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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차분한 20대들의 알흠다운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siwii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siwii
정비만 4명을 갈아치운 조선의 헨리 8세 , 드라마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조선왕 1위에 빛나는 조선왕조 최고의 떡밥 제조기 숙종
여자관계 복잡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이지만 약 250년 전 이미 그의 아성을 뛰어넘는 조상님이 계셨으니 바로......
조선 문종(文宗) 이향(李珦)
1414~1452
이분ㅇㅇ
나니? 문종은 여자에 욕심도 없고 후사도 늦게 본 편 아닌가여??
우리 문종전하가 숙종처럼 여자관계 지저분한 똥차일리가 없잖아여 쪽확좀^^;;;
확실히 문종이 후사를 늦게 본 건 맞음
BUT
그의 여자관계는 숙종과는 다른 의미로 파란만장하고 스릴이 넘쳤음.
세자시절에 맞아들인 세자빈만 세 명에 그 중 두명은 남사스러운 일로 폐빈당하고 한명은 으앙 쥬금
계속되는 세자빈의 문제에 마지막 세자빈이 죽은 뒤로는 아예 새장가도 안들고 조선 최초이자 최후로 왕후 없이 보위에 오름
이것만 보면 그냥 여자에 지쳐서 장가가기도 포기한 평범한 홀아비같지만 ㄴㄴ그렇지 않음 간택후궁 승은후궁 있을건 다 있었음
조선왕조 최초로 후궁을 맞이한 세자도 문종이고 조선의 세자 중에 단연 많은 후궁수를 자랑함
(부인들 상태를 보면 왜 안그렇겠냐만...)
그래서 오늘은 은근 스펙터클했던 문종의 여인들에 대해서 짧게 써봄
세자빈(왕후)
1. 휘빈 김씨(徽嬪 金氏)
문종이 14살 때 처음으로 맞이한 부인임.
안동 김씨(세도정치기의 안동김씨ㄴㄴ해. 여기는 구 안동김씨라고 하고 세도정치기 안동김씨는 신 안동김씨, 혹은 장동 김씨라고 함. 김질, 김자점, 백범 김구가 이 집안 출신)인데 집안이 명문가고 고모인 명빈 김씨가 태종의 후궁이라 그 연줄로 세자빈이 된 듯 해. 생몰년은 미상이지만 문종보다 나이가 서너살 많았다는 기록으로 봐선 아마 1410~11년 사이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싶음.
빵빵한 연줄과 집안으로 세자빈자리를 겟촤!!한것 까진 좋았는데 나이도 많고 외모가 별로였는지(...)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해.
일이 이렇게 되니까 다급해진 휘빈 김씨는 세자가 자신을 찾게 할 방법을 찾다가 방술에 빠져들게 되. 세자가 아끼던 궁녀인 효동과 덕금의 신발을 훔쳐서 태운 다음에 그 재를 세자가 마시는 술에 몰래 탄다던가 뱀이 검열삭제 할 때 나온 액체(..)를 손수건에 뭍혀서 그걸 몸에 지니고 다닌다던가 하는 갖가지 기괴한 비방을 행했음. 뭐하러 저런 짓 까지 할까 싶지만 세자에게 거는 세종의 기대는 꽤 컸고 그 중에는 당연히 후사를 보는 일도 포함되 있을 테니까(굳이 세자보다 서너살 많은 세자빈을 고른 것도 빨리 후사를 봐서 세자의 입지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많고)압박감이 상당했겠지.
어쨌든 이런 해괴한 일을 벌이다가 걸려서 휘빈 김씨는 2년만에 폐위되서 궁에서 쫒겨남.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야사에는 아버지인 김오문이 휘빈 김씨와 그 어머니를 베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대충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 거라 생각함. 그도 그럴게 유교적인 윤리가 점점 강해지던 사회에선 용납이 안되는 이유였으니까. 근데 따지고 보면 얼굴이 못생겼다고 세자빈을 안찾은 문종 쪽에도 문제가 있지만 감히 세자한테 그런 책임을 물을리가(...)
