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린 1878-1958 천도교장로/중추원참의/매일신보사 사장
1878년 1월 25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다. 호는 도호는 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운 후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쳐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에서 특파하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1906년 9월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해 조선인유학생단체에서 활동했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다. 1907년에는 광무학회총대와 태극학회 종무원 평의원을 거쳐 1908년 2월 대한학회 회장을, 1909년에는 대한 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년 7월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듬해 10월 천도교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11년 2월 보성중학교 교장직에 취임한 후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등 교육 분야에 종사했다. 1919년 3월 조선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출소했다. 1921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 교육과 주임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그 해 9월부터 1924년까지 종리사를 거쳐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종법사를 지냈다.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제1부 동양화부에 「」을 출품해 입선했다. 같은 해 12월 천도교인의 친목을 위해 조직된 천도교만화회창립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3년부터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점차 활동영역을 사회문화전반으로 넓혔다. 같은 해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발기인,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 1925년 조선체육회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구미21개 국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1929년에 교단 최조직인 에 올랐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단에서 고문직을 역임하면서 1931년 단군신전봉찬회이사에 선임되었고, 1932년 나예방협회 발기인, 193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내면서 제 15회 (1934.4.26.) 제16회(1935.4.26.27) 제18회(1937년)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거나 서면 답신을 통해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했다. 1934년 8월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신생활을 통해 신흥조선을 건설’한다는 취지하에 조직된 시중회결성을 주도해 이사에 선출되었고, 1937년 7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로 선발되어 전주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이리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국민의 자각을 촉구하는’ 강연활동을 수행했다. 같은 해 8월 조선총독부에서 ‘시국인식의 주지 철저를 위해’ 조선인 유력자 20명을 8개 반으로 편성해 전국에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자 이돈화와 함께 제 5반에 편성되어 7일부터 18일까지 평안북도 일대에서 강연할동을 펼쳤다.
1937년 4월말부터 천도교중앙종리원 상임현법사를 지내면서 시국강연과 집필활동을 통해 천도교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1937년 8월과 1938년 2월 천도교인들이 전시체제에 협력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박천 정주 신의주 초산 강꼐 신천 등지에서 강연활동을 했다. 1938년 시무실 석상에서 천도교인들에게 “조직강화 교화통일 신앙의 기도화 도의의 현실화 보국의 신앙화 다섯가지를 기관사무의 표준으로 삼아 만사를 그 표준 밑에서 실행도록 하라”고 지시했으며, 12월 인일기념강화회에서도 “신앙보국주으의 강화, 신동아건설 이상 확지, 총력전의의 체득”을 ‘시국지침’으로 삼아 순회교사들을 대상으로 “제국의 금번 조치는 성전으로 제국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을 것”과 “일사보국을 각오하고 전진하는 제 1선 용사의 그 심정 그 각오로써 실행 정진할 것”을 지시했다.
1937년 8월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해 국운의 융창을 도모하고 국가안태 무운장구의 기원제를 거행하고자 조선인 유지 26명이 발기해 조직한 국위선양기원제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2월 조선인 지원병제가 공포되자 이를 경축하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9월부터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로 열린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 1부 위원(의식주 부문) 에 선임되었다. 1938년 4월 조선총독부 선저기관지인 매일신보사가 주식회사 매일신보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해 1941년 그만둘 때까지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정책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는데 앞정섰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저축장려위원회위원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전시총동원제계하에서 통제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시국대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 심의하고 조선총동의 자문에 응했다.
중일전쟁 이후 전선이 더욱 확대면서 각종 관변기구와 민간단체를 망라해 1938년부터 1939년까지 발기인 이사 상무이사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 열린 전조선유림대회에서 일제의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에 적극협력한다는 취지하에 조선유도연합회가 결성되자 이사와 상임이사에 선임되어 ‘국민총력운동’을 지원하는 강연활동을 수행했다. 같은 해 11월 흑룡회가 주최한 ‘일한합병’30주년 원훈 이용구/송병준.박영효/이완용 등의 추도식에 참석했다. 같은 해 조직된 배영동지회와 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서 상담역으로, 동양지광사 경성과학지식보급회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가 결성되자 고문으로서 징병제도 선전과 지원병 모집에 협력했다. 1940년 “황국민민으로서 봉공의 성의를 다하고 동시에 내지 동포의 상애의 정의를 촉진한다‘는 취지로 중앙협화회가 조직되자 평의원에서 선임되었고, 재만조선인교육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참석한 후 이를 축하하면서 「매일신보」 1940년 2월 11일자와 2월 13일자에 「봉축 황기 이천육백년」을 기고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국토계획위원회 위원에 임명되는 한편, 조선총독부가 국민정신총원조선연맹을 개편해 전시 최대의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을 결성하자 이사와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어 1944년까지 활동했다. 천도교단에서는 상임현법사에 이어 1940년 천도교총부 장로에 올라 1945년까지 재임했다.
