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올 김용옥 고본대학
0008
[고본대학(古本大學) 들어가기 8] 주희의 격물론(格物論)과 치지론(致知論)
'치지致知'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
'치지致知'라는 말에서 '치致'는 보통 '이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치지致知'를 상식적으로 풀이하면 '앎에 이르다'라는 간단한 풀이가 가능하다. 또한, '치致'를 '이루다'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으므로 '앎을 완성하다'라고 해석해서, 극한의 완성된 경지를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정현도 '치致'를 '지至'로도 쓸 수 있다는 주를 달았는데, 이는 대학 원문의 불명확함에서 기인하는 문제다. 대학에는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이란 구문 다음에 '물격이후지지物格以後知至'라고 해서 '치致'에 해당하는 동사를 '지至'로 바꾸었다.
사마광의 '치지致知' 해석
'지至'라는 글자는 '이르다'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지극함', '지극한 경지에 이르다'라는 뜻도 있다. 사마광은 '외물을 잘 한어하면, 지극한 도를 알 수 있다'라고 해석해서 '치지致知'를 '지극한 도를 안다'라고 이해했다. 이런 해석은 주희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주희는 이미 '격물格物'의 '격格'을 '지至(이르다)'라고 해버렸는데 '치지致知'의 '치致'도 '이르다'라고 해버리면,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은 '지지재격물至知在格物(앎에 이르는 것은 물에 이르는 것이다)'라는 이상한 명제가 돼버린다. 그래서 '치지致知'의 '치致'에 무언가 다른 의미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희의 외적 공부(격물), 내적 공부(치지)
주희는 그의 문인 황자경의 질문에 답하는 편지에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 '격물'은 단지 개별 사물에서 그 사물의 이치를 온전하게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그렇게 물리를 탐구해서 얻은 이후에 내 자식 자체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내면적 행위'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격물과 치지는 다른 두 개의 사태가 아니며, 모두 궁리라는 하나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격물과 치지의 상호 보완
격물과 치지는 내외 과정으로 확연하게 이원화되지 않는다. 격물은 자연히 치지가 따르고, 치지를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격물이 필요하므로 양자는 상호 보완 발전하는 관계이다. 주자는 어류에서도 이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치지는 반드시 격물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학인들이 치지를 한다고 방 안에 틀어박혀 관념적 심사만 굴리고 구체적인 사물에 즉하여 탐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대학장구의 치지격물 해석
주희의 이런 고민을 알면 대학장구의 '치지재격물'에 대한 주희의 주석이 명확해진다.
致推極也, 知猶識也. 推極吾之知識, 欲其所知無不盡也.
치(致)는, 극한까지 나아가는 것이고(推極也, 추론함), 지(知)는 식과 같다(猶識也). 나의(吾之) 지식을(知識) 끝까지(極) 밀고 나가서(推), 그(其) 아는 것이(所知) 다하지 않음이(不盡) 없도록(無) 하려는 것이다(欲也).
格至也, 物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
격(格)은 이른다는 것이다(至也), 물은(物) 사와 같다(猶事也). 사물의(事物之) 이치를(理) 끝까지 이르고(窮至), 그(其) 극처에(極處) 도달하지 않음이(不到) 없게(無) 하려는 것이다(欲也).
주희가 '지知'를 '식識'이라고 했는데 '식識'은 '식별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이 있고, 매우 명료한 개념적 지식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지식'이란 단어와 큰 차이가 없다. 모든 '물物'에는 '리理'가 구비되어 있고 '심心'에는 '지知'가 구비되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치지'는 궁극적으로 '전지全知', 즉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주자의 격물치지는 격물과 치지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며 '知'의 확대 과정에서 순환하는 구조로 주지주의 성격이 강하다. 지와 행을 구분한다면 항상 지가 우선이다. 정확하게 아는 것이 행동의 기초가 된다. (대학학기 한글 역주, 김용옥)
0009
[고본대학(古本大學) 들어가기 9] 정주(程朱)의 경전(經傳) 체제 날조
정명도와 정이천의 '개정대학'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보자면 '대학'이라는 텍스트는 당초 사서의 한 구성물로 들어왔고, 사서집주에 포함된 대학은 주희의 인식 구조 안에서 변형되고, 재해석된 대학장구라는 텍스트였다. 주희가 고경을 이처럼 변조한 것은 대학의 역사에서 보자면 최초의 시도는 아니었다. 그는 존경하는 선배인 이정의 선례를 따른 것뿐이다.
