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부터 사흘간 진행되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 대통령의 당선 여부는 더 이상 기사 가치가 없다. 투표율과 그의 득표율 정도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 뿐이다.
정작 러시아 대선이 사흘간 치러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데다가 점령 지역(우크라이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자포로제주, 헤르손주)에서도 투표가 실시되는 탓이다. 모스크바 등 일부 지역에서는 전자투표도 도입됐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유권자 수가 러시아 국민 약 1억1,230만명과 해외 거주 러시아인 약 190만명이다. 대선 후보는 푸틴 대통령(무소속)외에 레오니트 슬루츠키(56·자유민주당), 블라디슬라프 다반코프(40·새로운 사람들), 니콜라이 하리토노프(76·공산당) 등 3명이 더 있다. 역대 공산당 후보가 주요 경쟁자로 꼽혔지만, 2004년에 이어 두번째 대권에 도전하는 하리토노프 후보는 푸틴 대통령의 '특수 군사작전'을 지지하고 있어 일단 차별화에는 실패한 상태다.
러시아 투표소 모습/오픈 소스
러시아 민간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무려 86%에 달했다. 그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그는 옐친 대통령의 전격 사임으로 크렘린에 입성한 뒤 2000년 첫 대선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번의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변이 없는 한 2030년 대선에도 그는 출마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99년 옐친 대통령이 자신을 후계자(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을 때, 처음에는 정지경제적, 역사적 맥락에서, 또 험난한 국내 상황을 들어 거부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관심을 끄는 것은, 대선을 앞두고 러시아 전역을 향해 연일 계속되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과 국경 침범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북풍'이다. '우크라이나판 북풍'이 투표율을 얼마나 끌어내리고, 그의 득표율에 영향을 줄 지 궁금하다.
또 하나의 변수는 수감중에 돌연사한 알렉세이 나발니의 후폭풍이다. 그의 부인 율리야 나발나야는 최근 “이번 대선은 말도 안되는, '짜고 치는' 선거”라며 “마지막 날(17일) 투표소에서 투표 용지를 훼손하거나, 나발니의 이름을 적는 방식으로 저항하자”고 촉구했다. 나발니 지지자들이 율리야의 호소에 어느 정도 호응할 것인지가 관심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12, 13일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보로네시, 로스토프, 니즈니노브고로드, 벨고로드 등 러시아 전역을 향해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 전역의 유류 저장소와 대형 정유소 등이 주요 타킷이었다.
또 친우크라이나 '자유러시아군단'(FRL)과 '러시아자원병군단'(RVC), '시베리아대대' 등이 우크라이나군과 함께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13일에도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이 전방위로 이어졌다.
스트라나.ua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를 공격한 드론은 대부분 '항공기형 드론'이다. 소위 '자살폭탄용 드론'보다는 크기가 작고 폭탄 적재량도 적다. 하지만 러시아 대공 방어망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또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빠르게 생산이 가능하다. 인화물질이 모여 있는 유류 저장고나 정유소를 타킷으로 삼으면 의외로 공격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군사 기지에 배치된 항공 전력에도 타격을 줄 정도는 된다.
우크라이나의 전방위 드론 공격으로 불타는 러시아 에너지 시설/캡처
그렇다고, 드론 공격이 러시아에 치명적이라고 할 수는 않다. 우크라이나가 지난 2년간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대대적인 공습에 시달렸지만, '완전히 죽을 지경'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닌 러시아는 몇 군데 에너지 관련 시설들이 파괴된다고 해도, 큰 지장은 없다고 봐야 한다.
반면, 드론 생산 부문에서 앞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 수법을 베껴 '항공기형 소형 드론'을 대량으로 만들어 한꺼번에 날려보내면, 우크라이나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공중전과는 달리 지상에서는 러시아 국경도시 벨고로드와 쿠르스크 지역으로 침투하는 우크라이나 특유의 게릴라 작전이 전개됐다. 지난해 5~6월과 비슷한 방식이다. 당시, 국경지역 습격은 거의 단발성으로 끝나고 곧 흐지부지됐다.
스트라나.ua는 이번 침투 작전의 효과는 지난해보다도 더 미미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무장세력이 쿠르스크 지역의 국경 마을 '테트키노'를 장악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좀 있다고 본다. 특히 러시아측이 공개한 영상을 보면,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던 이들의 탱크가 곧바로 파괴되고, 러시아 영토를 점령한 증거로 올린 영상도 '우크라이나에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게 이 매체의 지적이다.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 마을을 점령했다는 친우크라 민병대가 올린 사진들/사진출처:스트라나.ua
국경검문소를 통과하던 우크라이나 무장세력의 탱크가 불타는 장면/영상 캡처
타스 통신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12일 국경수비대가 군 병력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 측의 국경 침투 시도를 막았다고 발표했다. 또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러시아군이 무장 병력 100명을 사살하고 탱크 6대와 장갑차 20대, 자주포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이들의 국경 침투가 대선을 앞두고 '전쟁 승리'를 주장하는 푸틴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도 13일 “그들의 주요 목표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방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부 주민들의 투표 의지를 떨어뜨리고자 하는 것”이라며 "불리한 전황을 숨기려는 '심리전'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NYT나 푸틴 대통령의 평가대로, 이런 공격은 우크라이나 사회의 사기를 높이고, 서방 측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주로 미 CIA와 협력 관계를 구축한 우크라이나 보안국(SBU)과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에 의해 주도된다.
이들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전쟁이 바로 눈 앞에 와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공포감과 불안감을 조성하는 게 1차 목표다. 1년 전만 해도 그같은 정보전은, 러시아의 강경파 군사 인플루언스 기르킨-스트렐로프와 군사 용병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 등에 의해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기르킨-스트렐로프는 이제 감옥에 가 있고, 프리고진은 죽고 없다. 기대할 효과도 별로 크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러시아 당국이 대선 후 국경 침범을 새로운 동원령 발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게 스트라나.ua의 전망이다. 대선을 앞둔 우크라이나 측의 무모한 도발을 러시아인들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쪽으로 유도해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끝내버리자'는 사회 분위기로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푸틴 대통령이 대선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동원령 발령으로 몰고갈 것인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