호하는 편안한 관광여행이 아니라 주요지역에 있는 관광 명소들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에서 접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알뜰, 실속 있는 여행을 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계획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여행은 우리나라에게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지고 있는 나라, 과거 냉전 시에는 무시무시한 공산주의 원조격인 소련의 종주국으로 6.25 동란 시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 적화통일을 적극 지원하였던 적대관계의 소련에서 벗어나, 지금은 우리와도 외교관계도 맺고 있는 러시아 지역을 약 한 달간 여행하는 것이어서 여러 가지 면에서 걱정 반, 흥분 반의 심정으로 감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외교관계가 있다하더라도 믿을만한 우방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놓고 적국이라고도 말 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관계의 나라를 별 탈 없이 여행하였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할 경우에는 대부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인 “모스크바”까지 가는 코스를 택하게 된다. 그 이유는 “블라디보스톡”이 지리적으로도 가깝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곳의 인근지역인 연해주 지역이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 고향의 생활터전을 잃고 만주와 간도지역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주해 간 일부 조선인 선조들의 애환이 뒤섞인 지역엘 가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정은 과거 소련의 무자비했던 공산주의 독재자 “스탈린” 시절, 연해주 지역의 우리 고려인 이주자들이 고생 끝에 일군 생활터전을 또다시 빼앗기고 “시베리아”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동토의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멀리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황량한 불모지에 내버려 지다시피 한 슬픈 여정을 되돌아보게 하는듯한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어린 여행코스의 경우에는 제정 러시아의 시절의 역사유물의 집중보고인 “모스크바”에 막상 다달으면 지나친 피로감에 기력이 소진되어 관광명소들을 제대로 살펴볼 기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사진 1 : 시베리아 횡단열차 노선도> <사진 2 : 모스크바 향 러시아 열차 모습 >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번 여행에 동행한 친구와 나는 먼저 지금의 거대한 영토를 개척한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쌍트. 페테르부르크”를 먼저 찾아가 그곳의 명소들을 살펴본 후 중세시절 대영제국, 프랑스 등의 서구 유럽 열강들과의 경쟁이 없던 미개척 무풍지대였던 “우랄산맥” 동쪽의 거대한 “시베리아”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러시아 선각자들과 장군들의 개척 건의를 받아들여, 영토 확장 정책을 과감히 추진할 것을 명한 제정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3세 황제”의 결단과 장군들의 협력으로 지금의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이 지역의 효율적 지배기반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후, 사할린은 물론 캄차카 반도를 지나 알라스카까지 진출하였던 중세 제정러시아 지도계층의 거대한 영토확장의 현장을 살펴보기로 했다.
동행한 친구와 나는 먼저 쌍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 카자흐스탄의 저가항공기를 타고 수도인 알마타에 도착하여 환승대기실에서 3시간 대기후 역시 카자흐스탄 소속 환승여객기로 갈아탔다. 조그만 공항대기실에는 삼성과 LG의 대형 TV 광고판이 우리를 반기는 듯 해 기뻤고 또한 매점에는 우리나라의 라면도 팔고 있었다. 대합실에서 대기 중 고려인 2세 아가씨와 러시아인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고려인 아가씨는 우리말을 약간 하는 편이었고 러시아 아가씨 (이름 : 올렛샤)는 자기 사촌 여동생이 한국어를 배운다며 친근감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쌍트.페테르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수하물을 찾던 중 바로 그 러시아 아가씨를 만나게 되어 그녀에게 우리 숙소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물으니 자기 집도 바로 그 근처라며 자기만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출구로 나오니 많은 여행사의 가이드들이 깃발을 들고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많은 택시기사들도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공항철도를 타면 되기까 그냥 계속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중간에 한번 환승을 한 후 어느 역에서 내리며 역시 따라가니 바로 우리 숙소 앞이었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 입국 첫날의 어려운 난관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숙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에 다음날 식사대접이나 하려고 전하번호를 받아 숙소 여직원에게 전화를 부탁하니 아이들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쌍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박4일의 체류기간 중에는 세계3대 박물관중 하나라는 에르미따쥬 박물관을 비롯한 각종 무기전시관, 러시아 정교회당 등 여러 곳을 지하철을 타고 여행안내서의 주소지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매일 20,000보 이상을 걷는 강행군을 하게 되었다. 쌍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Paris라고 불리울 만큼 고풍스런 중세풍의 계획도시로 도시미관은 소문 그대로 Paris의 거리, 건물미관들과 견줄만한 모습이었고 거리를 거니는 젊은 여성들은 모두들 훤칠한 키에 금발머리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녀들의 걷는 모습은 마치 여군들이 시가행진 하듯 똑바로 걷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우리나라 현대 쏘나타, 기아 자동차 등 우리나라 자동차들이 독일의 벤츠, 일본의 니싼 자동차들과 마찬가지로 많이 다니고 있어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첫날 에르미따쥬 박물관을 찾아 가는 도중에는 노상에서 60대 후반의 러시아 여성에게 방향을 문의하니 지하철을 한 번 더 타야한다며 자신들도 그쪽 방향으로 간다기에 지하철 토큰을 사려고 하니 자기 카드로 찍으면 된다며 그냥 타라고 하여 지하철을 공짜로 타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이태리 여고생 수학여행단의 가이드로 인솔 교사와 함께 명소 안내 중이었다.
