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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묵상글 ( 사순 제3주일. -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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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얘기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이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잡놈들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성당에 무엇이 많은 것이 싫습니다.
성상이나 성화같은 예술품이 많은 것도 싫습니다.
그것들이 제가 하느님 만나는 것에 도움을 주면 좋겠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이 제게는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당을 간 분들에게 이런 심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예술품을 보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꼭 거기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이런 도발적인 말은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정말 성화나 성상의 도움받는 분들에게도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상은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아니라 성상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방해받는 사람에게는
그저 예술품이거나 심지어 우상일 뿐일 겁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성전에서 잡다한 것과 잡놈들을 다 치워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아주 과격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위선자들을 말로 세게 질타하신 적이 있으셔도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만 했나 봅니다.
말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셨는데 말로는 안 됐나 봅니다.
그들의 돈 줄 그래서 그들이 결코 놓을 수 없고 그래서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그래서 치워버리라고 말로 해서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 과격하게 치워버리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폭삭 잃은 것도,
실은 내가 주님 대신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치워버리신 것들일 겁니다.
아무튼 이 정화사건 때문에 주님께 죽음이 닥쳐옵니다.
저라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내 모든 것을 뺏어 간 주님을 그냥 놔두고 싶겠습니까?
당대 기득권자들도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런 주님을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고,
이에 주님께서는“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전을 허물다가 당신 몸이 허물어지십니다.
아니, 당신 몸을 허물어서라도 성전을 허물려고 하신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로마의 침략으로 결국 파괴되고 맙니다.
이제 우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도 허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 몸인 성전을 허무셨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치우라는 명령을 실행치 않으면
우리도 우리 몸인 성전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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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달 학생 복사단 회식이 있었습니다. 고3이 되는 학생들이 복사를 졸업하고 마지막으로 후배 복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메뉴는 자장면과 짬뽕이었지요. 그런데 한 친구가 너무 조심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은 급하게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에게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먹어?”라고 물으니, “흰색 티셔츠를 입었거든요.”라고 답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빨래해 주시잖아. 더러워지면 빨래하면 되니까, 음식이 흰색 티셔츠에 조금 묻으면 어때?”라고 하니, 아이는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보기 싫잖아요.”
묵상 중에 이 아이의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음식 묻으면 빨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음식 묻은 옷을 입고서 돌아다닐 자기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우리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죄를 더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이 죄를 짓는 내 모습이 과연 예쁠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보기 싫은 모습이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너무 쉽게 죄에 무감각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쓸데없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너무 화가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나셨을까요? 이 성전 안에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씻기 위해 희생 제물을 봉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과 소, 비둘기 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봉헌물을 판매하면서 누군가는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그 돈을 낼 수가 없어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이런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곳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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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두 웃고 있을 때 우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 외로운 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함께 사는 일일 거예요(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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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오늘은 사순 제3 주일입니다. 3월의 첫 주일입니다. 이제 봄이 오려나봅니다. 우리 영혼의 봄도 피어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멀지 않아 부활로 피어오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면서 살아가야 할 계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하느님의 힘과 지혜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지어지는 새 성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느님, 저희 마음이 주님의 계명을 따르게 하시고,
저희가 십자가의 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주님 사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또 환전상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요한 2,15)
거룩한 성전이 형식적 예배와 인간의 탐욕으로 부패되고,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 함은 곧 당신께서 처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권한을 가지셨음을 나타내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 2,18) 하고,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무시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새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먼저 당신의 몸이 허물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 성전의 숨겨진 신령한 의미가 드러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상징이었던 성전을 파기하고 온전한 “새 성전”이 드러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이 세워질 참된 성전, “새 성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건물로써 신축될 ‘성전’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워질 “새 성전”, 곧 부활로 세워지는 참 성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로운 사순시기에, “헌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지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말씀의 끈으로 만드신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편리와 이기를 채우기 위한 가축들과 돈을 쏟아버리고, 그릇된 마음의 “탁자”들을 뒤엎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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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만든 한 주간을 감사하며 또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성전 정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습니다”(요한2,1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셨을까요?
이스라엘 성인 남성들은 해마다 성전세로 유다 돈, 반세켈을 내야 했으므로 이방인 지역에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제물용 짐승을 팔고 돈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잇속에 눈이 어두워 상인들과 제사장이 결탁하여 이윤을 챙기는 부정과 비리가 생겼고 이권 다툼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경배의 본질적인 의미가 왜곡된 모습에 경고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성전의 기능은 주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보다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길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집안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아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앞날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당신의 몸을 십자가상 제물로 바치시고 부활하심으로 짐승을 잡아 바치는 구약의 제사를 새롭게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안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는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게 되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의 몸은 분명 성전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적개심,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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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Failure is a part of life. If you don’t fail, you don’t learn. If you don’t learn, you will never change.(실패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당신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배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울 수 없다면 당신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에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패와 좌절은 제 삶의 새로운 변곡점이 되곤 했습니다. 33년 전에 저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처음 본당으로 가서 보좌신부로 지내는 중에 ‘유행성 출혈열’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었고, 당시 교구장이셨던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병원엘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병원에서 입원하고, 퇴원할 때까지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에 저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저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늘 새롭습니다.
