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이런 얘기 살면서 처음 해봐요. 친구들끼리요? 서로 궁금해하지도 않아요. 누가 어떤 여자랑 바람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했냐고 얘기해도 이런 얘기는 안하죠.
- 이렇게 결혼이나 인생에 대한 얘길 안하지. 진지하게 누가 캐묻지도 않고. 살면서 처음 해보는 얘기야.
- 20대엔 늘 여자이야기죠. 여자 친구가 속썩인다, 여자친구와 싸웠다 그런 얘기요. 근데 40이 넘으니까 진짜 할 얘기가 없어요.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란 말이 있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다신 안한다며 반색하는 결혼이지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에 대한 꿈을 놓지 못한다. 서로 가보지 않은 길이어서 갖는 동경일 수도 있다.
이렇게 결혼만큼 논쟁거리로 적당한 주제도 없지 싶다. 그래서 결혼을 한 중년남자들과 결혼하지 않은 중년남자들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살면서 처음 해본다는 결혼과 인생이야기, 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어쩌다 마주치진 않았지만
익숙했던 그녀와 결혼하기까지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강렬하다. 물론 모든 사랑은 운명적인 뭔가가 있어야 시작된다. 그렇다면 결혼은 그런 운명적인 누군가와 하는걸까? 부부의 연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처럼 첫 눈에 ‘저 여자와 결혼해야겠다’를 느꼈다는 건 아마 영화 속 결혼이야기에만 해당되는가 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결혼이야기엔 '운명처럼 다가온 그녀'는 없었다. 결혼할 때가 되어 그녀를 만난건지, 그녀를 만나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생긴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
결혼 15년 차를 넘어서는 그들이다 보니 모진 세월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십여 년 전 그날의 운명같은 전기충격을 잊어버린 탓이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그게 아니라 정말 그냥 어쩌다보니, 혹은 때가 되서 결혼하게 되었더라는 얘기를 전해줬다.
- 성당 친구였어요. 그냥 얼굴만 알고 지내다가 동생 소개로 1년 연애하고 어찌어찌하다가 결혼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긴데 아내가 그 당시 남편감을 찾게 해달라고 백일기도 드렸었는데 절 만난거죠. 그래서 이건 인연이다 생각했대요. 그때가 서른이었는데 아내가 동갑이라 서둘러서 결혼하게 됐어요.
- 오랜 시간 대학친구였는데 어느 순간 서로 여자, 남자로 보게 된거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혼하고 난 바로 군대를 갔고 아내는 직장을 다녔고 아이도 없었으니 재밌었지 뭐. 휴가 나와서 연애하듯 그렇게 신혼을 보냈어. 결혼에 대한 무게감이 사실 결혼 초엔 없었어.
-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어. 한 눈에 반한 건 아니고 연애를 해야지 뭐 그런 생각도 크게 없었어. 정말 흐름대로 아무 고민없이 결혼한 것 같아 그때.
어쩌다 마주치진 않았지만 익숙했던 그녀는 어느새 결혼식장에서 그의 팔을 잡고 나란히 서 있었더랬다. 어디가 딱히 좋았는지는 없었지만 그와 그녀는 백년해로의 출발선에 서있더란다.
이슬만 먹을 것 같았던 그녀,
매일 아침 어제 본 그 모습으로
아침을 열어 줄 것 같았던 그녀는 어디에?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결혼 후 그들은 전혀 몰랐던 그녀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쩌면 살아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녀의 모습이었을 거다.
- 나는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데 아내는 아니야. 그것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싸웠어. 다 갖다버리라고 던지고 싸우고 그랬던 적도 있었으니까. 근데 한 16년 살다 보니까 내가 치우기도 하지만 포기하고 살아. 내 팔자려니 하고. 살아 온 환경이라 이해하고 인정해야지 아니면 끝인 거잖아.
