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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 K
지은이 : 곽경택 원작 / 김혜린 장편소설
출판사 : 성경
강지민은 자신을 지배하는 신기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
그는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동생의 넋을 이제는 고이 떠나보내고
싶었다. 자꾸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
진 여자, 새연이 마지막 남기고 간 선물, 그것은 사랑이다.
[닥터K]는 시시각각 목을 조여오는 공포와 고통을 독특한 소재를 통해 흥미롭고 긴장감
있게 그려낸 뛰어난 의학스릴러이다. 1998년 12월 김혜린
주요인물
강지민:무당의 유전적 인자를 지닌 신경외과 레지던트 4년차. 그가 지나가면 싸한 비누
향기가 난다. 얼음처럼 차갑지만 깔끔하고 잘생긴 외모는 여성들로 하여금 호감을 느끼게
한다. 죽음에 이른 어린 환자들이 그의 수술실에서 살아난다.
표지수:마취과 레지던트 4년차. 의과대학 시절 강지민에 이은 차석 졸업자. 10년 동안
강지민을 지켜보면서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현실적인 사랑을
원한다.
오새연:맑고 깨끗한 외모를 지닌 19세 여자 환자. 강지민을 만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랑
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괸다. 그러나 그녀는 최악성 뇌종양의 터미널 상태
이석명:카리스마를 지닌 하버드 의대 출신의 신경외과 과장. 강지민이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치료 행위를 하자 이에 의심을 가진다.
박호동:신경외과 내에서 실수와 사고투성이인 늦깎이 레지던트 1년차. 전혀 의사처럼 보
이지 않는 의사.
김현수:레지던트 3년차. 어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의국의 규칙대로 행동하며 강지민을
가까이서 돕는다.
남다른 능력을 가졌던 그를 인도한 것은 새연의 식어 가는 육체가 아니라 지극히도 한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했던 그녀의 영혼이었다.
이책을 읽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용어
AVM:동정맥 기형 스투퍼(stupor):혼미, 의식혼탁 라테랄로(lateral):외측, 측면
프론탈(front):전두 OP(operation):수술
페이션트(patient):환자
산대:죽을 때가 임박해 눈동자가 열리는 일
듀라 섹션(dura section):경막 절개, 안지오그램(angiogram):혈관 조영 사진
듀머(tumor):종양, 익스파이어(expire):끝나다, 죽다
인덕션(induction):도입, 유도(마취상태로 만드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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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 북 그리고 징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무당이 흔드
는 방울소리까지 합세를 하여 그야말로 멀쩡한 사람의 혼까지 빼 놓을 것만 같은 굿판이 벌
어지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 무당의 버선코가 유난히 뾰족해 보였다.
무당은 신명나게 뛰어오르다가 서슬이 퍼런 작두를 대령해 놓고서 그 위에 올라섰다. 작
두의 날을 얼마나 열심히 갈았는지 그 위에 종이라도 한 장 놓으면 그대로 둘로 갈라져 버
릴 듯 날이 번쩍 거렸다. 그런 칼날 위를 무당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다가 뛰다가 춤을 추
다가 했다. 그녀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춤을 추고 잡귀를 쫓는 문구를
읊기도 했다. 결국은 죽게 될 사람을 그녀는 사자들이 와서 데려가지 못하도록 지성을 다
했다.
어린 소년이 갓난아이를 업고서 무당이 춤추는 양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왔다갔다 걸어다니며 가끔씩 아기를 치켜올렸다. 굿을 벌인 당사자
들은 고개를 숙여 연신 절을 해 대며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굿을 하는 집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무당 앞에 거적으로 둘둘 만 무엇인가를 내놓았다. 사람들이 우!
괴성을 지르며 무당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
싸며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질렀다.
"헉!"
강지민은 악몽에 시달리느라 뒤척이다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는 신경외
과 의국의 간이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던 중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쯤 의국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곧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어
딘 가로 가는 모양이었다. 급히 뛰는 발걸음 때문에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지민이 안경을 집어쓰자마자 3년차 레지던트 김현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강 선생님! 강 선생님!"
지민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응급 코마 환자입니다!"
