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도 아카데미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존 포드 감독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19세기
말 웨일스 지방의 한 작은 탄광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제는 늙은 주인공이 수십 년
전을 회상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에서 가족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고,
삶과 죽음과 희망이 병존하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흑백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인간적인 느낌까지 전해준다.
그들 중에서 조연급인 그루프드 목사가 인상적이었다. 잘 생긴 총각인데 커다란 잔에
맥주를 가득 부어서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즐기며 노래도 잘하는 화끈한 성격으로 어느 모임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이 영화에서 목사가 술과 담배를 즐기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서양에서는 개신교 신자가 술 담배를 즐겨도
눈총을 받지 않는데 왜 한국 개신교에서는 음주 흡연을 죄악시하는지 궁금해졌다.
성경에 특별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대목은 있다. 집무 중인 사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고 독주를 탐하는 것은
임금이나 군주에게 어울리지 않고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바쳐져서 평생 신의 일만 할 사람, 즉 삼손이나 다니엘 같은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요즈음 세상에 이런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런데 이들을 제외한 보통 사람들에게 특별히 음주를 금하는 대목을 찾기 어렵지만, “포도주는 좋다. 포도주를 마셔라.”와 같은 성경 구절은 신구약 성경 여기저기에 수없이 나온다. 나보고 이런 표현을 찾으라면 검색 기능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수없이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구절도 적지 않지만, 경계를 금지로 확대하여 해석함은 억지가 아닐까?
공자도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過猶不及]."고 했지만, 과유불급의 이치야 술 마시는 것 말고도 동서고금 어느 경우에든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술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국 개신교 목사처럼 전혀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아니면,
사람들과 어울려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을까?
성경에 쓰인 예수님의 삶에서 술과 관련된 내용은 꽤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세례받고 며칠 후에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술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
최후의 만찬 때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 등이 있다. 그런 걸 보면 예수님은 술을 마셨음이 분명하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비난하며
한 말은 더욱 놀랍다. 예수는 그저 포도주를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음주를
즐기는 자라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태 11,18~19)
터무니 없는 말을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이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먹보와 술꾼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면 예수님은
잔칫집에서 음식 드시기를 즐겨 했으며 주량 또한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님이 참석하신 잔칫집 분위기는 술을 즐기는 신부님이 참석한 가톨릭
신자의 회식 자리처럼 흥겨웠을 거라는 상상을 하는 건 내가 술을 즐기는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일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르 7,15)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입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나쁜 마음으로 말미암은 언행이 그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려고 찾아본
미국 개신교 ‘크리스천 포스트’ 지의 한 기사는 ’개신교도 대부분은
음주는 죄가 아니라고 한다.(Study: Majority of
Protestants Say Alcohol Consumption is Not a Sin.)’ 라는 제목으로 시작된다.
1,004명의 신도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3분의 1 정도의 개신교 목사는 금주를 권하고 많은 목사는 절주가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신도 대다수는 음주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음주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는 왜 음주가 죄가 된다고 가르칠까? 음주로 말미암은 폐해가 극심했던 한국 개화기에 금주를 강하게 권했던 계몽적인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 수도 있지만,
개신교 지도자들은 아직도 음주가 정말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신도에게
죄의식을 갖지 말고 떳떳하게 마시되 절제를 하도록 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어렵게만 느껴지던 나에게 ‘술꾼 예수’는 아주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언젠가
저 세상에 가게 되면 예수님을 모시고 요란스러운 술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내가 죄의식 없이 술 마실 수 있는
가톨릭 신자인 것이 참 다행스럽다.
첫댓글 금속(Metal)은 외부의 강제적인 힘( Stess)를 받을경우 뿌러지는 등 나쁜 영향을 열처리(Heattreatment)를
해서 응력(Strain)을 풀어 재질을 원상회복 시키지 -교과서 이야기
사람도 힘든일,기쁜날을 술로 정신적 긴장을 풀고 즐거움을 나누지만 아무래도 육체적인 건강에는 좋을리
없지 그래도 좋은 것은 벗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술과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힘있는 날까지 마서보자
*Stain(응력):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았을 때 생기는 형태와 부피의 변화
아주 오래전, 영철이가 살아 있을 때 영렬이 집에서 뉴욕 뉴저지 동문들 모임이 있었다. 모두 10명이 모였는데 9명이 개신교 신자, 나만 가톨릭이었다. 술 한 잔 기대를 하고 갔는데 술 냄새도 못 맡았다. 학교 때 친구들 얘기, 쌕쌕이 얘기 등을 정답게 나누려니 했는데 다들 예배당 얘기만 하더라. 집으로 돌아오며 결심했다. 술 한 방울 안 나오는 그런 모임에는 다시는 안 나가겠다고. 그래도 영철이 생존시에는 가끔 모였다. 역시나 술 냄새도 못 맡았다. 돌아 올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했다. "인간이 어떻게 술도 안 마시고 산담." 술 안나오는 모임은 정말 재미가 없다. 지금은 어쩌다 개신교 신자집에 초대 받으면 아예 술을 가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