2. 순빈 봉씨(純嬪 奉氏)
본관은 하음. 그닥 이름 있는 집안 출신은 아니었던 것 같아. 휘빈 김씨의 일이 있고 난 뒤에 안되겠다 싶었는지 두번째 간택 시엔 미모의 비중을 대폭(..)늘려서 뽑힌 여인이라고 해. 처녀들을 모아놓고 간택을 진행하는 일도 봉씨가 간택될 때 처음 행해진 모양. 이때 꼬장꼬장 하기로 유명했던 신하 허조가 이렇게 우르르 모아다 뽑으면 얼굴만 보게 되고 덕은 알수가 없잖아요? 하고 반대했는데 세종이 잠깐 본 것 만으로 어떻게 덕을 다 알아봄? 어차피 알 수 없는 거 용모라도 보고 뽑는게 더 낫지 않음? 이라고 대꾸한 일화는 유명(...). 소헌왕후는 직접 상궁까지 지정해다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해서 세자빈으로서의 심성을 기르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세자도 처음에는 자기가 한 짓이 있어서 봉씨를 자주 들여다 보면서 공을 많이 들였음.
근데 처음에는 별 문제 없이 지냈는데 성격이 괄괄하고 직선적이었던 봉씨와 성격이 맞지 않았는지 세자가 다시 세자빈을 슬슬 멀리하기 시작함. 설상가상으로 그때 문종에게 총애하는 궁녀 양씨가 뙇! 하고 나타난거임. 물론 세자가 잘한 건 없지만 원래 힘 없는 쪽이 더 안달나는 법이잖아요. 이쯤 되면 세자빈도 문종의 성격을 좀 연구해서 살살 구슬렸어야 되는데 직설적인 봉씨는 그런거 없이 화를 내고 투기를 했던 모양. 당연히 세자는 그 모습에 기겁해서 더더욱 세자빈을 피하게 됨 악순환의 반복.
세자와 세자빈의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순빈 봉씨가 아이를 갖지 못하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임을 봐야 뽕을 따지 고심하던 세종과 소헌왕후는 세자에게 후궁 세명을 들이기로 함(세자가 후궁을 맞는 건 조선 최초였음. 이 것만 봐도 세종이 문종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고 기대를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음). 이 때 들어온 후궁 중 한명이 뒤에서 설명할 단종의 어머니 승휘 권씨(현덕왕후).
안 그래도 남편이 딴여자한테 정신팔려서 짜증나는데 시부모님이 우리 아들 빨리 후사봐야 되는데 다른여자 들여야지ㅠㅠ하면 빡이 치겠어요? 안치겠어요? 이때를 기준으로 순빈 봉씨는 본격적으로 패악을 부리기 시작함. 세자빈의 체통 그런거 없이 낮이나 밤이나 술에 쩔어 살거나 열녀전을 가르치러 온 상궁을 두들겨 팬다거나 화장실에 가서 일보는 궁녀들을 훔쳐보거나 하는 식으로(..)
이런 순빈 봉씨를 더 미치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으니 후궁으로 들어온 권씨가 뙇!!하고 회임을 해버린거임. 왕실 입장에서야 그보다 더 큰 경사가 없었지만 순빈 봉씨는 달랐음. 시발;;;쟤는 집도 명문가인데 임신까지 했다가 덜컥 아들을 낳으면 나 쫒겨나는거 아냐? 하고 불안에 떨다가 자기도 거짓으로 회임했다고 구라를 침. 물론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자 세종과 소헌왕후는 아연실색(..)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설이 좀 엇갈림. 승휘권씨가 임신하는 걸 보고 불안해 하다가 상상임신 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도 있음)
태어난 아이는 순빈 봉씨에겐 다행스럽게도 딸이었지만 이미 세자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졌고 시부모님에게는 아예 바닥을 보이게 되니까 상당히 정신상태가 불안했던 모양(갑자기 성을 버럭 내거나 궐 안에서 소리내어 통곡을 하거나 성을 버럭 내다가도 내시나 궁녀들에게 유난히 잘해줬다는 기록을 보면 감정기복이 심한게 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을 함).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봉씨가 자기 처소 궁녀인 소쌍과 대식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 봉씨의 소쌍에 대한 총애와 집착은 대단해서 잠시도 자기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다른 궁녀와 조금이라도 어울리려고 하면 몹시 화를 냈다고 함. 오죽하면 소쌍이 다른 사람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 라고 말할정도;;
이렇게 요란스럽게 총애를 하니 아무리 봉씨의 일에 관심이 없던 세자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가지 않을리가 없었음.