- 아내가 저한테 집착이 심했어요. 예전에 부부클리닉에서 상담을 받았는데 아내의 결혼사고관이 집착이 심한 편으로 나왔어요. 내가 누구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성격도 아닌데 절 자기 울타리안에 가두려 하더라구요. 근데 어느 때부턴가 아내가 절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아내가 노력을 많이 한거죠. 아내가 절 편하게 해주니까 저도 얘기가 좋게 나가게 되더라구요.
이슬만 먹을 것 같았던 그녀, 매일 아침 어제 본 그 모습으로 아침을 열어 줄 것 같았던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원초적인 그녀들로 변신한다. 연애 때는 절대 보이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결혼 생활에선 왜 그렇게 잘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수 년간 갈등과 조정기를 거치면서 그들은 꽤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은 것 같다.
- 내가 정리정돈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편이야. 출장갔다 집에 오면 청소하고 화장실 소독하고 하니까. 처음에는 아내가 싫어했지. 자기도 하는데 매번 내가 그러니 좋겠어? 근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니까 당신이 해라.’ 그러는 거지.
- 결혼 초에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갈등이 심했어요. 그것 때문에 이혼서류에 도장도 많이 찍었어요. 그 땐 부모님께 그러는 아내가 이해가 안됐거든요. 아내가 이상한 사람 같았어요. 부모님도 늘 이상한 며느리가 들어왔다고 하셨구요. 그런데 내 부모라도 잘못된 면이 있을 수 있구나를 알았어요. 지금은 아내와 어머니가 서로 안보고 살아요. 일이 있거나 명절엔 제가 애를 데리고 가고 최대한 두 사람을 안 부딪치게 하는거죠. 전 일단 제 가정이 우선이라고 봐요. 부모님껜 제가 할 최선은 하구요. 앞으로 좋아지면 다행이지만 아니어도 어쩔 수 없구요.
- 아내와 요즘은 거의 안 싸워. 지금 싸우면 심각한 싸움이 되니까. 또 싸워도 내가 먼저 화해하는 편이야. 어차피 화해할건데 누가 먼저 하는게 중요하진 않으니까. 가끔 아내는 자기가 먼저 화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지금은 청소, 설거지, 빨래널고 개기 그런건 내가 해.
사랑 하나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지만
결혼 생활은 99%가 책임과 의무였다
서로의 다른 모습은 그 사람이 달려져가 아니라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그들의 생각은 나의 아버지 세대에선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하긴 주말엔 아내 모임가라고 무조건 아이들을 돌보느라 주말 약속은 불가하다는 남자동창의 이야기에 그 친구를 다시 봤던 기억이 있다. 각종 음식들을 해서 가족에게 먹이는 즐거움을 올려놓은 SNS를 보며 충격을 받은 적도 많다. 세상은 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엔 40대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아내와의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아내의 개인생활 역시 존중한다고 했다.
- “오늘 뭐했어?”, “잘 지냈어?” 그렇게 물어봐 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관심가져 주는 거 그리고 공감해 주는 거. 아내하고 대화 많이 하지. 하지만 아내나 나나 대화 자체에 그렇게 크게 중요성을 두지는 않아.
- 전 아내의 외출에 전혀 얘기하지 않아요. 아내가 집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올때까지 전화도 안 해요. 새벽에 들어와도 전 먼저 자요.
중년에 들어선 그들의 인생의 목표엔 가족이 있다. 결혼식장에서 아내가 팔짱을 끼는 순간 엄청난 무게감과 책임감을 느꼈다는 그들은 ‘함부로 내 맘대로 하고 살 수 만은 없는’ 삶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 30대 중반까진 정말 하고 싶은 거, 이루고 싶은 게 많았어요. 더 나일 먹으니까 가족 잘 건사하는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더라구요. 내 꿈만 쫓아가며 살 순 없잖아요. 나만 바라보는 애들이 있으니까요.
