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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14]
일반 신도도 도를 깨친다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금강경(제14분)에 보면, 부처님은 머나먼 전생에서 인욕바라밀을 닦으셨다. 한때는 가리왕에게 잡히어 몸이 베이고 찢기기도 하였다. 그 당시 부처님은 이미 4상(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여윈 상태였었다. 이처럼 전생에서부터 도를 닦아온 사람들만이, 현생에 와서 도를 깨치게 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6조 혜능 대사
이름도 없었던 사람! 일차무식인 나무꾼이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이라는 말을 단 한번 듣고는 금방 깨쳐버렸다. 스님이 된 후에 혜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여기게 금강경의 매력이 있다. 스님도 아닌 나무꾼이 깨쳤다는 점, 참선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이 깨쳤다는 점, 불교가 무엇인줄도 모르는 사람이 깨쳤다는 점, 이게 아주 흥미로운 일이고 또한 일반 사람들에게, “여보, 당신네들이여, 일자무식한 나무꾼도 도를 깨쳤는데, 당신들은 그래도 글자를 읽은 줄 알고 있는 유식한 사람이 아닌가. 당신들도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하면 금방 깨치게 될 거야” 하는 꿈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나도 건방졌다. 저처럼 일자무식인 혜능이 단박에 깨쳐버렸다면, 나도 불교공부를 좀 하면, 금방 깨쳐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자만심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헛된 꿈’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헛된 꿈’은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불교를 공부하게끔 해주었다. 1970년에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시간이 있으면 간간히 참선도 했었다. 그런데 웬걸, 지금 2021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도를 깨칠 기미가 전연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이 생에서 도를 깨치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는 도를 깨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불교하고 많은 인연을 쌓아놓는 일이다.
민간인이 도를 깨쳤다 하는 말을 들으면, 언젠가는 나도 이 분들처럼 도를 깨칠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갖게 해준다.
인종황제도 깨쳤다
조그만 나라의 임금도 무척 바쁠 텐데, ‘당’나라라는 거대한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황제가, 황제가 도를 깨쳤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일 것이다.
<나호야록; 羅湖野錄, 효영 중온>에 써져 있다. 인종황제가 <투자어록>(投子語錄)을 보다가, 한 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무엇이 큰 길의 흰 소(露地白牛)입니까?” 라고 묻자 투자스님은 연신 그를 꾸짖었다는 구절에서 인종황제는 깨달았다. 그리고는 석전송(釋典頌) 14수를 지었다. 여기에는 그 첫수만을 기록한다.
만일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참으로 고요하여 태초의 허공과 합친다 하리
머리는 세 개 팔뚝이 여섯이라*
엄동설한 섣달에 봄바람이 훈훈하구나
그리고 이를 회련선사에게 하사하니 회련스님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만일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창공처럼 맑고 맑은 것이라고 하리
우뢰가 고동칠 때면
온 누리에 가득한 화창한 봄바람
*삼두육비(三頭六臂); 마군을 항복받는 일을 맡은 부동명왕(不動明王) 이나 애염명왕(愛染明王)의 기괴하고도 성난 듯한 모습.
배휴 재상
재가신도로서 깨친 분으로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당나라 때의 재상을 지낸 배휴일 것이다.
어느 날 하루는 배휴가 절을 찾았다. 벽에 고승들의 진영이 그려져 있었다. 배휴가 안내해주는 스님한테 물었다.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스님은 그게 고승의 진영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배휴가 다시 물었다. “그림에는 고승이 있는데, 절에는 어찌 고승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스님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 스님은 안으로 들어가서 마당을 쓸고 있는 황벽스님을 모셔왔다.
배휴는 거만했다. 인사도 하지 않고 황벽스님에게 그림을 가리키면서, “이 고승은 지금 어디 있소?” 하고 물었다. 이때 황벽스님은 우렁찬 음성으로 “배휴!” 하고 배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감히 당나라 재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하지만 황벽스님은 당당했다. 이때 배휴는 엉겁결에 “예”하고 대답했다. 이때 황벽스님은 “지금어디 있소?”하고 여유를 주지 않고 물었다. 배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배휴는 황벽스님을 알아봤다.
“제가 고승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올렸다.