< 사진 3 : 쌍트. 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사진 4 : 이태리 여고생 수학 여행단들과 함께>
이틀째 날에는 여름궁전과 파베르제 박물관을 구경한 후 간이식당에서 점심을 한 후 파베르제 박물관을 찾아 가기 위해 옆 좌석의 손님에게 물으니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금 다른쪽 여자 손님에게 물으니 스마트 폰으로 검색하더니 방향을 알려주어 찾아 가니 간판도 없고해서 무척 애를 먹었는데 도로변 입구 앞에만 조그만 간판표시가 있었다. 그러나 입구로 들어서니 입장티켓을 구입하고 나니 상의와 외투는 모두 접수처에 맡겨야만 해 다소 불편하기도 하였으나 막상 들어서 보니 파베르제라는 당시 러시아 최고의 공예달인으로 그는 황제의 명을 받아 황실용 각종 주방용품의 제작은 물론 황실가족들의 소장품과 특히 달걀공예품을 제작 납품했다고 하는데 주방용기들에 새겨진 각종 문양들은 어찌나 정교하던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한편으로 너무나 사치스러웠던게 아닌가 하는 의아심도 들긴 했다.
< 시진 5 : 에르미타주 박물관 전경> <사진 6 : 파베르제 박물관의 달걀공예품>
아무튼 이번 여행 중 가장 값진 구경을 한 것 같았다. 이튼 날에는 그 유명한 볼쇼이 극장을 찾아 나섰는데 극장은 역 출구 앞 광장에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 사진 7 : 모스크바 지하철 내부모습> <사진 8 : 지하철 내부 모습>
3일간의 쌍트. 페테르부르크 체제를 마치고는 모스크바로 향하기 위해 야간열차를 타게 되어 오전 관광은 생략한 채 모스크바행 역전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2시간이나 일찍 역사로 들어서니 입구에서부터 무슨 비행장 탑승이나 되는 것처럼 모든 소지품을 검색대에 올려놓고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플랫트 홈 번호가 없어 공항직원들과 청경차림의 근무자들에게 물어도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아직 시간이 안되었다는 시늉만 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겨우 안내를 받아 해당 플랫트홈에 들어서니 멋진 외관의 2층 객차가 있었는데 열차명을 보니 중국어로 “品牌的(핀파이더)”라고 쓰여 있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우등열차 급으로 열차 내 시설이 매우 깨끗하고 안락하여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새벽녘에 모스크바 역에 도착해서는 무조건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기로 마음먹고 지하철을 탔다. 그러나 환승을 여러번 해야만 하게 되어 역명과 방향등이 헷갈려서 여간 어렵고 힘든게 아니었다. 모두들 일상에 바쁜 사람들이라 말붙이기도 힘들과 또 잘 아는 사람들도 없어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서 겨우 승차할 수 있게 되었다. 힘들게 해당 역에서 하차 하니 후진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여인숙을 아는 사람도 드물고 해서 역시나 힘들게 찾고 나니 또 창문하나 없는 작은 골방이었는데 안내데스크에 있는 접수계 여직원은 너무 일찍 왔다며 오후 2시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있나 싶었으나 아무튼 규정이 그렇다고 하니 사정사정해서 짐만 겨우 맡기고 호텔 밖으로 나와 주변 지역을 맴도는 신세가 되어 거의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도 마음을 가다듬고 제일 목적지인 붉은 광장으로 향했다.
붉은 광장 찾아 가는데도 역시 수차례 문의와 환승을 거쳐 찾아갔는데 그 유명한 성 바실리 사원과 크렘린 궁전이 나왔다. 거대한 붉은 성벽의 크렘린은 우리에게 구소련의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의 산실로만 알려져 있던 곳인데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곳은 구 제정러시아의황제 전용의 우스펜스키 사원과 아르한겔스키 사원 등이 있었으며 이곳 야외전시장에는 황제의 대포와 황제의 종 등이 모여 있어서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우스펜스끼 사원에서는 옛날에는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고 지금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는 장소라고 한다. 황제의 대포는 제정러시아가 동부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황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무게가 40톤에 달하는 거대한 대포를 제작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황제의 종은 직경 6.6m, 높이가 6.14m인 세계최대의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크렘린에 화재가나는 바람에 경비원이 찬물을 너무 많이 부어 균열이 발생하여 깨지는 바람에 깨진 조각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 9 : 성 바실리 사원 전경> <사진 10 : 우스뻰스키 사원 전경>
< < 사진 11 : 황제의 대포> <사진 12 : 황제의 종>
둘쨋 날 아침에는 일찍부터 그 유명한 볼쇼이극장, 푸쉬긴 미술관을 향해 떠났다. 볼쇼이 극장은 지하철 2호선 찌아뜨랄리나야 역에서 하차하여 출구로 나오며 바로 광장 앞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극장은 1776년 예카테리나 2세 때 정식 공연장으로 사용케 되었다고 하는데 내부 구경은 못하고 외관구경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오후에는 푸쉬긴 박물관을 구경하였는데 우리가 아는 문학가 푸쉬긴과는 상관이 없고 그의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으로 세잔느, 고흐, 마티스, 모네 등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또한 어린이들의 다양한 놀이시설과 결혼식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고급스러운 연회시설이 있는 이즈마일로보 크렘린 등도 들러 보았다.
