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element, 元素"
일정한 원자번호를 갖는 불변의 단순물질로서 다른 물질로 분해되거나 변환 또는 합성될 수 없다; 두개 이상의 원소가 서로 결합하여 화합물을 만들고 무게가 일정한 부분이 결합을 한다.
역사적으로 화학은 불연속물질의 성질과 거동뿐만 아니라 연속적으로 붙어있는 물질도 다루었다[반응]. 화학물질을 설명하는 목록의 기준은, 미시세계의 원자들의 성질들에 기초해서 물질의 덩어리를 만들어 준다거나, 혹은 원소를 포함하여 실재적이거나 가상적인 물체가 수많은 근본물질을 만들어 주거나 모든 거시적인 물질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보았는데 용해성, 연소성, 산성도와 같은 성질들이 여기에 속한다. 19세기 초가 되어서 비로소 미시적-거시적인 화학의 설명은 서로 수렴하게 되었다.
다른 문명권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는 영원성과 단순성이라는 입장에서 자연에서 물질을 이루는 것의 일순간적인 다양성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한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겉으로 보이는 세계(가상의 세계, world of appearance)란, 한개 또는 그 이상의 뿌리인 단순물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고, 즉,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은 이것을 원소라고 명명하였다. 그래서 탈레스(Thales, 기원전 약624-546)는 물이 액체, 기체, 고체상(相, phase)에서의 상태가 동일한 물의 실체라고 인정을 하고 우주의 모든 물질은 물이라는 유일원소로 만들어 졌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여러 철학자들이 단일기본원소들에 대하여 경쟁적으로 주장을 하게 된다. 기원전 5세기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약492-432경)는 우주는 4가지의 서로 질적으로 다른 원소로 구성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흙, 공기, 불 그리고 물이 적당히 섞였다고 하였다. 이것들이 서로 다른 비율과, 분리 및 운동이 인력이라는 사랑의 힘과 반발력이라고 하는 미움의 힘에 의해서 모든 물질이 겉으로 나타난다고(가상) 하였다. 경쟁상대라고 볼 수 있는 데모크리토스(기원전 약460-371년경)의 원자이론과 마찬가지로 엠페도클레스의 해석은 입자철학을 바탕으로 해서 어떠한 변화과정에서도 원소의 불변성 또는 불치환성을 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4원소가 상호변환 한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의 견해는 16세기까지 서양물질관을 지배하였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원소를 물질로서 정의를 하긴 했으나, 원소내부에서는 다른 물질이 분석(검출)될 지도 모른다고 하였고, 원소내부에 현실태적으로나 가능태적으로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뽑아 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소를 상보적 이분법적 실체의 성질인 습함과 건조함(moist-dry) 그리고 뜨거움과 차거움(hot-cold)[아리스토텔레스 물리]으로 설명하였다. 각각의 원소는 그들의 성질중 하나를 교환함으로서 다른 원소로 다음과 같이 변환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원소의 이론은 차후에 연금술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었으며, 의사들이 각각의 원소와 성질을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과 관련을 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광물학에서 모든 광물과 금속은 지구내부에서 건조함과 습함의 혼합에 의해서 생성이 된다는 제안을 해서 그 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아비세나(Avicenna, 980-1037)와 같은 자연철학자나 이스마이트 파(Ismaite sect)의 저술가들은 자비르(Jabir ibnHaiyan, 약8세기 후반)와 관련이 있고, 황과 수은의 2원리설을 건조함과 습함의 혼합과 동일시 하였다. 따라서 광부, 기술자 및 연금술사들에게 알려진 구리, 철, 은, 금과 같은 금속들이 2원리설에 의해서 형성이 되고 조성이 된다고 보았다. 10세기 이후에 그리스와 아랍시대의 저작들이 중세유럽에 알려졌을 때 4원소설과 2원리설 만을 택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빈번히 물질의 해석에 혼란을 가져왔다.
16세기에 의화학자인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는 고체의 염(鹽, salt)을 추가하여 삼원리설을 주장했으나, 삼원리설(Tria Prima)은 4원소와 더불어 그의 후계자인 반 헬몬트(J. B. van Helmont, 1579-1644)에 의해서 실험과 성경의 근거를 이유로 거부되었다. 헬몬트는 신이 우주를 공기와 물로부터 만들었다고 주장하였고, 버드나무의 실험을 통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물이야말로 지구물질의 토대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17세기 중반이 되자 원소설은 혼란에 빠졌다. 보일(R. Boyle, 1627-1691)이 1661년 ‘회의적인 화학자(Sceptical Chymist)’에서 주장하는바에 의하면, 화학자는 1원소, 2원소, 3원소, 4원소 또는 5원소설의 주장에 동의를 할 수 없으며, 동상의 물질을 주장하는 입자철학을 포기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화학자들은 시약과 그 반응을 분류하여 유용한 개념을 찾는데 계속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베허(J. Becher, 1635-1682)와 스탈(G. E. Stahl, 1660-1734)은 5원소설을 바탕으로 공기, 물 그리고 흙의 3등급중의 하나인 프로기스톤설을 주장하여 18세기의 연소이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770년대가 되자 실용적인 화학자들이 친화력에 관심을 보이고 흙, 물, 공기(기체)의 폭넓은 다양성을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라브와지에(A. L. Lavoisier, 1743-1794)는 1787년에 원소를 물질을 조작 할 때 화학반응에 의해서 분해되지 않는 물질로서 정의 하였다.
이런 정의로 1789년 30종의 실질적인 원소표를 작성하였고, 이것은 예전의 형이상학적인 원소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19세기 초에 몇몇 화학자들은 대량의 원소의 존재를 부정하고, 프라우트 가설에 따라서 원소의 수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하였다. 1869년이 되자 전기분해[전기화학]나 분광학의 기술이 출현함에 따라서 60종이상의 원소로 늘어났고, 원자론이 도입됨에 따라서 멘델레프(D. I. Mendeleev, 1834-1907)는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서 주기적으로 분류하고, 원소를 원자량별로 정의 하였다. 예를 들면 염소의 원자량은 35.5로 정하였다. 멘델레프는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원소도 주기율표에 빈칸으로 남겨놓았다 - 1940년대 이후 시보그(G. T. Seaborg, 1912-미상)와 다른 학자들이 우라늄보다 원자량이 큰 원소인 악티늄원소를 기술할 때 비슷한 개념이 적용되었고, 인공적인 핵 합성으로 만들어졌다.
1913년에 소디(F. Soddy, 1877-1956)가 동위원소를 발견함에 따라서 원자량이나 질량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방식보다는 원자번호로 원소를 재정의 하게 되었다[주기율]. - 과학사사전 -
원소의 생성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네이버TV
http://naver.me/F30O9Eh2
'EBS[과학탐구]화학 - 수소 원자의 선 스펙트럼 어떻게 되나요' 보기
https://youtu.be/9e7B_T_dV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