어느 날은 소쌍이 세자 처소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네가 정말 빈과 자느냐."
하고 핵직구를 날림;; 당황한 소쌍이 그렇다고 하자 세자는 아무 말 없이 묻어버리고 더이상 문제삼지 않음;;;
(개인적으론 이거 진짜 심하다고 생각함ㅠㅠ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낸데 완전 소닭보듯;; 미움보다 무서운게 무관심이라는데ㅠㅠ)
그래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으면 차라리 해피엔딩었을텐데 그럴리가 없잖아요?
소쌍이 봉씨와 이러쿵 저러쿵 하기 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단지라는 궁녀(하필이면 또 권승휘 소속의 궁녀였음. 인연 참...)가 있었는데 윗사람 격인 봉씨에게 자기 애인을 눈뜨고 뺏길 지경이 되자 화가나서 소쌍에게 달려가 이러쿵 저러쿵 화를 내는 걸 중궁전 소속 상궁이 들어버리고 맘. 국문을 한다 뭐한다 해서 궁은 또 한바탕 뒤집어지고 세자빈이 된지 7년만에 결국 봉씨는 쫒겨나게 됨.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휘빈김씨와 비슷한 길을 걸었을듯.
순빈 봉씨가 진짜 레즈비언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문종을 사랑했던 건 사실인 것 같음. 문종이 하도 자기를 찾지 않으니까 늙은 궁녀에게 '할멈은 내 맘 알죠?ㅠㅠ'하면서 문종이 자신의 처소에 찾아올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문종의 사랑을 받는 궁녀나 후궁을 질투한 것도 그렇고 문종이 자기 처소 밖을 서성거리는 걸 보면서 저이가 들어오지 않고 공연히 밖에서 뭘하고 있을까 애태우면서 자기 처소로 들어오길 바랬다는 기록도 있고 다만 표현방법이 일반사람과 매우 달랐을 뿐 . 근데 정작 남편인 문종은 자기를 소 닭보듯 봄은 물론이거니와 한나라 여후(呂后)와 비교하면서 공개적으로 디스;;시발놈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엄연히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이건 최고의 모욕이나 다름없음. 유학자 입장에서 보면 여후는 아녀자가 투기에 미쳐서 남편의 첩을 잔인하게 죽이고 국정을 농단하는 최고의 패륜을 저지른 거니까)
물론 유교가 국교였던 당시 상황으로는 절대 용납될 수 없고 순빈 봉씨의 행위가 현대 기준으로도 다 정당화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평범한 집에 시집가서 남편한테 사랑받고 살았어도 봉씨가 저 패악을 부렸을까 생각하면 좀 안타까워지는건 사실...그냥 봉씨는 평범하게 남편 사랑 받으면서 살고싶어 했던 것 같은데 그 남편이라는 분이 조선의 왕세자;;;허울좋은 세자빈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는 것 보단 차라리 어염집에 시집가서 자기만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남편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게 봉씨에겐 더 행복이었을 지도 모르겠음. 다른 부인한테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문종은 봉씨에겐 진짜 똥차가 맞습니다 맞고요ㅠㅠ개인적으론 정말 좋아하는 왕이기도 하고 왕으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것도 사실인데 이 것 만은 레알 쉴드를 쳐줄래야 쳐줄수가 없음;;;
3.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子 : 1남 조선 6대왕 단종 이홍위
2녀 공주(요절), 경혜공주
앞서 자기가 제일먼저 회임을 해서 봉씨를 안달나게 만들었던 그분ㅇㅇ. 그런 만큼 봉씨의 패악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는데 폭언을 듣는 것은 예사고 임신한 채로 종아리를 맞다가 기절도 하는 일도 있었다고;; 그런 봉씨의 패악에도 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낳지 못한 세자의 자식을 둘이나 낳는(둘다 딸이고 그나마도 한명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지만) 기염을 토한 의지의 여인이기도 함. 시부모님인 세종부부에게 눈도장을 찍은 건 말할 것도 없음. 봉씨가 패륜을 저지르다 폐빈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세종이 아 어차피 간택해봐야 또 이상한 애 들어오면 그 난리를 어찌 감당해 원래 있는 애들(권씨, 홍씨) 중에서 뽑아ㅇㅇ하면서 회의를 빙자한 답정너짓 주재하자 딸도 둘이나 낳고 품계도 높았던 권씨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뙇!! 세자빈의 자리까지 10보 남겨둔 상태였는데 의외로 복병은 가까이에 있었음.