< 사진 13 : 볼쇼이 극장 전경> <사진 14: 이즈마일로보크렘린 전경>
삼일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우니베르씨떼뜨 역에서 하차하여 대학 캠퍼스 쪽으로 향했다. 드넓은 캠퍼스는 여러 블록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참을 지나다 보니 상경계 대학 간판이 보였고 이곳을 지나니 거대하고 우람한 고층건물이 나오는데 이곳이 대학 본부 건물이었다. 중앙광장에는 큰 동상이 있었는데 그 분이 제정러시아 시절인 1755년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한 미하일 로마소노프의 동상이라고 한다. 오후에는 유람선을 타려고 선착장을 찾아가니 비수기라 대형 유람선은 운휴중이어서 소형 유람선 선착장을 찾아 가니 마침 출발하기 직전이어서 승선표를 구입하자마자 급히 뛰어가 승선하게 되었다. 유람선에 오르니 승객이라고는 남자 승객 한명과 10살 정도의 딸을 거느린 젊은 엄마가 타고 있었다. 이 유람선은 모스크바 강변을 따라 약 2시간의 여정으로 모스크바 대학, 표트르대제 동상 (러시아 해군 300주년 기념비),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등의 전경을 돌아보는 코스였다.
<사진 15 : 모스크바 대학 본관 앞에서> <사진 16 : 모스크바강 소형유람선에서>
< 사진 17: 굼 백화점 삼성매장 앞에서> <사진 18 : 구세주 성당 앞의 포토존에서>
3박 4일 간의 모스크바 체류 일정 내내 지하철만을 이용하여 목적지를 향해 가다 보니 매일 역시나 25,000보 이상의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4일째 되는 날 저녁에는 다음 목적지인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루크츠크로 가기 위해 3박 4일간의 야간열차를 타야만 했다. 열차에 오르고 보니 이 열차는 완전 국내선용이어서 그런지 쌍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탑승했던 “品牌的”에 비하면 다소 격이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배낭여행객으로서는 그런대로 지낼만 했다. 열차내의 객실에는 4인 1실이었고 열차가 출발하자 승무원이 담요, 씨트, 수건, 슬리퍼가 담긴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이 물건들은 하차 시 모두 접어서 승무원에게 반납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열차내 양쪽 끝자락에 있는 전광판에는 실내온도 23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화장실의 사용여부 표시가 되어 있었다.
우리 좌석을 찾아 가니 먼저 온 여자 승객이 내 자리 쪽에서 짐정리를 하길래 열차표를 보여주자 옆쪽의 자기 자리로 옮기는 것이었다. 승차 전에는 무척 궁금하던 남녀 좌석배치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남녀혼숙 형태였던 것이다. 3박 4일 간의 열차여행이다 보니 중간 중간에 다른 승객들이 다시 들어오는 등 상당히 번잡스럽긴 했지만 서로들 조심하는 눈치여서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몇 정거장인 지나니 옆자리의 여자승객이 내리니 5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승객이 들어왔다. 그는 러시아 남자였는데 영어는 조금 하는 수준이었는데 그의 영어실력과 나의 러시아어 수준이 비슷해서 영어반, 러시아어 반, 수화반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지냈는데 그는 이루크츠크 전 정거장에서 하차하는 것이었다. 서로간 떠듬떠듬 거리며 대화 아닌 대화로 하루를 열차 내에서 지냈는데 그가 하차 시에는 환송차 객차에서 함께 내렸는데 하차하고 보니 부인이 우리들 객차 출구쪽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의 부인과도 인사 후 기념사진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옆칸의 백발노인과도 통로에서 이사하게 되었는데 마침 자기 둘째딸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친근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한국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먼저 목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나이를 물어보니 그는 67세였는데 턱수염까지 온통 백발노인이어서 나는 77세라고 하니 형님 (스따르쉐 브랏트) 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 사진 19 :러시아 동승객과 함께> <사진 20 : 러시아 백발노인과 함께>
3일간의 열차여행 끝에 이루크츠크 역에 도착하여 보니 호텔까지의 도상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시내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그러나 호텔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없어 앙가라 강을 건너서 무조건 하차 후 걸어서 찾아가기로 하여 수차례 우왕좌왕 끝에 호텔에 당도하게 되었다. 로비에 들어서니 4성급 호텔로 로비에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중국 국기와 함께 우리나라 태극기 액자도 걸려 있어서 매우 반가웠다. 도착 첫날은 3박 4일간의 열차여행으로 다소 피곤하였지만 오전 중에 바이칼 호수로 가기 위해 리스트비양카 행 미니 버스장으로 향했다.