지민은 벌떡 일어나 곧장 수술실로 달려갔다. 환자는 스트레치카로 신속하게 옮겨지고
있었다. 의사들이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비켜요! 비켜!"
지민이 거기에 합류해 뛰어가면서 소리쳤다.
"최 간호사. 마취과에 연락했나!"
"네! 수술실에 대기중입니다."
환자는 이제 3세밖에 안된 어린 아이였다. 아이를 살려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지민이 불쌍한 어린 생명을 따뜻한 두 손으로 감쌌다.
'팟'하는 소리와 함께 X-ray 백색 형광판의 불이 켜졌다. MRI 뇌단층 촬영 사진들이 여
러 장 걸려졌다. 검은 색 바탕 위에 여러장의 사진들이 칸칸이 배열되어 들어있고 각각마
다 뇌 속의 구조물들이 다양한 명암으로 구분 지어져 있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의사들이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의국장인 강지민이 지시봉으로 사진 속의 대뇌 중앙부를 가리켰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71병동 중환자실 열두 번째, 대뇌 중앙에 AVM이 발생해 9월 13일 입원한 환자입니다.
입원 당시 멘탈은 스투퍼로우스였으나 지금은 4번 드로우지 상태입니다. 라테랄로 10밀리,
프론탈은 약 15밀리 정도가 부어있었고 어젯밤 EVD는 144cc였습니다."
아침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깔끔한 외모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강지민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안경 너
머로 눈이 총명한 빛을 발했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키도 훤칠한 그에게서 싸한
비누 향기가 났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그를 '비누'라고들 불렀다. 물론 그 앞에 두고 그렇
게 부르는 일은 없었다.
병원에서 그는 오직 환자를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장난이
나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진지하고 바빴다.
환자의 상태가 상태인 만큼 실내의 웅성거리던 소리는 사라지고 침묵 속에 긴장감만이 흘
렀다.
지민의 정면에는 이석명 과장과 교수 3명이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의사들이 다음 사진
을 챙기랴, 차트를 넘기랴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레지던트 3년차인 김현수가 걸려있던 사진들을 잽싸게 걷어 내자 몸집이 다소 뚱뚱한 레
지던트 1년차인 박호동이 둔한 몸을 허둥거리며 다른 환자의 사진을 덮어 끼웠다. 다른 사
람들도 피곤한 듯 머리엔 새둥지를 틀고 눈은 충형이 되어 있었다. 두세 명 정도를 빼고는
모두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손을 놀려 차트를 분리하고 봉투에서 MRI와 CT
사진 등을 꺼내어 전달하고 사진을 들어 형광등 불빛에 확인을 하고는 봉투에 번호를 써넣
었다.
그때였다. 사진들을 팔뚝에 불안하게 걸치고 있던 호동이 걸어놓은 사진이 빠지려는 걸
잡으려다가 팔뚝의 사진들을 우르르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요란스런 소리에 놀란 사
람들이 순간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호동에게 원망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비난의 시선도 섞여 있었다. 사
람들 사이에서 그는 덜렁거리고 지저분한, 잠자는 거지였다. 그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
고 머리는 감은 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한 가닥도 따로 분리해 낼 수 없을 만큼 기름으
로 떡이 져 있었다. 옷매무새는 정돈된 데가 한 군데로 없었다. 넥타이는 거의 풀어헤쳐졌
지. 더러운 와이셔츠의 소매는 되는대로 걷어붙여졌지, 바지는 구김이 하도 많아서 원래부
터 그렇게 만들어 놓은 구김바지 같았다.
호동을 얼굴이 달아오른 태 더욱 당황하였다. 평소보다 더 허둥거리는 그를 이 과장이 날
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리며 녹차 잔을 집어들었다. 잔이 놓인 테이블
유리에 형관판의 사진들이 반사되어 보였다. 이 과장은 이마를 찌푸렸다.
지민이 침착하게 호동에게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집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형광
판에 꽃았다. 호동이 머뭇거리다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다소 진정
이 되었다.
지민이 형광판 앞에 단정하게 섰다. 안경알이 불빛에 반사되어 그는 마치 흰색의 선글라
스를 쓰고 잇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71병동 중환자실 열세 번째, 어제 저녁 11시경에 응급실로 들어온 4세 된 남아입니다.