30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미국에서 사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그래야 했습니다. 저는 매일 송별식을 한다고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께서는 미국으로 가는 것을 취소하였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을 주교님께 전한 사람에 대해서 원망의 마음도 생겼습니다. 돌아보면 주교님의 따끔한 질책이 제게는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술에 대한 절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자리가 있어도 10시 전에는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산보하고, 책을 읽으니 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습관을 하나 가지면, 그 습관이 나를 변화 시켜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25년 전에 주교님께서는 제게 적성성당으로 갈 수 있는지 저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고 본당신부로 잘 지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은 땅은 넓었지만 교우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 나오는 교우는 10명 미만이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도 100명 미만이었습니다. 당연히 주일헌금도 적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3년을 지냈습니다. 33년에 3년이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저는 그곳에서 행복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농산물 직거래도 하였고, 서울에서 오는 학생들의 농촌봉사 활동도 받았습니다. 차가 없어서 성당에 못 나오는 분들을 위해서 차량 봉사단을 만들었습니다. 4대의 봉고차가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모셔왔습니다. 여름에는 전 신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큰 본당에 있는 동창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혈압도 있었는데 적성성당에 있으면서 모두 좋아졌습니다. 저의 건강을 위해서 배려해 주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머무시는 감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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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시골에서 자란 저는 지금까지 장날의 풍경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온 동네 가득한 맛있는 음식 냄새,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와 사는 아주머니의 흥정 소리, 그리고 뻥튀기 아저씨의 ‘뻥이요!’라고 외치는 소리….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제가 기억하는 이런 시끌벅적한 시장이 성전 안에 펼쳐져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서시어 둘러보신 다음 성전 한쪽에서 새끼를 꽈서 채찍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채찍을 들어 양과 소와 내쫓고 비둘기를 날리시고, 환전상의 상을 엎으시며 힘차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내쫓고 둘러엎고 날려 보낸 것은 양도, 소도, 비둘기도 아닌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욕심을 성전에서 쫓은 것입니다.
화장실 안에 자주 사용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 따라 화장실의 청결 상태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화장실 이야기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소와 양과 비둘기를 몰아내며 회복하고자 하신 ‘아버지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모셔야 할 ‘몸과 영’에 돈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청소하시고자 하셨던 것은 벽돌과 황금으로 만든 성전만이 아니라 오히려 살과 피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순 제3주일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거처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닮은 것이 아닌 주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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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돌아감)
운전하다 보면 유턴할 일이 생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턴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우리 삶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턴해야 할 때가 옵니다.
되돌아가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유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유턴해야 할 때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깨닫고 돌아가거나,
운명이 나를 돌아가게 합니다.
둘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턴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돌아간다고 해서 꼭 잃어버리거나 손해 보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감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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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내 영혼 속의 주님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오염은 물리적 환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적 도덕적, 종교적 오염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물리적 오염으로부터의 정화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산 짐승을 잡아 제단에 올리고 태웠기에 성전은 언제나 동물 태우는 냄새와 제물로 바칠 짐승들로 시장판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 우시장이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더럽고 경악할 일이겠습니까? 유다인들 스스로 “거룩한 성전”이라고 칭하는 그곳이 더럽혀지고 있는 것을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그러운 성전을 짓밟고 있는 사람들과 소, 양, 비둘기들을 모두 쫓아내고 정화시키셨습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청산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짐승들을 성전에 들여온다고 하지만 사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고 사제들 또한 거룩한 성전이 짐승의 오물로 더럽혀지고 난전이 되는 것을 방관하는 공조자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들이 성전과 하느님을 이용하는 폐악을 정화시키셨습니다.
믿음의 정화
물질과 함께 그릇된 믿음이 정화가 필요합니다. 당시 믿음은 희생 제물의 무게만큼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그릇된 믿음을 바꿔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이사야 1,11)
가장 아름다운 봉헌은 다윗과 같은 겸손한 태도로 나의 부족한 모습 그대로 주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께 무엇을 감추고 무엇으로 나를 포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 51,19)
주님의 성전은 바로 나의 마음과 영혼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는 주님께서 머무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전을 만들고, 깨끗이 유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돈과 물질, 성소를 오염시키는 욕망을 버리고 망가지고 있는 육체를 치유해야합니다. 탐욕과 불의로 가득 찬 영혼을 정결히하고 오만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영혼을 정화해야 합니다.