1941년 5월 조선총독부 충주원 참의에 다시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한 차례 연임하면서 칙임관 대우로 매년 24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1941년 6월 제22회를 비롯해 1942년 6월 제23회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거나 서면 답신으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했다. 1941년 6월 중추원에서 주관한 부여신궁공사근로봉사에 중추원 참의들과 함께 봉사대로 참여했다. 같은 해 8월 ‘황국시민으로 임전체제 준비’를 목적으로 하는 흥아보국단의 상임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할 때에도 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협의회가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한 후에는 채원 가두판매 종로대로 참여해 ‘애국채권’을 판매했다. 같은 해 9월 ‘임전태세의 정비 강화’를 목적으로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를 통합해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에 선임되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에는 단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조선인 지원병 수련생 1232명의 수료식을 거행하는 제8회 지원병 수료생 장행회에 참석했고,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에서 개최한 ‘징병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강연회’등 각종 징병제 관련 행사에 참석해 조선 청년의 적극적인 지원을 독려했다. 같은 해에 내선일체 운동단체인 회결성 기념 시국강연회에서 강연하고 1942년에 정학회 고문에 추대되어 ‘황도사상’보급에 앞장섰다.
1944년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전쟁 수행에 피요한 노무동원을 위해 국민동원총진회가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조직되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45년 6월 ‘내선일체 구현과 대동아건설 완수’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언론보국회 회장에 선출되어 ‘언론총진력대회’와 백만인 총립의 본토결전부민대회‘등 일체의 황국신민화와 전쟁협력을 선동하는 각종 대회를 주도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을 비록해 각종 단체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국민대회 등에 연사로 참가하는 한편, 여러 편의 글을 신문 잡지에 기고해 내선일체와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했다. 『매일신보』1937년 8월 15자에 발표한 「동양평화의 대정신,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발휘」에서 “현하 시국에서는 거국일치와 내선일체 정신하에 적성을 발휘하는 것이 반도인이 가질 가장 필요한 각오”이므로 “국민적 정신으로서 의무심으로 나아가자”고 독려했다. 『신인간』 1937년 9월호에는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자」는 글을 통해 “지금의 전쟁은 물적 인적의 전적일치 전적동원이 아니면 절대로 안되므로 아직까지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우리 반도 동포들은 총후의 적성, 총후의 활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실행하자”고 촉구했다. 1938년 11월 국민정신작흥주간 제1일 ‘황군감사일’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민정신작흥에 대하여 명복을 기원하고 그들의 유족에게 응분의 원조를 해야 할 것이며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한다.“ (『신인간』1938년 12월호)고 주장하는 한편의 「대동아공영권 수립과 고도국방」에서는 ’기본 국책의 요강‘을 크게 ”⓵ 국책의 근본방침 ⓶ 국방 및 외교방침 ⓷ 국내 체제의 쇄신“ 으로 구분하고 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삼천리』1940년 9월호)각종 징병제 관련 행사에도 적극 참석하고 글을 통해서도 조선청년의 지원병 학도병 참가를 독려했다. 『삼천리』 1940년 7월호에 발표한 「지원병 10만 돌파 지원병 모매에 보내는 글」에서 ”병역의무가 없는 구민은 진정한 국민이 아니라는 한마디를 반도의 여러 모매에게 보내 격려와 감사의 뜻을 전한다.“ 며 가정에서 지원병과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도록 주문했다. 1941년 11월호에 발표한 「」라는 글에서는 ”국가와 시대를 걸머진 청년 제군! 국가의 원동력이 되는 노무봉사에 자기를 바쳐서 국가를 위해 살고 국가를 위해 죽어라!“고 외쳤다. 『매일신보』1942년 5월 10일자에 발표한 「있는 힘을 바치자」에서는 ”우리들 반도민중은 창씨도 했고 기쁜 낯으로 제국 국인이 되어 무엇으로 보나 황국신민이 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연성을 쌓아서 군국의 방패로서 부끄럽지 않은 심신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겠다“ 며 국가에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주문했다. 『매일신보』 1943년 12월 8일자에는 「하다 바도의 앞날 충효일본의 대도로 나가자 열혈 청년들」을 발표해 ”학병이여! 새 역사를 창조하라. 부디 지금까지 간직해 온 정열을 조금도 잃지 말고 끝까지 힘찬 돌진을 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국가 성업의 위대한 주출돌이 되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며 학병지원을 촉구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이 발표한 「이동사령 제29호」에 따라 같은 날짜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같은 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1958년 12월 말 평안북도 선천에서 80세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