정명도와 정이천은 '대학'이라는 텍스트가 매우 혼란스럽다고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 배열을 바로잡은 '개정대학'이란 텍스트를 제시했다. 두 사람의 재배치 결과는 '하남정씨경설'에 남아 있다. 북송 시대의 자유로운 학문 풍토에서 주희는 이들의 노력을 경전 체제로 보다 치밀하게 완성했다.
사자서와 도통
주희에게는 한유로부터 내려온 강렬한 도통의식이 있었다.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계보를 정당화하려고 네 사람의 작품을 각기 '경經' 수준의 준거로 제시라려고 노력했다. 공자에게는 논어가, 자사에게는 중용이, 맹자에게는 맹자라는 작품이 있지만, 문제는 증자였다. 주희는 아무런 근거 없이 '대학'을 증자의 작품으로 내세웠다. 사서는 이런 강렬한 도통의식의 결과물이었다.
주희는 매우 개념적인 사람이었는데 대학은 그에게 풍요로운 개념을 선사했다. 그가 '대학장구서'에서 말한 것처럼 '대학'은 '국가화민성속지의國家化民成俗之意'였고, '학자수기치인지방學者修己治人之方'이었다. 이 두 마디에 주희가 지향하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대학만 알면
심지어 주희는 '주자어류'에서 대학만 제대로 알면 타 경전은 다 '잡설'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또한, 사서 중에서 대학이야말로 유학의 가치관을 총망라한 기본 경전으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권했다.
學問須以大學為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학문은(學問) 모름지기(須) 대학을(以大學) 우선으로(先) 삼아야 한다(為), 다음이 논어이고(次論語), 다음이 맹자이고(次孟子), 다음이 중용이다(次中庸). 중용의(中庸) 공부는(工夫) 정밀하고(密), 규모가(規模) 크다(大).
공부하려는 사람은(某要人) 먼저(先) 대학을(大學) 읽어서(讀, 以) 그(其) 규모를(規模, 윤곽과 구조) 정하고(定); 다음으로(次) 논어를(論語) 읽어서(讀, 以) 그 근본을(其根本) 세우고(立); 다음으로(次) 맹자를 읽어서(讀孟子, 以) 그 발월(其發越,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觀); 다음으로(次) 중용을 읽어서(讀中庸, 以) 옛사람의(古人之) 미묘처를(微妙處) 찾아야 한다(求).
대학 한 편에(大學一篇) 등급과(等級) 차제가(次第) 있어서(有), 모두(總) 한 곳에(一處) 있어서(作), 깨닫기 쉬우니(易曉), 마땅히(宜) 먼저 본다(先看). 논어는(論語) 구체적이지만(卻實), 다만(但) 언어가(言語) 흩어져 보이고(散見), 처음 보면(初看) 또한(亦) 어렵다(難). 맹자에는(孟子) 사람의 마음을(人心) 감격하게 하고(感激) 흥발시키는(興發) 곳이(處) 있다(有). 중용도(中庸) 또한(亦) 읽기 어려우니(難讀), 세 책을 보고(看三書) 나서(後), 비로소(方) 마땅히(宜) 그것을 읽는다(讀之).
선진문헌의 경전 체제와 주희의 대학장구
'한비자'의 '내저설'과 '외저설'편을 보면 그 형식이 압축적 내용을 담은 '경經'이 앞에 나오고, 그 뒤에 경의 내용을 설명한 '설說'이 나온다. '경經'은 압축된 논술체 문장이고, '설說'은 그 논술을 설명하는 사례들이다.