멘탈은 풀코마였으며 CT 촬영 결과 급성 뇌격막하 출혈이었으며 동공은 완전 산대 상태였
습니다. 새벽 1시에 OP를 실시한 후 중환자실로 옮겼습니다."
의사들은 여전히 바빴고 이 과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민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 동공이 완전히 산대에다 멘탈이 풀코마인데 OP를 했어?"
다들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만을 보고 있자니 실내는 찬물을 끼
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 과장은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이 시선을 피하자 그는 천천히 자
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그는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지민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 과장이 물었다.
"불필요한 수술을 했겠구먼. 지금 멘탈이 뭐야?"
지민이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 엘러트입니다."
이 과장이 놀란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다른 의사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과장이 물었다.
"그럼 청명 상태로 돌아왔단 말이야?"
지민이 대답했다.
"예."
이 과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OP 누가 했어?" 지민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했습니다."
모든 시선이 지민에게 쏠렸다. 교수들이 일어나 사진을 보려고 앞으로 나왔다. 분위기가
다시 술렁거렸다.
뭔가 의심스런 눈길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 과장이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살
며시 고개를 떨구어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눈을 들어 이 과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과장이 출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오전 라운딩은 중환자실부터 돌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모두가 출구 쪽으로 향했다.
지민이 이 과장을 얼른 따라가서 말했다.
"과장님! 오전에 주상례 씨 OP 잡혀 있습니다."
이 과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참 그렇군! 오전에 수술 있었지... . NS 선생들이 둘씩이나 입원하니까 매일 수술이구먼.
강 선생이 회진 돌고 끝나는 대로 들어와!"
"네."
의사들이 회진을 돌기 위해 우르르 방을 나갔다. 호동이 그 뒤를 사진과 차트를 잔뜩 싸
안고 허둥지둥 따라나갔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신경외과 의국의 간호사실 앞으로 지나
갔다. 첫 번째 병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뒷머리가 심하게 헝클어져 잇거나 얼굴이 푸석푸석
했다. 그 중에서도 맨 뒤를 따라오는 호동의 머리 모양새가 가장 볼 만했다.
간호사실 데스크에 서 있던 수간호사가 얼른 빠져나와 회진 팀에 합류하는데 반대편에서
평상복을 입은 간호사 한 사람이 지민을 눈여겨보면서 걸어왔다. 그녀는 지민의 말쑥한 얼
굴을 계속해서 힐끔거렸다. 그리고 간호사실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 다른 간호사와 서로 눈
인사를 주고 받았다.
두 간호사는 탈의실로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간호사가 지민 쪽을 턱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비누', 밤에 나갔다 왔니?"
"아니, 새벽에 응급 코마환자 OP했어."
그 소리를 들은 상대편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또 살았어."
"진짜야?"
간호사가 대답 대신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고는 다른 간호사와 함께 탈의실로 들어갔다.
회진 팀들은 먼저 지민이 수술을 했다는 환자부터 찾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환자는 맥박과 혈압이 극히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습
기에서 뿜어져 나온 김이 아이의 얼굴로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아이는 얼굴을 온통 붕대
와 시약으로 뒤엎은 데다가 퉁퉁 붓기까지 한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민은 말없이 아이의 손을 쥐었다. 어린 환자의 침대 옆에서는 벽의 모서리에 기대어
거의 잠에 곯아떨어지기 직전인 호동을 제외하고는 회진중인 모든 의사들이 믿기지 않는다
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지민이 아이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30
대 초반으로 보였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양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은인
과도 같은 지민에게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지민이 옆에 서 잇는 현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가 지민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지민이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지민이 물었다.
"의국비가 얼마나 남았죠?"
현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회진 중에 느닷없이 의국비를 물어 오니 영문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의국비요?"
지민이 말했다.
"원무과에 가서 저 아이 수술비랑 입원비를 좀 내 주세요. 보증은 내가 서기로 하고."
현수가 어이없다는 듯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이 말했다.
"다음달에 내 보너스가 나오면 그걸로 메꾸고."
현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그의 어깨를 툭 쳐 주고는 다음 병실로 향했다.
