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백마강 - 이인권
김용호 작사/임근식 작곡
한강과 낙동강과 함께 남한의 3대강이라고 일컬어지는 금강에서 공주로부터 28km
하류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꿈꾸는 백마강”은 이 백마강을 무대로 멸망한 백제에 대한 나그네의 애달픈 심정을
그린 애창가요이다.
이 가요는 정확한 역사성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우나 백제멸망의 향수를 일깨우며
널리 대중을 감동 시켜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이다.
백제 최후의 멸망과 삼천 궁녀를 테마로 한 유행가사는 이 노래 외에도 많이 있지만
이 노래만큼 나그네의 심정에 민족의 애환을 애절하게 담은 것은 없었다.
멸망과 함께 무너진 고도는 어느 시대 어느 묵객에게도 가사의 대상이 되지만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만큼 더 많은 관심과 시선을 집중시킨 곳도 드물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과 낙화암 그리고 삼천궁녀를 주제로 하여 만들어진
노래 가운데 “꿈꾸는 백마강” 만큼이나 백제의 도읍 부여의 정취와 나그네의 회포를
자아내는 노래는 없을 것이다.
꿈꾸는백마강 - 이인권
김용호 작사/임근식 작곡
[대사]
백마강 흘러흘러 700년 역사도 흘러가고 고란사의 종소리는 누가 치기에
꽃 없는 낙화암에 저녁노을 섪기도 하다
무너진 부여성의 그 전설을 안다면은 길손은 "시" 한 수를 읊고 가리라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 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그누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이 인 권
오케 그랜드쇼가 함경도 청진에서 공연 중일 때 무대 뒤로 작업복 차림의 한 청년이
찾아와 이철 사장과 작곡가 박시춘에게 노래 테스트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마침 조용하던 시간이라 두 사람은 흥미를 느끼고 청년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뜻밖에도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을 너무도 분위기를 잘 살려 부르는 것이 아닌가.
당시 오케그랜드쇼는 결핵이 악화된 남인수가 공연에 불참해 풀이 죽어있던 터,
이철은 그 자리에서 청년을 남인수의 대역으로 출연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날 밤 공연에서 임영일은 "청진의 남인수"로 소개되어 큰 박수를 받았고 일행과
함께 서울로 와 정식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영일이 이인권이란 예명을 정식으로 쓰게 된것은 1938년 서울 부민관 공연이었다.
하지만 임영일은 데뷔 초기 오케와 빅터 두 회사에서 동시전속으로 활동하게 되는
혼란을 빚었다.
임영일의 재능을 탐낸 빅터사에서 임영일을 유혹해 빼돌린 것이 혼란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잠시였고 이인권은 오케 전속으로 확정되어 다수의 음반을
취입·발표하였다.
식민지 시절에 발표한 이인권의 대표곡들은 "눈물의 춘정" "향수의 휘파람" 등
많이 있었으나 1940년 11월에 발표한 "꿈꾸는 백마강"(조명암 작사 임근식 작곡) 이
이인권의 위상을 반석 위에 앉힌 대표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작곡가 임근식은 오케레코드사 악단 전속의 피아니스트였고 작사가
조명암은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
유학 중에도 자주 레코드 회사로 가사를 써 보내었고 노래가 히트하면 학비에
큰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멸망한 백제의 비극적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나그네의 시각으로 식민지
체제의 고통과 상실감을 은근히 애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노래는 크게 히트하였고 높은 인기를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에서는 즉각 발매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 "꿈꾸는 백마강"은 광복 이후 또다시 금지가요로 묶이는 불운을 겪었다.
그 까닭은 1965년 방송윤리위원회가 이 노래의 작사자 조명암의 월북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가수 이인권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오케, 빅터, 태평 레코드사 등 3대 제작사를
통해 다수의 가요작품을 취입, 발표하였다.
빅터에서 발매한 음반에는 임영일이란 본명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인권은 가수이면서 동시에 작곡가 작사가 기타연주자 등으로 음악적
재능이 두루 뛰어난 만능 대중 예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