이 미니버스 정거장은 중앙시장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거리의 행인들에게 물어도 중앙시장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동양계 얼굴을 한 70대 노인이 지나길레 그분에게 문의하니 그곳을 잘 안다며 우리를 중앙시장은 물론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분 역시 우리가 동양계 얼굴이어서 도와주고픈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미니버스는 정해진 출발시간이 없고 만원이 되면 그때서야 출발하는 것이었는데 목적지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덜컹거리며 계속 절름발이처럼 기어가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바이칼 호수는 4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두꺼운 얼음으로 덥혀있고 가장자리부분만 녹아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멀리 호수의 얼음위로 호버크래프트라고 하는 수륙양용 보트가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 호숫가로 달려가니 한번 탑승료가 1,500 루불이라고 하여 흥정 끝에 2명이 타기로 하고 막 탑승하려는데 동양계 젊은 아가씨 둘이 오길래 말을 걸어보니 일본인 여대생들이었다. 그녀들에게 우리가 흥정한 요금을 말하니 자기들도 함께 타자고 하여 4명이 한꺼번에 타게 되어 기사도 좋고 우리 4명 모두 기분좋은 동행이 되었다. 이 호버크래프트는 약 20분간 호수주변을 한참을 얼음위로 달리다가 얼음이 녹은 곳에서는 수면으로 들어가 몇분간 보트처럼 떠다니다 다시 얼음판위로 올라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 사진 21 : 바이칼 호수에서 만난 러시아 아가씨들과> <사진 22 : 일본 여대생들과 함께>
바이칼 호수에서의 짧은 시간의 유쾌한 호버크래프트는 탑승 후에는 다시 이루크츠크 행 미니버스를 타게 되어 맨 뒷좌석 쪽에 탑승하였는데 앞좌석 쪽에 있던 젊은 러시아인 아가씨와 청년, 그리고 동양계 아가씨가 함께 러시아어로 잡담을 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지나니 러시아 청년이 내린 후 잠시 조용해져 젊은 러시아 아가씨에게 요금 확인차 러시아어로 요금을 확인하니 대답을 하더니 혹시 중국 사람이냐고 묻길래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중국어로 대답하니 이번에 그녀고 깜짝 놀라며 동양계 아가씨에게 내가 중국어를 하는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우리는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양계 얼굴의 아가씨에게 이름을 물으니 러시아식 이름이어서 혹시 혼혈이냐고 물으니 자기 아버지는 러시아인이고 어머니가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종착지인 중앙시장에서 하차한 후 중국어로 이야기하며 계속 호텔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날씨는 점점 흐리더니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우리들은 호텔근처까지 다다르게 되었는데 그 러시아 아가씨는 근처에 한국인 식당이 있다며 그 방향까지 가르쳐주며 호텔인근의 명소들까지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즐거웠던 바이칼 호수관람을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니 호텔 창가에서 보이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키로프 광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여 모처럼 환상적인 감상에 젖어들기도 하였다.
이틀째 날에는 안가라 호텔 인근에 소재한 주현절 성당, 구세주 교회, 이루크츠크 설립자인 야꼽빠호프의 동상, 모스크바 개선문 등을 들러 보았다. 주현절 성당의 흰색 바탕에 주황색, 초록색 등 3색으로 외관이 조화롭게 채색되어 있어 독특하고도 멋진 외관이었는데 구 소련시절에 성당을 폐쇄하고 빵공장과 기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스크바 개선문은 제정러시아 시절 알렉산드르 황제 즉위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는데 러시아 전역에 3개의 개선문이 건설되었는데 이곳의 개선문이 제1호 개선문이라고도 한다.
< 사진 23 : 주현절 성당 전경> <사진 24 : 이루크츠크의 모스크바 개선문 전경>
삼일째 되던 날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건설을 지시한 알렉산드르 3세 동상, 아르바트 거리, 130번 지구, 이루크츠크 향토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여행자 동상 등을 구경하여 이곳에서도 역시나 25,000보 이상을 걷게 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 동상은 1,908년 시베리아 횡단열차 완공기념으로 세워졌으나 1,920년 볼쉐비키 혁명시 황제조각상 부분이 철거되었다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 100주년이 된 2,003년 황제의 모습이 재건되어 본래의 동상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향토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니 이곳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농기구와 생활용품과 현지인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우리나라 이조시대의 평민들의 찢어지게 가난한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어서 한편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마지막 날 오후에는 몽고의 울란바토르로 가기 위해 울란우데라는 작은 도시로 가게 되었다.
<사진 25 : 알렉산드르 3세 동상> <사진 26 :흑담비 동상에서>
이곳 울란우데란 곳은 원래 몽골제국의 영토였으나 몽골제국의 멸망 후 러시아 카자크 민족의 거점지를 러시아가 합병함으로서 러시아영토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볼쉐비키 혁명시 이곳을 지배하던 백군들과 볼쉐비키의 적군들의 내전 시 몰살당한 백군들의 피가 우데강으로 넘쳐흘러 붉게 물들어 “붉은 우데 강”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울란우데 역에도 역시 새벽녘에 도착하였는데 도로표시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찾아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수차례의 문의 끝에 위쪽 길에서 내려오는 2명의 여인에게 문의하니 40세 정도의 동양계 여인이 친절하게도 휴대폰으로 위치를 검색하더니 횡단보도를 건너며 다시 오던 방향으로 올라가며 조그만 여인숙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이 안내자 역시 우리가 동양계 얼굴이어서 자기와 같은 인종의식이 있어 가던 길을 멈추고 반대방향까지 가는 친절을 베푸는 것이었다.
