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완전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을 의식하는 못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완전한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은 불완전한 것이 자격을 부여하는 고급 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의견
- 공리주의는 결과를 중시한다. 제 아무리 행동의 동기가 좋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고 그에 따른 결과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대상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사랑의 행위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다. 남을 도와주려는 의도로 한 행위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남는 게 없으니 선행이 아니다 라고 하니 참 무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 나아가 극단적으로 생각해보자. 어느 한 마을에 무서운 병이 돌았다고 가정하자. 근데 그 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각 부위별로 한 곳만 병들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눈, 다른 사람은 코, 입, 또 다른 사람은 팔, 다리 등. 그런데 한 사람만 그 병에 감염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가 정상인 사람의 것을 이식한다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강제로 그 사람을 위협해 죽인 후, 그 사람의 것들을 무사히 자기들 신체에 이식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병에서 완치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민들이 공리주의자라고 보자.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으며 정상인 사람의 것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이 많이 탑승하고 있던 배가 침몰될 상황을 생각해 보자. 배에는 100명이 타고 있었다. 배가 침몰될 상황을 대비하여 만든 보트는 불행이도 99명만 탈 수 있다. 배에 타고 있던 100명은 누구나 할 거 없이 앞 다투어 보트에 탓을 것이다.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정원이 1명 초과하니까 누군가는 빠져야 할 상황이다. 그 보트에는 힘 약한 노인분이 타고 있었다. 여기서 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공리주의자라고 하자. 보트의 정원이 99명인데 100이 탄다면 그들 모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노인을 바다에 던질 것이다. 이렇게 공리주의에 따른다면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것은 바람직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서 과연 이러한 공리주의가 윤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대체적으로 윤리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윤리의 근거를 칸트처럼 인간의 선험이성이 아닌 경험에서 찾는다. 물론 경험에서 찾는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경험 윤리는 자연주의적 윤리이며, 실증적인 윤리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시하는 쾌락이라는 것이 과연 그러한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쾌락은 최소한의 보편성마저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오직 개인적인 쾌락을 가지고 윤리의 잣대로 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그건 안 될 말이다. 나에게는 쾌락이 남에게는 불편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불편하면 남에게는 얼마든지 쾌락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여러 사람에게 비판을 받자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밀이 질적 공리주의를 들고 나오며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프고 불만족스런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쾌락을 양과 질적으로 구분하여 공리주의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빵이 있다고 하자. 어떤 빵은 양이 많을 것이고, 어떤 빵은 약은 적지만 맛이 더 좋은 빵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빵에도 수많은 질적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빵이 양이 많다고 해서 그 빵을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쾌락의 질적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 주의설을 공리주의 사상으로 끌어 들이려 한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밀이 주장하는 것처럼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질적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원리나 규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과연 그의 말대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가서 그래도 당신은 돼지보다 행복하니 더 굶으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몰상식하고 무식한 소리다. 아마 뺨 맞을 테고 말이다. 배부른 돼지의 만족보다 소크라테스의 불만족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나 규칙, 근거는 어디 있는 것인가? 이런 개인적인 쾌락을 배부른 돼지의 것과 질이 좋다는 그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쾌락을 주관적인 생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가 질적인 행동을 통하여 쾌락을 느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쾌락을 절대로 배부른 쾌락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스런 쾌락이라고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질적인 행동을 통해 개중에는 쾌락을 느껴서 배부른 쾌락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 누구나가 다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이 왜 합리화되는지 원리, 규칙, 근거를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공은 共이 아니고 功이다. 영문표기인 UTILITY 란 단어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기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 하며 마치 공익을 우선시하는 주의를 추구하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인가? 실질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또 공리주의에는 이로울 리 자도 있다. 계산되는 이익이 없으면 선행이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자본주의를 옹호한다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는 개인주의를 중시하니 말이다. 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이 곧 자본주의 체제를 적극 옹호하고 합리화시키는 어구라고 생각한다. 밀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유용성이라는 것은 결국 개인의 이익이고 그건 바로 가난한 민중이 아닌 자본가였던 부르주아 계급들은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자에게 개인과 사회 또는 공익을 놓고 선택하라고 할 때, 그들은 공익을 취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택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이익과 결과, 실적은 바로 쾌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윤리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타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참고 목록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이문출판사, 2002
- 이석호, <서양 근 현대 윤리학>, 인간사랑,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