그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병실에서 의사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환자의 기적적인 상태에 대한 의견들을 주고받으
며 지민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호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그들을 보면서 물었다.
"박호동은 어디 갔어?"
모두들 대답 대신 턱으로 병실 안을 가리켰다. 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호동은 침
대에 기대어 선 채 열심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환자 보호자들이 그와 호동을 번갈아
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현수는 보는 사람들이 있어 화를 심하게 내지는 못하고 낮게 소리치며 그를 흔들어 깨웠
다.
"야, 박호동, 뭐하는 거야?"
호동이 흘러내리는 침을 되삼키면서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현수의 뒤를
따랐다.
다음은 뇌수술을 한 지 일주일 되는 할아버지 환자였다.
지민이 다정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떠세요?"
"음, 좋아."
지민은 환자들에게는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항상 다정하고 공손하게 그들을 대했기 때
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수술 결과에 비해서는 상태가 그리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의사들은
환자에 대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 잇던 40대 중반의 남자 환자 보호자가 지민을 불렀다.
"강 선생님, 강 선생님!"
지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 왜 그러십니까?"
"환자가 어제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그러는데 좀 봐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지민은 선선하게 대답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혈압과 맥박을 재 보고 나서 그가 말했다.
"상태는 좋은 편인데요. 수술 후에 올 수 잇는 현상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보호자가 인사를 꾸벅 했다.
"네, 고맙습니다."
지민도 인사를 하고 다른 의사들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회진을 끝낸 지민은 비상구를 내려가 재활의학과 수중치료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나이에 비해 머리가 좀 빨리 벗겨진 듯한 30대 중반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의사들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물리치료사였다.
지민은 옷을 벗고 수영장보다는 작고 목욕탕의 욕조보다는 큰 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물 속으로 들어가자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마치 태아가 산모의 뱃속에 들어 잇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았다. 고개
를 무릎 사이에 넣고는 숨도 쉬지 않고 있으니 마치 그 모양대로 죽은 시체 같았다.
물리치료사는 출입문 밖에 서서 잔뜩 긴장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오기라도
할까봐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풀 주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지
자 불 속을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미 나왔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올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리치료사는 기다리다 못해 물 속으로 손을 넣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그가 파
- 하고 호흡을 크게 내뿜으며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물보라를 튀기며 지민이 나타났다. 움질 놀란 물리치료사가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
은 듯한 그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물리치료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강선생... 15분이 다 됐는데예... ."
강지민은 부릅뜬 눈으로 물리치료사를 노려보았다. 물리치료사는 찔끔해서 얼른 그의 눈
길을 피했다. 그는 여느때와 전혀 달라보였다. 뭔가 다른 기운이 그를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온몸에서 강렬한 힘이 느껴졌고 눈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민은 곧 본래의 부드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민은 그제서야 수건을 받아서 몸을 닦고 빠른 동작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옆에 서 잇는 물리치료사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번번이 죄송합니다."
물리치료사는 그의 인사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우데예! 고마 샘 아니었으믄 우리집 꼬맹이는 벌써 딴세상 사람 됐을 낀데... . 거에 비
하믄 이 정도는 암것도 아니지예."
지민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 잘 있죠, 아드님?"
물리치료사는 두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모예, 잘 큽니더."
지민은 순박해 보이는 물리치료사를 웃음띤 얼굴로 한 번 쳐다보고는 치료실을 나갔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다시 말쑥해진 지민을 태우고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위로 치솟아 올
랐다. 수십미터를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병원 복도는 여전히 분주했다. 의사들이 지나다니고 환자들
도 그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간호사들이 지민을 흘낏거렸다. 환자를 태운 스트레치카
가 수술실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울고 있는 보호자도 보였다.
복도의 정경들과 어우러져 지민의 눈앞에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홉살
난 어린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고 방울소리는 요란했으며 신칼이 신나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진하게 화장한 무녀는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 지민의 어머니였다. 지민을 보고 동네 아
이들이 수군거리며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린 지민은 산 쪽을 쳐다보았다. 지민은
산 속으로 뛰쳐 올라갔다. 풀숲을 헤치고 달렸다. 풀숲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 안에는... 그
안에는... !