< 사진 27 : 울란우데, 황제의 문에서> <사진 28 : 울란우데 아르바트 거리에서>
호텔에 체크인 후에는 숙소에서 비상식량인 라면과 누룽지를 끓여 먹으며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이내 시내구경을 나섰다. 이곳은 작은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몽고와의 접경도시라 그런지 황제의 문, 오페라 발레 극장, 전승기념비, 오키트리아 성당, 아르바트 거리 및 그곳 벤치에 앉아 있는 안톤.체홉의 동상 등 볼거리가 많은 도시였다.
1박 2일의 울란.우데 구경을 마치고는 몽골의 울란바토르로 가기 위해 역시나 야간열차를 이용하였다. 몽고입국을 위해서는 사전에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해서 서울에서 미리 받아 두었는데 밤 11시경 러시아. 몽골간 국경지대에 도착하였는데 몽고지역에 도착하니 남자세관원이 오더니 여권검사를 하는데 여권에다 무슨 레이져 권총같을 것을 갖다 대며 수차례 이리저리 대보며 기분나쁠 정도로 철벽검사를 하더니 여권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또 군복차림의 여자 검사원이 오더니 모두들 통로로 나오라더니 의자 밑에 놓아둔 트렁트를 열어보라는 것이었다. 여성 검사원의 검사가 끝나서 다 끝났나 싶었더니 이제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검사원이 커다란 쉐퍼트 수색견을 끌고 와 킁킁거리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강도 높은 검색을 하는 바람에 열차의 정차시간이 1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포의 검색 후 기차는 새벽 6시경 종착역인 울란바토르 역에 도착하였는데 그 앞정거장에서 이르자 환전상이 올라와 러시아 루불와 몽고의 투그릭 화를 환전해 주었는데 환율은 1 투그릭에 우리 돈으로는 약 0.55원 정도되는 수준이었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니 외부온도는 아직도 겨울날씨처럼 차가와 손이 시릴 정도였다. 우리가 묶을 역은 안낵서에 의하면 그리 먼곳은 아니어서 도보로 갈수 있는 거리였으나 외부온도가 너무 춥고 또 도로사정이 나빠 찾아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택시를 처음으로 타기로 하였다. 역 밖으로 나오니 3명의 택시기사들이 에워싸더니 Chinese, Japanese 하며 묻길래 목적지 호텔명을 대니 20,000 투르릭을 부르는 것이었다. 적정요금을 모르는지라 무조건 안탄다니 10,000 투그릭을 불러 역시 안탄다고 흥정을 하는데 다른 기사가 한국 사람이냐고 우리말로 묻길래 그렇다고 하니 5,000투그릭에 가지고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떻게 한국말을 잘 하느냐고 물으니 한국에서 일산과 파주 가구공장에서 목공으로 각각 3년씩 6년을 일했고 그렇게 번돈으로 울란바토르에서 아파트까지 샀다며 한국생활이 만족스러웠다는 것이었다.
호텔에 들어선 후로는 또다시 강행군을 하기 위해 중앙광장인 수흐바토르 광장으로 향했다. 이곳 중앙광장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몽고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아마도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 같았다. 이곳 광장 구경을 마치고는 다음 목적지로 향하던 중 횡단보도에서 신호대기 중 젊은 서양아가씨가 바로 내 옆에서 서길래 그녀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헝가리에서 왔다고 하며 2년 전에는 프랑스에서 6개월간 불어연수를 하였다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마침 43년 전에 프랑스 행정대학원에서 1년 반 동안 연수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하여 우리는 이곳 몽골에서 아예 영어 대신에 불어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 사진 29 : 울란바토르 겨울궁전에서> <사진 30 : 울란바토르 서울의 거리에서>
길을 건넌 후 목적지를 물으니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코스여서 헤어질뻔한 찰라에 그러면 우리는 내일 그곳으로 가려던 코스이니 아예 지금 동행해도 좋으냐고 물으니 흔쾌히 응하여 겨울궁전 쪽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거리가 다소 먼 곳이어서 미녀 여행객에게 인심 좀 쓰려고 택시로 갈까 하니 그냥 걸어서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2시간 정도를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게 되었는데 보통 때 같으면 상당히 피곤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피로감은 없었다. 그동안 사멸했었던 것만 같던 에돌핀이 되살아난 듯 넘쳐흘러 60년대 중반 국군의 날 시가행진할 때처럼 보무당당하게 신바람이 절로 나는 기분이었다.