"아 나 진짜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남 우세스럽게ㅎㅎ 이젠 간택이고 뭐고 더 치를 여력도 없으니까 이 둘중에서 뽑아(물론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말하기만 하면 돼)."
"홍씨 어때요? 품행도 방정하고 얼굴도 예쁘고. 전 홍씨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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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씨발 눈치좀 있어봐라....)
"ㅎㅎ이런 우라질.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넌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양원 권씨가 나이도 많고 직급도 더 높은데다 니 애를 둘이나 낳아줬는데 그런 앨 제치고 홍씨를 뽑았다 나중에 애가 안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럼?"
"그래도 전 홍씨가 좋은데..."
"ㄴㄴ내말대로 해라. 옛말에 부모 말 잘 들어서 손해나는 일 없다고 했음. 잔말 말고 양원 권씨를 세자빈으로ㄱㄱ"
권 양원(權良媛)과 홍 승휘(洪承徽) 중에서 누구가 적임자인가. 두 사람은 모두 세자의 우대하는 사람이며 우리 양궁(兩宮)의 돌보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자의 뜻은 홍씨를 낫게 여기는 듯하나, 내 뜻은 권씨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나이가 같으면 덕으로써 하고, 덕이 같으면 용모로써 한다.’ 했는데, 이 두 사람의 덕과 용모는 모두 같은데, 다만 권씨가 나이 조금 많고 관직이 또 높다. 또 후일에 아들을 두고 두지 못할 것과, 비록 아들을 두되 어질고 어질지 못할 것은 모두 알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권씨는 이미 딸을 낳았으니, 그러므로 의리상 마땅히 세자빈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 지금 이미 마지 못하여 형편에 따라 변통하여 처리하면서도, 또 의리상 마땅히 세워야 될 사람을 버리고 홍씨를 세웠다가 후일에 만약 화합하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되고, 또 능히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 후회가 작지 않을 것이니,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가히 세울 만한 사람인가. 아울러 의논하여 오라.”
하였다. 인손 등이 즉시 가서 이를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중략)“양원과 승휘는 모두 명문 벌족 중에서 골라 뽑아서 내직의 자리를 갖추 차지하고 있으니, 다른 범연(泛然)한 잉첩의 비교가 아닙니다. 또 일찍이 궁중에 들어와서 규범(閨範)이 일찍부터 드러났으니, 지금 이미 밖에서 널리 뽑아서 얻지 못했다면, 양원과 승휘 중에서 가장 어진 사람을 뽑아서 빈으로 삼는 것이 심히 적당합니다. 처음에 빈을 세우기를 의논할 때에 신 등의 의사가 이와 같았는데, 더군다나 역대의 임금이 모두 이를 행하였습니다. 송나라 진종도 또한 귀인으로 황후로 삼았으나, 정자가 일찍이 송조의 가법이 매우 바르다고 논하면서, 진종(眞宗)을 그르게 여기지는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빈을 세우는 일은 또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권씨와 홍씨의 나이의 많고 적은 것과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은 논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그 현덕(賢德)이 한 나라의 국모로서의 모범이 될 만한 것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결단에 있사오니 신 등이 감히 정할 바는 아닙니다.”