고승이란 깨달음을 줄 만한 스승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고승이 어디 있느냐?” 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배휴야, 지금 당신은 어디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다. 따라서 고승을 밖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배휴는 황벽이 고승인 것을 알아 뵌 것이었다.
어느 날 배휴가 금불상을 하나 가지고 왔다. 부처님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황벽이 대뜸 “배휴!”하고 불렀다. 배휴가 “예”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황벽이 “됐습니까?”하고 물었다. 배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뚱멀뚱 젊은 스승을 쳐다보았다. 황벽은 “이름을 지어줬잖습니까?” 하고 말했다. 이 때 배휴는 크게 깨우쳤다.
배휴는, “그까짓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너 자신이야, 부처는 바로 너 자신이니까,” 하고 깨쳤던 것이다. <달마에서 경허까지; 박영규 지음>.
배휴(797-870)는 황벽스님을 자주 찾아뵈면서 황벽스님의 말씀을 모아서 <전심법요; 傳心法要>라는 유명한 책을 쓰신 분이다.
깨친 재가 신도들
인천보감(人天寶鑑, 담수 스님)에 보면, 당나라 때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틈틈이 불교를 공부해서 도를 깨친 분들의 이름을 여기에 적어본다.
배휴는 황벽스님으로부터
한퇴지는 태전스님으로
이습지는 약산 스님으로
백낙천은 조과스님께
양대년은 광혜스님께
이화문은 조자스님께
소동파는 조각스님께
황산곡은 회당 스님으로부터
장무진은 도솔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다.
위의 많은 재가신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깨쳤는지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하지만 소동파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소동파 오도송
<산암잡록; 山庵雜錄; 무온 서중 지음>에 써졌다.
위의 글에서는, 소동파는 ‘조각’스님한테서 배웠다고 했는데, <산암잡록>에는 불혜 천 스님이라고 되어 있다. 스님이 누가 됐든 소동파의 깨침에 관한 것이니까, 여기에 적어보겠다.
소동파가 장산사의 불혜 천(佛惠泉)스님을 방문하였을 때다. 천스님이 소동파에게 물었다. “선비는 성씨가 무엇이요?” 소동파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저울(枰)이요”
“무슨 저울?”
“천하 노스님의 혓바닥을 재는 저울이요.”
이에 천스님은 악!하고 할을 했다. 그리고 물었다.
“이 할은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말해보시오”
소동파는 말문이 콱 막히고 말았다. 멍해버렸다. 정신을 잃고서 말을 타고 집에 오는 도중, 큰 개울물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서 문득 깨쳤다. 그리고 다음 오도송을 지었다.
개울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크나큰 진리의 설법이요
산천초목의 울긋불긋한 모습이
청정법신 부처님의 몸이요
밤에 내린 비에 계곡물 소리가
팔만사천 게송이로구나
다음 날 이 이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내 보여줄 수 있을까?
장정공 황조순
황조순은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담박한 생활을 누리면서 선의 종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전등록>을 보고서 깨달아 게송을 지었다.
6년 동안 마음 쏟아 불경을 읽었지만
책속에서 아리송하던 적이 그 몇 번이었던가
오늘에사 놓아버려 아무 일 없으니
이제껏 그 늙은이 변함없구나.
그의 벼슬은 집정(정승)에 이르러 소흥(1131-1162)연간의 명신이 되었으며 아울러 불도를 철저히 깨달았으므로 지난날의 배유 외 이고에게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고애만록, 枯崖漫錄>
승상 장불
<고애만록>에 써져 이다. 승상 장불(蔣芾)은 건창 지방에 살았다. 그의 호는 막재거사(幕齋居士)이다. 여러 차례 광효사의 은산 스님을 방문하여 도를 물었다. 은산스님이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어 법문을 했다. 이에 대하여 말을 하려고 했었는데 은산스님이 할!을 하는 통에, 말도 못하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그 후 청소 시자가 도솔 종열 스님에게 “불계에는 들어갈 수 있으나 마계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 말을 듣고 얼음 녹듯 의문이 풀려 이에 게송을 지었다.
적삼을 뒤집어 입고 거꾸로 신을 신으며
이리 저리 잡고 놓음이 모두가 그에게 있으니
마계로 불계로 들어가는 건 평상의 일이라
한 가닥 풍류가 그곳에서 흘러나오네
또다시 송하였다.