겨울궁전에 도착하니 내부수리중이라 입장불가라고 경비원 비슷한 사람이 말하기에 그냥 주위를 둘러보고자 우측으로 향하니 작은 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보니 몇몇 인부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공짜로 궁전에 들어서니 궁전내부 역시 목조건물에 우리나라 궁전 모양과 엇비슷한 형태였다. 겨울 궁전 구경을 마치고 나니 점심때가 다 되어 다시 시내 쪽으로 향하며 한국음식을 맛보겠느냐고 물으니 좋다고 해서 서울의 거리로 향해 가며 우리나라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없어 몽고식당에 라면이라고 쓰여 있어 들어가니 비빔밥이란 게 있어 주문하니 우리나라 비빔밥이 아니라 몽고식 비빔밥으로 몽고식 쌀밥에 커다란 뼈다귀를 삶은 쇠고기 한 점이 들어있어 내 입맛에 별로였는데 이 항가리 아가씨 (흐르주나 코바츠)는 맛있다며 다 먹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막바로 북경을 거쳐 태국의 방콕으로 간 후 귀국한다는 것이었다.
이튼 날 아침에는 징기스칸의 거대한 동상이 있는 “천진벌떡”이란 곳으로 가고자 했는데 이 역시 비수기라 관광객이 별로 없어 갈수가 없어 한국에서 일했었다는 그 기사에게 물으니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해 요금을 물으니 130,000 투르릭을 불러 흥정한 결과 65,000 투그릭에 가기로 하였다.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비포장도로를 1시간여를 달려 주유소에 이르러 주유를 마치니 “천진벌떡”에는 식당이 없기 때문에 인근 매점에서 간식거리 음식물을 사가야 한다길래 그곳에서 점심용으로 빵, 과자, 사과등 과일 한 봉지를 사 가지고 갔다.
< 사진 31 : 천진벌떡의 징기스칸 동상에서> <사진 32 : 진기스칸 동상입구의 개선문에서>
“천진벌떡”에 도착하니 입구에는 서양식의 개선문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을 지나니 엄청나게 큰 규모의 백마위에 탄 징기스칸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었다. 박물관 내부관람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귀환 시 기사가 도중에 게르 촌이 있으니 그곳으로 안내하겠다고 하여 게르 촌으로 가게 되었다. 게르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에는 3개의 침대가 둥그렇게 놓여 있었고 중앙부에는 난로가 놓여 있었는데 주인 노파께서 몽고 전통음식을 내놓아 맛보라는데 사전 예약한 것도 아니어서 우유 조금만 맛보고는 몽고말로 고맙다는 인사는 “바일사, 바일사”라고 하여 그렇게 인사하였다. 이렇게 게르의 내부구경을 마치고는 간이매점에서 사온 과일 보따리를 노파에게 모두 드리고는 다시 한 번 몽고어로 바일스테 (Good-bye)라고 인사하고는 게르를 떠났다.
< 사진 33 : 게르에서 몽고 아이들과 함께> <사진 34 : 게르 내부 모습>
마지막 날 오전에는 이태준 기념관과 자이승 전망대를 구경코자 일찍 나섰는데 이태준 기념관은 자이승 전망대 바로 정면에 위치해 있었다. 이태준이란 분은 몽고에서 의료봉사를 오래해 몽고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고 하며, 우리나라 정부에서 그의 기념관을 세우게 되어 한국 여행객들의 필수관광 코스가 되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니 일단의 한국 여자 단체여행자들이 몰려 나오고 있어 그들과 잠시 이야기 하며 우리는 자유여행객이라고 하니 깜짝 놀라며 존경스럽다는 인사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태준 기념관 관람을 마치고는 정면에 있는 자이승 전망대로 향해 300여개의 계단을 오르게 되었다. 이 전망대는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에 2차 대전 전승기념비로 세워진 곳이라고 한다. 전망대 꼭대기에는 거대한 원형 벽면이 세워져 있고 이들 벽면에는 몽고군이 나치문양의 완장을 찬 독일군을 무찌르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몽고군이 어떻게 독일군과 전투를 하였는지 다소 의아스럽긴 하지만 아마도 소련군에서 근무하던 몽고군 장교가 독일군과 전투중 승리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사진 35 : 이태준 기념관에서> <사진 36 : 자이승 전망대에서 영국인 부부와 함께>
자이승 전망대 관람을 마치고는 다시금 러시아의 울란우데 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울란바토르 역으로 향했다. 대합실에서 약 2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플랫트홈으로 나와 우리가 탈 3번 객차를 향해 가는데 우리 옆에서 속보로 달리던 초로의 서양여자 승객이 바로 내 옆에서 넘어지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그분을 세워주곤 바구니에서 쏟아져 나온 과일 등을 주워주고는 잠시 대화를 해보니 자기는 네델란드 여자인데 고등하교 불어교사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또다시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그녀와 불어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우리는 각자의 객차로 향하며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루크츠크에서 바이칼 호수를 구경한 후에는 모스크바를 거처 네델란드로 귀국한다고 한다.