하였다. 인손 등이 이 말을 갖추어 아뢰니, 즉시 교지를 의정부에 내려서 양원 권씨를 세워 빈으로 삼았다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2월 28일(기축) 1번째기사
뜬금없는 남편의 X맨짓 때문에 하마터면 세자빈의 자리를 다른 후궁에게 뺏길 뻔 했지만 시아버지의 무한 쉴드로 권씨는 세자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 그러고 사이가 나서 좀 소원해졌는가 사오년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뙇!!하고 임신을 해서 태어난 게 아들!!! 원손!! 세종이 너무 기뻐서 2급이하의 죄수는 모두 사면한다는 교지를 읽으려고 하는 순간 용상 근처의 촛대가 떨어짐. 시발 좋은날에 불안하게 왜이럼?;;하고 촛대를 치우게 시켰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래 가사처럼 원손(단종)을 낳은 유세는 부려보지도 못한 채 3일 뒤에 현덕왕후 권씨는 산욕열로 세상을 뜸.torrr......사망 당시의 시호는 현덕빈(顯德嬪).
그후 맞아들이는 세자빈마다 족족 쫒겨나고 사망하고 하니까 지쳐서 그랬는지 아님 아들의 지위가 흔들릴까 염려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문종은 현덕왕후가 죽은 뒤론 더이상 정실부인을 맞지 않았음.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문종의 안일한 사후처리가 왕실 어른의 부재를 낳는 꼴이 되서 싸패 동생이 자기 아들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생긴 건 그냥 블랙유머.
살아서 유세는 부려보지도 못하고 죽은 현덕왕후는 죽어서도 편하질 못했는데 친정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서 대역죄인이 되자 덩달아 폐서인이 되서 남편과 합장되 있던 능이 파헤쳐지고(세조를 도저히 쉴드쳐줄 수 없는 이유중 하나. 아무리 그래도 자기 형이랑 합장되있는 걸 묘지를 굳이 파헤치냐;;) 관을 강가에다 버림받는 수모를 당함. 그 후 성종 때 현덕빈으로 다시 추숭되었다가 그녀에 대한 연좌제가 합당하지 않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와서 최종적으로 중종 8년에 왕비 복위가 확정되고 무덤을 다시 현릉(문종의 무덤)으로 옮기고 지금의 동원이강릉 형태가 됨. 살아서는 남편이 똥차 죽어서는 시동생이.....^^
그러고 보면 문종의 정실들은 하나같이 결말이 시망이거나 결과적으론 좋게 끝난다고 해도 그 찝찝함이...
정실부인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왜 문종의 정실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이모양이죠...
그녀 소생의 자식들로는 1남 2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문종 사이에서 낳은 실질적인 첫 아이이자(첫딸은 돌을 못넘기고 죽음) 문종의 아이들 중에서도 맏이급인 경혜공주(평창군주). 권씨가 승휘시절에 낳았으니 원래는 세자의 서녀인 현주에 봉해졌다가 어머니가가 세자빈이 되면서 덩달아 평창군주에 봉작됨.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든 1등공신. 실질적인 첫 아이라 그랬는지 문종의 총애도 대단해서 그녀가 하가할 때 문종이 대신들의 반대를 쿨 스루하고 당시 부촌이었던 향교동 민가 30채를 전부 싹 밀고 집을 새로 지어준 일화가 유명ㅇㅇ. 남편인 영양위 정종과도 금슬이 좋았는데 싸패 삼촌 덕분에 남편과 남동생을 모두 잃은 기구한 운명을 맞기도 함. 남편과의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고.