화류촌 주막에서 실컷 취한 후에
부처님 앞에서 라라라 노래 부르네
북을 쳤는지 그대는 아지 못하는가
모두들 손을 잡고 언덕으로 올라가네
이에 은산스님이 깊이 수긍하고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은산스님 북을 울려 장승상을 증명했다.
두 명의 일반인도 도를 깨쳤다
다음은 <원오심요>에서 따온 것이다.
1)양대년(楊大年)은 광혜스님에게 공부해서 깨치고는 게송을 지었다.
팔각의 맷돌판은 허공 속을 달리니*
금빛 털 사자를 개라 부르는도다
몸을 뒤집어 북두성에 감추려거든
모름지기 남극성 뒤에다 합장하게나
2)이도위(李都尉)는 석문(石門)스님을 뵙고 크게 깨달아 게송을 지었다
도를 배우려면 반드시 무쇠 같은 놈이라야 하나니
착수하는 마음에서 바로 결단내라
위없는 보리에 대뜸 나아가려거든
일체의 시비를 관여하지 말라
벼슬 없는 평민들
<산암잡록>(山菴雜錄; 무용 서중, 명나라)에 써진 글이다.
1)이발사 장 씨는 대대로 사찰의 물자를 공급하는 장사로서 참선하기를 좋아했다. 항상 대중을 따라 법문을 들었으며 스스로는 깨친 바가 있었다. 어느 날 눈이 내렸다. 어린 아이들이 눈을 뭉쳐 불상 만드는 것을 보고서 선승들은 제각각 게송을 지었는데, 장 씨도 뒤따라 한 수를 읊었다.
꽃 한 송이 여래 한 분 받들고 나왔는데
흰 눈꽃송이 둥글둥글 보조개에 미소짓네
해골이 원래 물이었음을 알았더라면
마야부인의 태속에 들어가지 않았을 걸
2)바늘 만드는 정(丁) 씨는 서암사 방산 스님에게 공부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가 유리에 대하여 게송을 읊었다
놔 버리든지
집어 들든지
한 점 신령한 빛
천지를 비추네
위의 두 수의 게송은 사물을 빌어 이치를 밝힌 것으로서 모두 경지에 이른 글이다. 내가(무온 서중) 이를 함께 기록하는 까닭은 그들의 지위 때문에 말까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의 지위 때문에 말까지 버릴 수는 없다”고 무온 서중은 말하고 있다. 도를 깨쳤어도, 벼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오도송은 기록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실은 벼슬 없는 평민들도 도를 깨친 분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이 든다.
여기서 보며 이발사 장 씨하고 바늘 만드는 정 씨는, 스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님으로부터 사사로이 공부를 배워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방 거사
배휴는 재가신도로서 도를 깨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아주 ‘잘 알려진’ 사람은 아마 방거사일 것이다. 선불교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방거사가 누구인가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당나라 때 양양에서 9세기 초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형양의 태수였었다. 방거사는 결혼해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가난하게 살았다. 대나무로 세공품을 만들어서 그날그날 먹고 살았다. 온 가족이 불교를 닦은 지 수년 만에 모두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수년 만에 온 가족이 다 깨달았다”고 했는데, 어떤 수행을 어떻게 했었기에? 만약 가르침을 받았다면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서? 하여튼 온 가족이 깨쳤다고만 했지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방거사 어록>(이리야 오시타가 지음; 양기봉 옮기)에 의하면, 방거사는 먼저 석두스님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물었다. “일체 존재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석두 선사는 손으로 방거사의 입을 막았다. 이때 방거사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마조선사에게 찾아갔다. 마조선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일체 존재와 관계없는 사람, 그것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이때 마조선사는 대답했다. “그대가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 버린다면 그때 자네에게 말해주지!” 이때 방거사는 문득 현묘한 도리를 깨달았다. 방거사는 마조 스님 밑에서 2년간을 공부했었다.
방거사는 스님이 되지 않았다. 석두스님이 어느 날 방거사에게 “그대는 스님으로 살 것인가? 혹은 거사로 살 것인가?” 하고 물어보았다 한다. 그 때 방거사는 “원컨대 사모하는 이를 따를 뿐”이라고 답했다고 했다. 아마 가족이 있었기에? 그런데 도대체 “사모하는 이”가 누구였을까?