주역에도 '경經'과 '전傳'이 있는데, '계사전繫辭傳'이란 '괘사'와 '효사'에 매달린 설명이란 뜻이다. '계사'와 '효사'는 곧 경을 의미하고, 그 경을 해설한 전이라는 구조가 된다. 압축된 내용을 전달하는 '경문經文'이 나오고, 그 경문을 설명하는 '설說'이나 '전傳'이 뒤따르는 형식이 전국 말기에 하나의 전형으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희는 이런 경전체제에 맞춰서 대학을 경과 전으로 구분했다. 맨 처음의 '대학지도大學之道'부터 '미지유야未之有也'까지의 205 글자를 '경'으로 보고, '공자가 말한 것을 증자가 전술했다'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증자의 문인이 증자의 뜻을 기록한 '전'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전을 열 개 장으로 나눴는데, 기본적으로 경을 차례대로 해설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앞의 경과 순서가 맞지 않는 문제가 생기자 '예기' 속의 '대학'의 배열을 바꿀 필요가 생겼고, 이런 재배열 작업의 결과가 주희의 '대학장구'다.
이정과 주희의 대학 인식
주희에 앞서 대학을 재배치한 정명도와 정이천은 주희와 조금 다르게 대학을 바라보았다. 대체로 정명도는 '성의誠意'를 중심으로 보고, 정이천은 '치지격물致知格物'에 좀더 관심이 많았다. 이것을 '지행知行'의 문제로 보면 '치지격물'은 '지'의 문제가 되고, '정심성의'는 '행'의 문제가 된다. 명도는 행을 강조했고, 이천은 행과 지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했고, 주희는 '지'의 독자성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대학학기 한글역주, 김용옥)
0010
[고본대학(古本大學) 들어가기 10] 왕양명의 고본대학론과 격물치지
왕양명의 반기
주희의 대학장구에 가장 강력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명나라의 사상가 왕양명이었다. 주희의 학문은 명대에 와서는 이미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했고, 영락대제가 간행한 사서집주에서 '대학'과 '중용'의 판본을 확정하면서 오경대전에 포함된 '예기대전'에서 대학과 중용 편을 삭제해버릴 정도였다. 따라서 왕양명이 사서집주의 대학을 부정하고 예기 속의 대학을 들고 나온 것은 큰 충격이었다. 예기의 대학을 '고본대학'이라고 부른 것도 왕양명이 만든 신조어였다.
주희의 한계
주희의 '치지격물'에서 핵심은 '격'의 대상이 되는 '물物'을 '리理'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마광이 격물의 물을 도덕적 타락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한어의 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정이천이 '물物'을 '리理'의 주체로 파악하고 탐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 존중과 함께 그 세계의 발전적 이법을 중시하는 진취적 태도에서 기인했다.
주희는 정이천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격물의 물은 객관적 이법의 담지자로서 나에게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물리'다.'명덕'은 선천적인 내면적 덕성의 가능태지만 그것은 격물을 거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매우 주지적이고 객관주의적이고, 진취적이다. 하지만, 이런 진취적 입장은 현실에서 실현될 방법이 없었다. 물리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론(자연과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희의 '물物'에 대한 관심이 자연과학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주희는 광범위한 인간 세상의 사태(인간의 행동, 사상, 마음까지 '物'로 보는 주희의 관점)에 대해서 어떤 객관적, 사회과학적 법칙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런 역할을 수행할 지식계급이 형성되지 않았고, 주희의 방법론은 결국 경학에 테둘리에 머물고 말았다.
왕양명의 지행합일
왕양명은 격물의 물이 '물리物理'가 된다면 '심心'과 '물物'이 격절되고 인간주체에서 떨어져 나가서 아무 의미가 없는 물이 된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물리는 심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주희의 '인심도심' 구분과 달리 심의 주체적 통일을 주장했고, 강력한 지행합일의 변증법을 제시했다.