또 다른 자식은 사극의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정태우 단종(端宗)
조선왕조 사상 처음으로 원손-세손-세자-왕의 테크를 탄 정통성 깡패(아버지인 문종은 태어났을 적엔 대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원손이나 세손은 될 수 없었음). 그 뒤 삼촌 덕분에 상왕도 되었다가 팔자에 없는 군호와 대군호도 모두 얻은 뒤 숙종 대에 다시 왕으로 복위됨(직위 콜렉터?). 대신들의 옷자락 뒤에 숨어서 이리저리 휘둘린 나약한 왕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론 세종이 직접 '얘가 세자보다 나음(참고로 문종은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세종도 혀를 내두를 만큼 학문 덕후였음)ㅇㅇ'하고 인증까지 했고 황표정사 시절에도 할말은 다 하거나(결국 김종서가 거둠) 몸가짐이나 언동이 신중했다는 걸로 봐선 생각만큼 나약하고 부화뇌동하는 건 아니었던 듯. 하지만 삼촌이 정말 상상이상의 패륜아였던 탓에.....ㅠㅠ
후궁
1. 숙빈 홍씨(肅嬪 洪氏)
=귀인(貴人)홍씨 혹은 승휘(承徽) 홍씨
子 : 1녀 옹주(요절)
위의 현덕왕후 항목에서 대신 세자빈이 될 뻔 했던 그처자ㅇㅇ. 본관은 남양으로 1431년 권씨, 정씨와 함께 세자의 후궁인 승휘로 간택되어 입궁함. 현덕왕후보다 나이나 직위도 낮고 애도 없는데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세자빈으로 삼고싶어 했던 걸 보면 문종의 총애가 보통 대단한게 아니었던 모양. 1441년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던 해에 딸을 하나 낳았는데 1444년 요절함. 그 후론 슬하에 자식은 없음. 그래도 문종의 총애버프를 제대로 받았는지 현덕왕후가 사망한 뒤로는 세자궁의 일을 대신 맡아보았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엔 종 1품 귀인(貴人. 역시 자식도 없는데 대우가 파격적ㅇㅇ;; 심지어 당시 아들을 낳았던 간택후궁 정씨는 정3품 소용이었음;;)에 봉해져서 내명부 일을 계속 맡아보았다고 함.
(중략) 정선(鄭善)이 단자(段子) 5필, 나(羅) 1필, 백옥대(白玉帶) 1요(腰), 청화종(靑畫鍾), 6사(事) 화합(畫榼) 2사(事)를 바치고, 내궁(內宮)에게 단자(段子) 2필, 사(紗) 1필을 바치고,【내궁(內宮)은 곧 귀인 홍씨(貴人洪氏)이다. 이때 중궁(中宮)은 이미 훙서(薨逝)하시고 홍씨가 내전(內殿)을 다스렸다.】(후략)
문종 3권,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8월 5일(병자) 2번째기사
ㅇㅇ심지어 보면 알듯이 명나라에서 문종의 내궁으로 인정을 해줄정도로 입지가 탄탄했음.
이런 정도면 총애 못받는 정실보다 더 알짜배기라는 총애받는 후궁(심지어 애도 없는데!!)자리를 제대로 꿰찼으니 나름 성공한 인생인데 남편인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급서하면서 이 언니의 인생도 존나 카오스가 됨.
나는야 조선의 야망남. 내 앞길을 막는 자는 모조리 파.괘.한.다.(쑻)
문종이 죽고 아들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현덕왕후 대신 단종을 키웠던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가 궐 안의 일을 맡아보았는데 단종의 친위세력이 힘을 키워가는게 못마땅 했던 남편의 동생 수양대군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홍귀인을 숙빈으로 올려서 혜빈 양씨를 견제하도록 한거임(빈으로 지위가 같아진데다 혜빈은 할아버지의 그냥 후궁1, 숙빈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명나라에서 내궁이라고 인정받을 만큼 입지 탄탄한 후궁...게임이 안됨;;;).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숙빈은 남편의 외아들을 사지에 내모는 데 작게나마 일조하게 됨. 그 후에도 인생 좆망한 혜빈이나 다른 종친들과는 다르게 수양대군과의 사이는 원만했는지 성종 때 까지 살아서 속공노비를 청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남동생인 홍응은 성종 대에 영의정에 오르고 조카인 홍상은 명숙공주(성종의 누나)와 결혼해서 성종과 인척관계를 맺었으니 끝이 험했던 그녀의 라이벌들;;과는 다르게 나름 말년이 평안했음.