지민은 그쯤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외과의 한 수술실에서는 수술복을 입고 마스크와 캡을 쓴 채 눈만을 내놓은 4명의 의
사들과 두 사람의 간호사들이 수술준비에 한창이었다.
수술실의 중앙에는 묵직한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각종 계기판과 전도계 등의 모니터와 함께 혈액 공급과 수술중의 혈액을 걷어 내기 위한 석
션 기계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창하게 보이는 건 환자의 머리맡에 마
치 거미처럼 팔을 뻗치고 있는 대형 현미경이었고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페달을 밟아 조정하
는 묵직한 철제의자도 있었다.
마취과 의사인 표지수와 또 한 사람이 사타구니만 가리고 누워 있는 30대 후반의 여자 환
자의 몸 곳곳에 주사 바늘과 리드(몸에 부착하는 동그란 것)들을 부착시키고 있었다. 숙달
된 손놀림으로 일을 마친 지수가 계기판의 시그널에 이상이 없음을 체크하고 눈길을 돌리자
이 과장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수술실과 유리벽으로 구분지워져 있는 방에서 마스크와
캡을 쓴 채 세면대에서 브러쉬로 손의 마디마디에 약품을 묻혀 가며 씻고 있었다.
그 동안 수술팀 의사들은 빡빡 깍은 머리에다 스크류못이 박힌 원형의 고정핀을 박았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핀이 박혔지만 잘못 박았는데 다시 빼 내자 구멍이 나고 그곳에서 피
가 흘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핀을 막아 스크류나사를 돌렸다.
빠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수가 이 과장 곁으로 다가가 섰다. 그녀는 시원스런 눈매에 야무진 입술을 하고 잇는,
똑똑하면서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가 흘낏 돌아보며 물었다.
"어머니, 잘 계시지?"
"네... 근데 삼촌은 꼭 어려운 수술만 맡으세요?"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렵긴... 주로 지저분한 것만 맡는 거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 과장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강지민 선생이 네 동기지?"
그녀는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네... ."
그는 손을 헹구어 냈다.
"그 친구 학교 때는 좀 어땠니? 아주 똑똑해 보이던데."
"삼촌이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돼서 몰라서 그렇지 원래 유명한 친구예요."
"유명해?"
"입학해서 한번도 일 등을 놓친 적이 없어요. 결국 KMA까지 수석을 해 놓고는 힘들고
돈 안되는 NS를 선택해서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구요."
그는 타월로 손을 닦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너도 공부 잘 했는데 돈 안되는 마취과에 남았잖니?"
그의 말에 지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눈짓을 했고 함께 수술실
로 들어갔다. 그가 양팔을 벌리자 간호사가 수술복을 한 겹 더 입혀 주었다. 그러고 나서
계속 말하고 있는 그에게 장갑을 끼워 주었다.
"너희 어머니가 보스턴으로 전화를 걸었던 거 아니? 네가 상의도 없이 마취과를 선택했
다고... . 넌 오히려 정신과가 더 어울렸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지금 만족해요... ."
그는 소독액이 묻은 솜을 받아 손을 닦아 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왜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과를 선택해서 만족하고 지내는지가... "
지수는 뭔가 마음속을 들키기라도 한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과장은 수술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간호사가 건네주는 메스를 받아 쥐었다. 그
는 메스를 쥔 채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강지민이라는 친구에 대해서 몇 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이따가 내 방으로 좀 오거라."
그녀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뭔가 대꾸를 하려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수술하
는 데 몰입하고 있었다. 이 환자도 최소한 다섯 시간 이상은 수술을 해야 했다.
이 과장의 메스 아래에서 절개된 머리 속이 휜히 드러나고 이어서 긴장한 그가 날카로운
눈을 들어 현미경을 들여다봤다. 그가 핀셋으로 뇌의 구조물 속에서 조심스럽게 혈종을 찾
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환자가 즉사할 수 잇는 뇌 속을 헤집고
다니는 그의 이마에 채 20분도 되지 않아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석명의 방은 한국 신경외과학의 거두답게 수많은 원서들이 온 벽을 뒤덮고 있었고 그
사이 사이에 각종 증명서와 감사패들이 걸려있었다. 특히 하버드 의대에서 수여한 학위 증
서가 들어있는 깔끔한 액자가 눈길을 끌었다. 책상 위에는 척추 뼈와 신경의 분포를 나타
낸 모형 해골이 놓여 있었다.