주희의 격물이 결국 경전 공부로 돌아간다면, 경전의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내 마음의 도덕적 자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물리物理'는 '심리心理'가 되고 만다. 따라서 '격물치지'에서 주희가 '격물'을 강조한 것에 비해서 왕양명은 '치지'의 근원성을 강조했다. '치지'는 '격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이미 있는 선험적 능력인 '양지'의 발현이라고 했다. 주희가 '치지'를 '후천적 지식을 극대화한다'라고 해석한 반면 왕양명은 '선험적 명덕인 양지를 발양시킨다'라고 해석한다. 양지는 심의 본체이면서 타물의 힘을 빌리지 않으므로 격물이란 치지에 부속하는 사태에 불과하다.
왕양명의 '격물格物' 해석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희가 '이른다至'라고 해석한데 반해서 양명은 '바르게 한다正'라고 해석한다. 사마광이 '격물'을 소극적인 한어로 해석하고 왕양명은 적극적인 발현으로 해석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물을 도덕적 범주에 묶어 놓았다는 점에서 양자가 비슷하다.
'치지'가 '치양지'가 되면 그 내용은 '정심성의' 차원으로 변하게 된다. 때문에 왕양명은 '정심성의'를 보다 본질적인 대학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그에게 '지'와 '행'은 격렬한 삶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그래서 '함'과 '앎'은 모두 중요하지만 '함'이라는 실천을 전제하지 않는 학문의 무의미했다.
하지만, 왕양명의 대학 해석은 주희에 비해 정밀하지 못하다. 그가 '고본'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경학적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다. '격格'을 '정正'이라고 해석한 것도 주희가 '지至'라고 해석한 것보다 더 근거가 없는 임의적 해석이다. 양명학은 본래 이론적 연구가 아니라 사회적 혁명이고, 실천이고, 일종의 대중혁명과 같은 것이다. 왕양명의 사상은 명나라 사회의 계층구조의 변화 속에서 태동한 참신한 사상운동이다. 그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사대부 계급의 전유물이라는 의식을 깨고 농, 공, 상의 모든 계층으로 확산시켰다. (대학학기 한글역주, 김용옥)
0011
[고본대학(古本大學) 들어가기 11] 왕양명의 대학고본서(大學古本序)
《大學》之要(대학지요), 誠意而已矣(성의이이의). 誠意之功(성의지공), 格物而已矣(격물이이의). 誠意之極(성의지극), 止至善而已矣(지지선이이의).
대학의(大學之) 요체는(要), 성의일(誠意) 뿐이다(而已矣). 성의의(誠意之) 효과는(功), 격물일(格物) 뿐이다(而已矣). 성의의(誠意之) 극치는(極), 지선에(至善) 그치는 것(止) 뿐이다(而已矣).
止至善之則(지지선지칙), 致知而已矣(치지이이의). 正心(정심), 復其体也(복기본야); 修身(수신), 著其用也(저기용야).
지선에(至善) 머무는(止之) 법칙은(則), 앎을(知) 지극하게 하는 것(致) 뿐이다(而已矣). 마음을 바르게 하는(正心) 것은, 그 근본으로(其体) 돌아가는 것이고(復也); 몸을 닦는(修身) 것은, 그 쓰임을(其用) 드러나게(著) 하는 것이다(也).
以言乎己(이언호기), 謂之明德(위지명덕); 以言乎人(이언호인), 謂之親民(위지친민); 以言乎天地之間(이언호천지지간), 則備矣(즉비의).
그것으로(以) 자기에 대해서(乎己) 말하면(言), 그것을(之) 명덕이라(明德) 하고(謂); 그것으로(以) 남에 대해서(乎人) 말하면(言), 그것을(之) 친민이라(親民) 하고(謂); 그것으로(以) 천지의 사이에 대해서(乎天地之間) 말하면(言, 則) 갖추어진다(備矣).
是故至善也者(시고지선야자), 心之本体也(심지본체야). 動而后有不善(동이후유불선), 而本体之知(이본체지지), 未嘗不知也(미상부지야).
그러므로(是故) 지극한 선이란(至善也) 것은(者), 마음의(心之) 본체다(本体也). 움직이고(動) 나서야(而后) 불선이(不善) 있어서(有, 而) 본체의(本体之) 앎은(知), 일찍이(嘗) 알지 못하는(不知) 것이 없다(未也).