진짜 궁금한건 자기를 그렇게 아껴줬던 남편의 아들이 몰락하는 걸 보면서 대체 어떤생각을 했을까 하는거임. 불쌍하지만 수양대군은 무서우니까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님 자기한테 돌아왔어야 할 세자빈 자리를 권씨한테 빼앗긴 걸 생각하면서 고소해 했을까? 현덕왕후-문종-숙빈 홍씨의 관계도 굉장히 흥미롭고 잘만 쓰면 드라마 열편은 나올 것 같은데 문종 자체가 존재감이 없어서 그런날은 영영 오지 않을듯......
2. 사칙 양씨(司則 楊氏)
子 : 2녀 경숙옹주(敬淑翁主), 옹주(요절)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 취한 후궁. 세자궁의 후궁 품계는 종오품 소훈(昭訓)까지가 마지막이었는데 종육품 사칙의 자리에 있었던 걸 보면 대충 승은상궁정도의 위치였던 것 같음(종육품까지가 상궁의 마지노선ㅇㅇ). 문종이 왕이 된 다음에도 품계가 세자궁 시절 그대로였던 것으로 보아 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망했던 것으로 짐작.
출신이 한미했는지 후궁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문종의 총애가 나름 꾸준해서 딸 둘을 낳았는데 하나는 일찍 죽고 경숙옹주(1439년 生)만 남았음. 경숙옹주는 단종 2년에 반성위 강자순에게 하가 했다가 후사없이 요절했는데 이 강자순이 옹주가 죽은 뒤에 부마는 양반가 딸을 계실로 맞을 수 없다는 관례를 깨고 계실을 들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은 적이 있음(결국 성종이 계실은 첩으로 내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도 전부 서자로 치는 것으로 마무리).
3. 소용 정씨
子 : 1남 왕자(요절)
현덕왕후, 숙빈 홍씨와 함께 세자의 간택후궁으로 1431년 처음 궁에 들어옴. 앞의 두명에 비하면 총애도 덜하고 존재감도 없었던 것으로 보임. 세종 말년에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세종실록 마지막 권에 정인지가 영릉에 제문을 지어 올릴 때 정씨의 아들이 어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문종 즉위년 당시까진 살아있다가 그 후에 요절한 듯 함. 아들을 낳았는데도 직위에서 홍귀인에게 밀렸던 걸 보면 역시 총애가 좀 덜 했던듯. 그 외 특이한 사항은 없지만 이 처자의 아버지인 정갑손의 동생 정창손은 사육신을 고변한 김질의 장인이었음.
그 외 요절한 아들을 낳은 상궁 장씨나 숙의 문씨, 소용 권씨(숙의 문씨와 소용 권씨는 1442년 간택후궁 승휘로 입궐), 소용윤씨(소훈윤씨)나 승휘유씨 등등이 있지만 앞의 세명에 비하면 존재감도 없고 자료도 미비해서 그냥 넘어감(문종은 후궁 수에 비해서 자식도 별로 없는데 그나마도 요절한 자식들이 많은듯ㅠㅠ)
문제시 문종 전하는 제가 가져갈게요ㅇㅇ 문제 없어도 가져감ㅇㅇ
첫댓글 이런거 너무 재미있어ㅠㅠㅠㅠ
재미써
재밌다
근데 난 이런거 보면 궁금한게 있어. 예전에 어릴때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왕손인데 다들 왜이렇게 어릴때 죽었을까?? 정치싸움때문일까? 근데 솔직히 왕자는 정치싸움일수있는데 공주는 정치싸움으로 죽일필요까진 없었을 것 같은데 왜이렇게 어릴때 죽은걸까??
와 존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