- 내가 사업을 해서 생긴 문제가 컸어. 그걸 해결하기위해 내가 지금 너무 바빠. 중년의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어 나는. 막내가 대학 졸업하면 내가 67세야. 졸업할 때까진 내가 도와야 하잖아. 지금은 열심히 해서 가족에게 해주고 싶은 거 해주는 게 목표야. 그래서 솔직히 너무 바빠.
- 인생의 목표가 잘 죽는거야. 내 가족들 잘 지내게 해놓고 내 일 잘 마무리하고 그렇게 내가 그린 그림대로 모든 것을 잘 해놓고 죽는 거.
사랑 하나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지만 결혼 생활은 99%가 책임과 의무란 말이 실감나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래도 결혼을 하고 싶을까? 다시 태어난대도 또 이 여자와 살고 싶을까? 현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우문인줄 알면서도 이 질문들은 늘 기대되고 답변을 들을 때마다 한바탕 웃게 된다.
- 그래도 결혼은 한번은 할만한 것 같아. 결혼 두 번은 못하고. 가정 이루고 아니 낳고 사는 게 사는 모습이구나 싶고.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니니까. 근데 내가 지금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결혼에 대한 생각은 반반이야. 다시 결혼하면 지금 아내랑은 안하지. 살아봤잖아. 안살아본 여자와 살고 싶어. 나를 위해 헌신하고 날 이해해주고 현명하고 예뻤으면 좋겠어. 예쁜 여자랑 살아보고 싶어.
- 결혼은 하는게 좋은 거 같아요. 대신 빨리 하진 않을거 같구요. 좀 준비도 하고 기반도 마련하고 해서 하고 싶죠. 가족없이 살 자신은 없어요. 가족이 그래도 내 편이고 내가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가정이니까요. 다시 결혼하면 다른 여자와 해야죠. 가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은 도전정신? 똑같은 삶을 살 필요는 없잖아요.
- 난 결혼은 할 것 같아. 혼자는 절대 살진 않을 것 같아. 다시 결혼한대도 이 여자랑 할거야. 다시 이 여자와 할거냐는건 다시 이 여자를 만난다는 얘긴데 다른 여자와 선택하라면 이 여자가 낫고 좋기때문이니까. 만약 결혼을 다시 할 수 있다면, 이혼이 아니라 늙어서 나 혼자 되면 그땐 다시 해보고 싶지. 혼자있고 싶지는 않고.
솔직히 많이 외롭죠. 딱히 문제는 없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없는. 그냥 무의미한 하루가 지나가요
인생의 가장 바쁜 중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들은 가족을 지키며 사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 보였다. 이전 세대와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는 그들이지만 힘들어도 자식들보며 살았던 부모 세대의 모습도 동시에 갖고 있다. 살아온 삶을 돌아보기엔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 많은 그들에게 결혼은 쉬어갈 안식처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생각처럼 중년의 그들은 절망적이지도 외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란 안도감을 느낄 때 쯤 나온 그들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전체 이야기의 1%도 되지 않는 이 이야기들은 핵심이 아닐 수도 있고 지나가는 얘기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꼭 그들은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에서야 지나치듯 이야기 하나씩을 던져줬다.
- 솔직히 많이 외롭죠. 아내와 딱히 문제는 없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없는. 그냥 무의미한 하루가 지나가요. 주말에 제가 좋아하는 야구할 때가 제일 즐거워요. 거기 오는 친구들도 야구하는 날만 기다려요.
- 난 결혼제도를 부정해. 별로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아.
- 주변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딱히 행복하게 사는 사람 못 봤어
- 지금 나의 삶의 만족도를 5로 본다면 1이야. 난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지. 하고 싶은 거 하고 가고 싶은 데 가고 해 주고 싶은 거 해주고
- 그냥 살아요.
이숙정 객원기자
첫댓글 부부는 전생에 원한이 있던 사람끼리 만난다고 합니다.ㅋㅋ
그래도 없는것보다는 낫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