意者(의자), 其動也(기동야); 物者(물자), 其事也(기사야). 至其本体之知而動無不善(지기본체지지이동무불선).
뜻이란(意者), 그(其) 움직임이고(動也); 물이란(物者), 그(其) 일이다(事也). 그(其) 본체의(本体之) 앎이(知) 지극해서(至而) 움직임에(動) 불선이(不善) 없다(無).
然非即其事而格之(연비즉기사이격지), 則亦無以致其知(즉역무이치기지). 故致知者(고치지자), 誠意之本也(성의지본야). 格物者(격물자), 致知之實也(치지지실야).
그러나(然) 그 일에(其事) 즉해서(即而) 그것을 격하지(格之) 않으면(非, 則) 또한(亦) 그 앎을(其知) 지극하게(致) 할 수 없다(無以). 그러므로(故) 치지란(致知者), 성의의(誠意之) 근본이다(本也). 격물이란(格物者), 치지의(致知之) 내용이다(實也).
物格則知致意誠(격물즉지치성의), 而有以復其本体(이유이복기본체), 是之謂止至善(시지위지지선). 聖人懼人之求之于外也(성인구인지구지우외야), 而反復其辭(이반복기사).
물이(物) 격하면(格則) 지가(知) 지극해지고(致) 뜻이(意) 성실해져서(誠, 而) 그(其) 본체를(本体) 회복할(復) 수 있고(有以), 이것을(是之) 지선에(至善) 이른다(止)라고 한다(謂). 성인이(聖人) 사람들이(人之) 밖에서(于外) 그것을 찾을까(求之) 두려워해서(懼也, 而) 그 말을(其辭) 반복했다(反復).
舊本析而聖人之意亡矣(구본석이성인지의망의). 是故不務于誠意而徒以格物者(시고불무우성의이도이격물자), 謂之支(위지지); 不事于格物而徒以誠意者(불사우격물이도이성의자), 謂之虛(위지허); 不本于致知而徒以格物誠意者(불본우치지지도이격물성의자), 謂之妄(위지망).
구본이(舊本) 나누어져서(析而) 성인의(聖人之) 뜻이(意) 없어졌다(亡矣). 그러므로(是故) 성의에(于誠意) 힘쓰지 않으면서(不務而) 다만(徒) 격물을(格物) 쓰는 것을(以者), 그것일(之) 지엽이라(支) 하고(謂); 격물에(于格物) 일삼지 않으면서(不事而) 다만(徒) 성의를 쓰는(以誠意) 것을(者), 그것을(之) 허황되다 하고(謂虛); 치지에(于致知) 근본을 두지 않으면서(不本而) 다만(徒) 격물과 성의를 쓰는(以格物誠意) 것을(者), 그것을(之) 망령되다고 한다(謂妄).
支與虛與妄(지여허여망), 其于至善也遠矣(기우지선야원의). 合之以敬而益綴(합지치경이익철), 補之以傳而益離(보지이전이익리).
지엽적이고(支與) 허황되고(虛與) 망령된 것은(妄), 아마(其) 지선에서(于至善也) 멀다(遠矣). 그것을(之) 합쳐서(合以) 거경하지만(敬而) 더욱(益) 복잡해지고(綴), 그것을 보충해서(補之以) 전을 만들지만(傳而) 더욱(益) 멀어진다(離).
吾懼學之日遠于至善也(오구학지일원우지선야), 去分章而復舊本(거분장이복구본), 傍爲之什(방위지십), 以引其義(이인기의).
내가(吾) 학문이(學之) 날로(日) 지선에서(于至善) 멀어지는(遠) 것이 걱정되어(懼也), 분장을(分章) 없애고(去而) 구본을(舊本) 회복했고(復), 곁에(傍) 그 주석을(之什) 만들어서(爲, 以) 그 뜻을(其義) 끌어냈다(引).
庶幾復見聖人之心(서기복견성인지심), 而求之者有其要(이구지자유기요).