방거사! 하면 그와 가족의 죽음에 대한 얘기가 훨씬 더 ‘유명하다’. 방거사가 나이가 들었다. 죽을 때가 되었다. 그는 방 가운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딸 영조에게 “밖에 나가 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고 오거라. 한낮이 되거든 알려줘라.” 딸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벌써 한낮입니다. 게다가 일식이어요, 아버지가 잠간 나와 보셔요!” 방거사는,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혼잣말을 하고서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 딸은 방거사가 그 전에 앉아있었던 장소에 앉아서 죽어있었다. 방거사는 “계집애가, 잽싸게도 재주를 부렸군!” 그리고 화장을 해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일주일 후에, 주(州) 목사 우적(于頔)이 문병을 왔다. 거사가 말했다. “부디 소유 일체를 공(空)으로 보시오, 없는 것, 일체를 꿈에라도 유(有)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지내시길. 모든 것은 그림자이고 메아리와 같은 거요.” 하고 말을 마치자, 우 목사의 무릎을 베개로 숨을 거두었다.
유언에 따라 화장했고, 그 재는 강물에 뿌려졌다. 시 300여 수가 세상에 전해져 있다.
우직 공은 사람을 보내서 방거사의 죽음을 그의 아내에게 알렸다. 아내는 말했다. “그 바보 딸년과 어리석은 영감태기가 나한테 말도 없이 가버리다니, 참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 사실을 아들에게 알렸다. 아들은 일하던 쟁기를 멈추고, 헛, 하는 소리를 내더니만, 아들도 선 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 어리석은 자식이 어쩌면 이다지도 심한 바보짓이람.” 하고는 아들 시체도 역시 화장해서 처리했다.
얼마 안 가서 그녀는 동네 집집마다 다니면서 작별 인사를 마치더니, 세상을 등졌다. 그 뒤로 그녀 소식은 아득하게 사라지고 어디로 갔는지를 아는 이가 없었다.
*여기서 보면, 아버지가 죽고자 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서 왜 딸이 일부러 먼저 죽었느냐? 이다. 죽음에 있어서 좋은 시간과 좋은 장소가 따로 있단 말일까?
방거사 가족은, 아파서가 아니라, 죽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임의로 죽었다. 도를 깨친 분들은 죽음도 임으로 선택해서 죽을 수가 있단 말일까? 만약 내가 도를 깨쳤다면 나도 ‘좋은 시간’을 골라서 ‘좋은 장소’에서 임으로 죽을 수가 있단 말일까?
84세에 깨친 스님:
한(閑) 장로는 스님이지만, 84세에 깨쳤다는 사실에 나는 기뻐했다. 나의 나이 83세, 나에게도 아직 도를 깨칠 수 있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데 기분이 좋아서 여기에 적어본다. <운와기담>에 써져있다.
1134년, 북주 민현에 대비사(大悲寺)에 84세 된 한(閑)장로가 있었다. 그는 늙었지만 열심히 참구하고 있었다. 하루는 댸혜 선사가 계신 절에 입실하였다. 대혜선사가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인가?”
“붙들어 일으킬 수 없다.”
“붙들어 일으킬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한 장로가 무어라고 대답하려는데 대혜스님이 죽비로 후려쳤다. 이때 한 장로는 문득 깨쳤다. 깨치기는 한 장로가 깨쳤는데, 장로는 오도송을 짓지 안했는데, 대신 대혜스님이 게송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를 인가하였다.
한 몽둥이로 생사의 굴을 깨뜨리니
그 자리에서 범인과 성인의 자취가 끊겼네
조주선사 마음 쉬지 않은 것을 비웃더니
늘그막에도 오히려 동서로 뛰어다니네.
도(道)라는 것이 하안거 동안거에 참여해서 아주 열심히 선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도가 깨쳐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혜능처럼 무식하고 좌선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깨치는가 하면, 통치하느라고 바쁜 황제며, 정승, 벼슬아치들도 도를 깨치고 있다. 이발사나 바늘 만드는 기술공도 도 공부를 하니 도를 깨쳤다. 84세 먹은 스님도, 그 당시 아주 늙었지만, 깨쳤다. 나 같은 재가신도도 도를 깨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주기에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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