그는 수술을 마치고 난 뒤라서 피로한 눈을 비볐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 노곤해진 상태
였다. 환자는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수술은 잘된 편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목을 뒤로 젖혔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그는 몸을 일
으켜 자세를 바로잡더니 NS(신경외과 최신 정보 및 연구 저널)를 집어들었다. 그걸 펼쳐
들고 읽으려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지수였다. 이 과장은 눈을 들어 그녀임을 확인하자 잡지를 다시 밀어 두었다.
그녀는 그를 마주 보며 앉았다.
"강 선생이 뭘 잘못했나요?"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게 아니고... ."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의자를 돌려 옆으로 비스듬히 앉았다. 그녀는 궁금한 눈길로 그
를 쳐다보았다.
"... 벌써 세번째야."
그녀는 그의 앞뒤를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번째라뇨?"
그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
그녀는 기적이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저히 살 수 없는 환자를, 그것도 자그마치 세 명이나, 강지민이라는 레지던트 4년차가
응급 수술을 해서 살아났단 말이야. 아마 내가 응급실에 있었더라면 수술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 당연히 하지 않았어야 하니까... ."
"... 기분이 상하셨어요?"
그는 의외의 말에 그녀를 보았다.
"기분이 상하다니?"
"글쎄요, 삼촌은 워낙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까... 감히 삼촌이 손대 볼 엄두도 못 내는 환
자들을 강 선생이 살려 내서 혹... ."
그는 크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지수야,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얼굴에서 웃음을 걷어 내며 정색을
했다.
"이봐, 닥터 표!"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가 사뭇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가 누구냐? 난 신경외과 의사야. 내가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았거나 대한민국에서 최
고로 인정하는 신경외가 의사이거나 하는 문제는 내가 의사이고 난 다음의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녀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사란 직업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잇는 거고 그 목적은 무엇보다 선행
되어야 해! 권위나 자존심은 그 나중 문제야."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넌 어릴 때부터 날 봐 왔으니까 그런 오해도 가능할 거야. 아무튼 강 선생이
환자를 살려 낸 것은 무조건 잘한 거야. 아주 훌륭한 일을 한 거라고. 그런데 말이야... ."
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그를 보고 있던
그녀도 표정도 따라서 변했다.
"특이한 건 모두 만 4세 미만의 어린 환자들인데... 문제는 결과는 있는데 과정이 없다는
거야. 본인의 말대로라면 뇌 속에 고여있는 피를 제거해 주고 혈관을 클립으로 집어 준게
다라는 이야긴데... ."
그녀가 물었다.
"그럼 그것 말고 또 있나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어린 환자들은 주로 뇌간 부위에 출혈이 심했단 말이야. 즉, 숨골 근처란 말인데 거
긴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환자는 바로 사망이야. 너무 위험해서 나도 잘 열지를 않아. 아
니, 어떤 신경외과 의사도 거길 여는 건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고 의사로서의 캐리어에 먹칠
을 할 가능성이 거의 100%라고 생각하지."
닥터 표는 다소 긴장이 되었다.
"... 혹시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요?"
그가 몸을 뒤로 젖혔다.
"운이라... 그것도 가능하지. 그렇지만 그 운도 연두부 같은 뇌를 다루는 인간의 손놀림이
거의 빛의 속도처럼 빠르다면 가능한 이야기지."
그녀는 잔뜩 인상을 썼다. 이 과장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계산으론 그 친구가 환자의 뇌를 오픈한 후에 막상 실제 수술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은
채 5분도 안돼."
그가 말했다.
"제일 빠르다는 내가 보통 5시간 걸려... ."
이 과장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으로 빤
히 쳐다보았다.
그가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제껏 그 친구에게서 이상한 걸 보거나 느낀 적 없니?"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 항상 열심히 하고 환자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크다는 것밖에 몰라요."
"내 생각엔 분명 뭔가가 있는데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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