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시피 경복궁은 임진왜란때 한번 불타고 몇백년 후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되는데
우리가 지금보는 경복궁의 모습이 흥선대원군때 복원한 모습임
-현재 경회루의 모습-
-임진왜란 전 모습 상상도 (따로 그당시 모습 복원자료가 없어서 내가 대충 그림) -
임진왜란 전 경회루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경회루는 지금처럼 2층누각이 아닌 3층누각이었으며,
48개의 기둥 하나하나에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조각이 세겨져 있었음
당시 기록↓
-3층설에 대한 기록과 당시 그림-
성종 37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2월 14일(경오)
경연에서 홍윤성·서거정·이극배와 경회루 수리에 대해 논의하다
지사(知事) 이극배(李克培)는 아뢰기를,
“지난번에 신이 경회루의 견양 (설계도)을 보니 3층(層)에 이르는데, 만약 그렇다면 지나치게 사치한 듯하니 구제(舊制)대로 수리하는 것이 편(便)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니다. 다만 구제(舊制- 주: 이전의 제도)를 감하지 않았을 뿐이다.”
(빨간 동그라미가 경회루 인데 지금처럼 2층이아닌 3층으로 묘사되어있음)
-용기둥에 대한 기록-
성종 50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12월 17일(무술)
정괄이 차자를 올려 경회루 돌기둥에 새긴 무늬가 지나치게 화려함을 지적하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정괄(鄭佸)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지금 들으니, 경회루(慶會樓) 돌기둥에 그리어 새긴 구름과 용과 화초들의 형상이 사치하고 화려함이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모름지기 새기지 말게 하여 검소한 덕을 밝게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장차 물어보겠다.” 하였다.
-당시 경회루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 유구국 사신에 대한 기록-
사신이 퇴관(退館)하여 통사(通事)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국에 와서 세 가지 장관(壯觀)을 보았소.” 하였다. 통사가 그 까닭을 물으니, 사신이 말하기를,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 붉은 연꽃 사이에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 이것이 한 가지 장관이요,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을 쳐들어온 왜군에 의한 기록 -
"드디어 한성(한양 도성)에 도착했다. 도성안은 텅 비어 있고 동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우리는 동대문을 지나 조선의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에 도착했으나 궁궐 역시 텅 비어있었다.
화려한 궁궐 건물과 성벽들, 보든 것들은 너무나 잘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이루 표현할 수 조차 없었다...
어느 건물에선 향기가 진동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된 거울과 침상들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연못 옆 어느 누각(경회루) 돌기둥에는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있고 지붕은 유리기와로 덮여있었다.
사방 벽에는 기린, 봉황, 공작, 학, 용, 호랑이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계단 한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학 모양이 새겨진 돌이 깔려 있었다. 이곳이 과연 용의 세계인지 아니면
신선이 사는 세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여기서 유리기와가 뭐냐면 보통의 검은색의 기와와는 다르게 여러 색의 유약을 입혀 구운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기와로 만들기가 매우 까다롭고 엄청난 노동력이 드는 최고급 기와인데,
(현재 청와대 지붕이 파란색인 이유도 당시 기술로 만든 실제 유리기와를 얹었기 때문)
당시 조선에도 중국처럼 여러 색깔의 기와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고
경복궁내 주요 전각 대부분이 이 유리기와로 덮여있었음.
실제로 경복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유리기와들이 발굴됨
(경복궁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리기와들)
결론- 망할 선조
첫댓글 와 근데 직접 그린 것도 대단하다ㅠ 아무튼 좆본 제발 침몰 기원합니다!
망할 선조보단 망할 좆본이쥬...
삭제된 댓글 입니다.
흥선대원군때 재건한것 역시 문화재이기때문에 복원한다고 지금의 경회루를 없애거나 옮기거나 하는건 그 역시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하게 돼...!!
진짜 속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