< 사진 37: 플랫트홈에서 화란의 불어선생과 함께> <사진 38 : 울란바토르 불교사원 앞에서>
우리가 탄 열차는 밤새껏 울란우데를 향해 달리는데 열차가 러시아 영토 지역에 도착하니 이번엔 러시아 측 세관원들이 몽고에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방법으로 1차로 여권검사, 2차로 트렁크 검사 후, 마지막으로는 역시나 커다란 쉐퍼트가 킁킁거리며 객실과 통로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울란우데에서는 지난번과 같은 여인숙에 머물게 되어 쉽게 찾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프런트에 있는 아가씨 왈 너무 일찍 왔으니 추가요금을 내라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몇 차례 입씨름 끝에 추가요금 없이 일찍 체크인하고 비상식량인 라면을 끓여 먹고, 점심은 옆 건물에 있는 명동이란 이름의 한국식당에 들러 비빔밥을 시켰는데 맛도 좋고 값도 싼 편이었다.
오후에는 지난번에 본 황제의 문, 오페라 발레극장을 지나 전승기념비를 거쳐, 오디키트리아 성당을 보기 위해 아르바트 거리 끝까지 가 보았다. 1,785년에 완공된 오디키트리아 성당은 울란우데 최초의 석조건물이라고 하는데 볼쉐비키 혁명시에는 그들의 과격한 난동으로 폐쇄되었다가 구소련의 붕괴이후 현재의 멋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아침식사 이후에는 오전시간밖에 없어 호텔인근의 종합운동장만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시간을 보냈다. 종합운동장 구경을 마치고는 또다시 명동식당에서 점심을 한 후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열차여행 코스인 불라디보스톡 행 열차를 타기 위해 14시 반 경 울란우데 역으로 향했다.
< 사진 39 : 전승 기념비에서> <사진 40 : 오디키트리야 성당에서>
울란우데 역에 도착하여 매표소 직원과 청경 등에게 몇 번 플랫트 홈으로 가야 하는지 물으니 모두들 시간이 2시간이나 남았다며 그냥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들에게서는 도무지 친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모두들 생기 없는 모습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국가에서 배정해 준 곳에서 일하고 있어 근무의욕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수차례에 걸친 문의 끝에 블라디보스톡 행 야간열차에 오르니 50대 중반의 독일인과 러시아 승객이 동승하게 되었다. 40대 후반의 러시아 승객은 초급정도의 영어실력이었고 독일인 승객은 정신과 의사로 조현병 전문의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서 격리시켜야만 한다고 했더니 지금은 좋은 조현병 치료제가 많이 개발되어 치유가 가능하다며 반대의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 사진 41 : 독일 정신과 의사 Markus와 함께> <사진 42 : 싱가포르, 러시아 승객과 함께>
아무튼 러시아 승객과는 영어 반, 러시아어 반 조금씩 섞어가며 대화를 했고 독일친구와는 친근감의 표시로 우리는 고교시절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다니까 의외라는 듯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나는 독일어 회화는 불가능하지만 고교시절 배운 보리수 (Lindenbaum)를 지금도 외우고 있다며 “Am brunnen vor dem Tore, da steht ein Lindenbaum, ~ ~ ~zu ihm mich immer fort" 하며 시범을 보였더니 그 노래는 유명한 독일 민요이긴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별로 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와 대화 중 자기는 여행 중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일본에서 3박 후 한국을 거쳐 방콕 방문후 귀국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미의 파타고니아도 이미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프리카의 희망봉과 그린랜드를 다녀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기는 아직 못 가 보았다고 하며 나더러 파타고니아를 권하길래 나 역시 파타고니아와 알라스카가 다음 목적지이긴 한데 경제적이로 실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옆 칸의 싱가포르, 러시아 젊은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40대 초반의 싱가포르 젊은이는 자신도 그린랜드를 가 보았다고 하여 자연스레 즐겁고 유쾌한 기분으로 열차여행을 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은 두 번째 여행이라 지리는 대충 감이 잡혀 문제가 없었으나 우리가 묵을 여인숙은 산비탈 지역에 위치하여 도무지 위치 찾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게 되었는데 이 기사가 호텔명 (Neptune)을 잘못 알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더니 완전히 도시외곽지대로 나가는 것이었다. 근 30여분을 달려 내려주는 곳의 호텔명을 보니 Neptuna였다. 그래서 이곳이 아니라 Neptune라고 하니 다시 온 길을 U-turn 해서 어렵고 힘들게 숙소를 찾게 되었으나 추가요금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곳 블라디보스톡에서도 2박 3일 일정이어서 해안가에 위치한 아르바트 거리로 나갔는데 이 거리의 정식 명칭은 마레샬 포키나 (포키나 제독 거리) 거리로 우리나라의 충무로에 해당하는 거리명이기도 하다. 이곳 해변가의 해양공원 일대를 다시금 거닐던 중 인근 식당 앞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우리도 그곳에서 점심을 모처럼 식당에서 먹게 되었다. 오후에는 중앙광장과 인근의 잠수함 박물관, 니콜라이 개선문, 이고르체르니콥스키 사원 등을 들러 보았다. 니콜라이 개선문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블라디보스톡 방문을 기념하여 1891년 세워졌다고 한다.