성인의(聖人之) 마음을(心) 거의(庶幾) 다시(復) 볼 수 있고(見, 而) 그것을 구하는(求之) 사람이(者) 그 요체를(其要) 가질 수 있다(有).
噫! 乃若致知, 則存乎心; 悟致知焉, 盡矣.
아(噫)! 바로(乃) 치지와(致知) 같은(若) 것이라면(, 則) 마음에(乎心) 있고(存); 치지를(致知) 깨달으면(悟焉), 다일뿐이다(盡矣).
0012
[고본대학(古本大學) 들어가기 12] 대학과 순자학파
대학은 누가 지었는가?
대학이 일반 사대부의 윤리강령을 적은 책이라는 생각은 주자학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한초나 그 이전 전국시대에 성립한 '대학'이라는 문헌이 이런 보편주의적 맥락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학은 누가 누구를 위해 쓴 것인가?
우선 '대학'에 나오는 언어 개념이나 논리적 함의가 가장 유사한 것이 '순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기 어렵다. 황우란은 아예 대학을 순자학파의 산물로 단정 지었다. 공자는 '호학'을 성인이 되는 길의 가장 중요한 기본 덕목으로 말했지만, 지식의 문제에 대해서 인식론적 물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공자 이후 인간 지식의 인식론적 정당성을 가장 깊이 성찰한 사상가는 순자다. 이런 성찰의 대표적인 작품이 순자 '해폐' 편이다.
대학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이란 문장을 살펴보자.
여기 나오는 '명덕明德'은 인간의 내면적 덕성을 가리키는 말로 선천적인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 틀림없다. 명덕은 분명히 맹자의 학통을 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순자는 인간에게 구비된 명덕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친민親民'은 선진 사상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특수한 맥락에서는 순자의 학풍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학은 순자와 맹자의 학통을 종합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선은 인간의 내면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말한다
마지작 '지어지선止於至善'은 해석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지선至善'은 '지극한 선' 또는 '최고의 선'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지止'라는 표현이다. '지止'의 기본 뜻은 '그친다', '머문다'이다. 그렇다면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극히 좋음에 그친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을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수사를 배제하고 생각하면 '가장 좋을 때 그만두어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노자'의 '지족불욕知足不辱'이나 '지지불태知止不殆'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친다'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런 의미 맥락은 '순자'를 읽었을 때 좀 더 명확하게 풀린다. 순자의 수신 편을 보면 '지止'를 '간다'는 뜻을 내포한 '그침'의 뜻으로 쓰고 있다. 가서 그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간다는 행위의 종료나 완성으로 감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지止'라는 개념을 둘러싼 논의가 순자의 '해폐' 편에도 있다. 대학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 해당하는 개념을 순자에서는 '지저지족止諸至足'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지선'과 '지족'은 등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지족至足'이라고 하는가?
순자는 '지족至足'은 곧 '성聖'이라고 했다. 성은 다시 '진륜자盡倫者'인 성과 '진제자盡制者'인 왕으로 나뉜다. 진륜과 진제의 양진자를 '성왕聖王'이라고 했으며, 성왕이야말로 천하의 기준이 될 만한 사람이다. 배운다는 것은 성왕을 배우는 것이고, 구현한다고 하는 것은 성왕의 법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움의 큰길(大學之道)은 막연하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왕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하는 공부다.
주희와 왕양명은 '지어지선止於至善'을 개인의 내면적 덕성의 문제로 파악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명덕-친민-지어지선'의 관계가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발전했다가 다시 개인적 차원으로 수렴하는 모습이 된다. 하지만 순자의 논리로 보면 '대청명의 명덕'을 가지고 '친민'을 실현하여 '지선'의 이상사회를 구현하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학의 논리인 '수신-제각-치국-평천하'만 해도 사 계급의 내면적 덕성의 문제로만 이야기할 수 없다. 치국과 평천하의 주체는 오직 지배계급일 수밖에 없다. (대학학기 한글역주, 김용옥)
0001
[고본대학(古本大學) 제 1장] 총강(總綱)
|
첫댓글 앞 부분은 동재가 안 되어 포기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은 인테넛에서 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