< 사진 43 : 니콜라이 개선문에서> <사진 44 : 잠수함 박물관에서>
그러나 이 멋진 황제의 개선문은 1927년 볼쉐비키들의 난동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2003년에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금으로 장식된 지붕부분 위에는 황제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태평양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니콜라이 개선문 아래쪽 해변가 도로변에 위치한 잠수함 박물관은 1939년에 건조된 잠수함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선박 14척을 격침시키고 1955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잠수함 박물관 길 건너편에는 블라디보스톡이 러시아의 극동지역 최대 군항도시답게 많은 수의 군함들이 정박해 있었다.
다음날 오전에는 이곳에서 제일 관광명소인 독수리 전망대와 금각교, 율부린너 기념상,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자 종착점 표지를 둘러 보았다. 독수리 전망대에서는 금각만 (부흐따 잘라또이 로그)을 가로지르는 금각교를 비롯해 아름다운 주변경관을 구경할 수도 있고 또 이곳 위에 서 있는 2명의 동상은 그리스 태생의 언어학자인 키릴과 메소디우스 형제상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러시아의 알파벳인 키릴문자를 만들어 전파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과 나”에서 부탄 왕국의 왕역으로 유명해진 율 부린너라는 사람은 러시아 인으로 소년시절 이곳 블라디보스톡에서 성장하여 그의 기념상을 그가 살던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 사진 45 : 독수리 전망대와 금각교에서> <사진 46: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에서>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점은 블라디보스톡 역 밖에 놓여 있는데 역사 2층 건널목에 있는 선로변에 있었다. 이곳에는 횡단열차 개통당시의 열차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곳 역시 유명한 관광명소로 되어 많은 중국인 단체여행객들이 가이드의 깃발 아래서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들 중국인 관광객들의 가이드는 모두 러시아 인으로 그들이 중국어로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이번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모스크바--블라드보스톡의 9,288 Km에 쌍트. 페테르부르크 간 약 700Km, 울란우데--울란바토르 간 왕복 약 1,500,대략 11,500Km에 달하는 장거리 열차여행이었는데 어찌보면 고대 실크로드와 견줄만한 여정이었는바 이러한 세계최장거리의 철도를 러시아 철도건설기술자들만의 독자적 기술로 건설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우리 조선 왕조의 국왕과 지배계급이던 소위 선비계층의 인물들은 선비우대, 무반경시(武班輕視)의 어처구니 없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외교정책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비굴할 정도의 사대주의에 안주하고, 대내적으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전통적 이념에 묶여,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의 산업혁명시절, 산업발전의 원동력인 상공업을 천시하며 왕족 일가의 권력유지를 위한 정쟁만을 일삼아 국력신장은 커녕 국력이 쇠진되어 결국에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만 우리나라의 역사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러시아 여행 중 모스크바나 기타의 대도시의 건물들 구조를 보니 모두가 제정 러시아 시절에 지어진 고풍스런 모습의 건물들이어서 타임머신을 타고 자못 중세시대로 들어간 기분이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현대사회의 상징인 초고층 건물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동-서 냉전시대에 국리민복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던 자유-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경제발전과는 달리 군비경쟁에만 매달리던 공산주의 체제로 인한 경제적 퇴보를 결과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러시아 운전자들은 횡단보도에 사람이 서 있을 경우에는 무조건 정차하여 보행자를 먼저 건네게 하며 “크랙션” 같은 것은 아예 사용치 않아 경적소리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처럼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탑승은 많은 우여곡절과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으나 그래도 여행사들이 주관하는 “패키지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유여행의 묘미와 참맛을 만끽할 수 있었던 유쾌하고도 유익한 여행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 사진 47 : 배낭여행자 동상 앞에서> <사진 48 : 블라디보스톡의 율부린너 동상 앞에서>
< 사진 49 : 희망봉에서 영국인 부부와 함께> <사진 50 : 그린랜드 수도 Nuuk 공항에서>
독일의 어느 철학자는 인생에 대해 이런 해학적인 멋진 말씀을 하였다고 한다. “인생은 하나의 여행과 같고, 인간은 하나의 방랑자와 같다 (Das Leben ist eine Reise ahnlich, Der Mensch ist wie ein Wanderer.)". 이번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여행객들은 남자건 여자건 또는 젊은 사람들이건 노년층이건 무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단독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자신의 거주지로부터 먼 곳을 자유롭게 찾아 다닌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그들이야말로 참된 여행자이자 방랑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이조시대 우리 조상의 지배계층들이 제정 러시아의 황제나 선각자 또는 장군들 같이 연해주를 거쳐 북진하는 국력신장에 힘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럽고도 서글픈 상념에 잡혀 보며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어를 좀 더 잘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도 많이 느끼며 이번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탑승소감을 끝내고자 한다.
“다 수비다니아, 라씨아 이 마이 스뿌뜨끼 ; 러시아 및 나의 동행자들 모두 안녕!”
|
첫댓글 길웅 형 소생이 IT실력이 미흠하여 해결 못한 사진 게제를 이렇듯 멋지게
해결해주시니 속이 시원합니다. 글이 살아납니다. 브라보!
형의 IT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사진을 다루어 보지 않은 탓이지요.
이형의 허락을 얻어 복사하여 다시 게재해 보았습니다.
브라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