나의 몸과 마음은 고귀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다른 사람 모두를 존중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결히하여 주님이 계시기에 합당한 성전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내 마음 속의 성전은 주님이 계시기에 합당한 성전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다른 사람의 성전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3. 주님이 계시기에 합당한 성전이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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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성전사랑, 계명준수, 지혜추구-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신자가, 수도자가, 사제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일은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신자라면 참된사람이겠고 이또한 평생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사람되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신자이자 참사람의 모범입니다. 하루하루 100%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교황님보다 부지런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어제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좋으실대로(please)’ 그리고 ‘감사합니다(thank you).’두 말마디입니다.”
어린이들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평범하나 친절한 말마디가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용기의 덕을 요구한다.”
교황청 사법의 해를 맞이하여 교황청 법조인들 알현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교황님과 함께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음에 감사한다.”
교황님 알현후 하신 독일의 수상이자 사회민주당 정치가인 올라흐(Olaf)의 말입니다. 또 교황님은 사별가족들과의 접견중에는 이들이 기도중에 위로를 발견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이 참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공자
아주 예전 변호사 사무소를 찾았을 때 벽에 걸려있던 액자 안에 ‘공선사후(私先公後)’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변호사의 좌우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요즘 공천파동중 회자되는 말마디가 ‘선당후사(先黨後私)’입니다. 모두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우선시하는 분별의 지혜를, 참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참신자와 참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병원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던중 1회용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탔을 때 녹지 않아 웬일인가 당황했는데 무심코 찬물 꼭지를 눌렀던 것입니다. 좀 멀리서 노모와 함께 기다리던 젊은 자매가 급히 오더니 조용히 다시 다른 컵 따뜻한 물에 믹스커피를 타주고 앞서의 커피를 내다 버리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얼마나 고맙던지 그 친절한 배려에 제가 미혼의 젊은 사람이었다면 프로포즈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친절한 배려의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자 참신자의 모범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온 인류에게 미사라는 참좋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남기셨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참으로 잘 떠남의 모범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잘 떠나는 참된신자로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첫째,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사랑은 성전정화로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은 주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환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의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꾼들을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알아 챘기에 저절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는 성경 말씀을 연상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인 거룩한 성전이 속화(俗化)된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마침내 당신 몸이 영원한 성전이 될 날을 내다보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성전에 머뭄으로 이미 그 혜택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건물의 성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공동체가,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니 성전정화의 개념은 참 넓습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자 성전정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보이는 성전정화는 물론 공동체 성전의 정화로, 그리고 극기, 절제, 선행, 단식, 기도, 자선 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 성전정화로 드러나야 함을 봅니다.
둘째,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함과 동시의 하느님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십계명은 물론 주님의 계명은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 역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명준수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사랑 선물인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공동체에 적용되는 참신자는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자세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십계명입니다. 무엇보다 십계명을 포괄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경천애인과 황금률, 그리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중 진복팔단의 실천에 까지 이른다면 말그대로 금상첨화, 사랑의 완성이자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지혜요, 지혜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은총의 선물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새벽 독서기도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과 아침기도시 성경소구도 은혜롭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고,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나는 지혜가 주는 재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세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3-14)
하느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혜가 좋아서 교회학자임임을 깨닫습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지혜의 결정체가, 하느님의 지혜가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혜로움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1.한결같은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2.한결같은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3.한결같은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신자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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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집 그대 사람아>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착함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사랑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정의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평화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진실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함께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품음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베풂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섬김이거라
사람아 그대는
하느님의 집이니
오로지 살림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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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 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 성전의 정화는 우리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어떻게 정화해야 하는지 묵상케 해 줍니다.
영혼을 정화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가책입니다. 양심안에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심은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악을 피하도록 하는 신앙의 나침반과 같은 하느님의 법이며 인간 마음의 귀에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사이기도 합니다. 이 양심이 살아 있을 때
인간의 성전인 영혼안에 참된 인간성이 회복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자리하게 됩니다.
신앙이 성숙되는 과정, 즉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첫 출발점인 영혼을 정화시키는 이 양심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을 정화시키는 이 양심성찰은 죄와 악의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감지하게 해 줍니다. 바로 이 양심은 죄악의 뿌리를 바라보게 하여 영혼을 정화시켜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도록 인도해 줍니다. 성인들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과정에서 양심성찰을 통해서 자신안에 자리한 죄악의 뿌리를 바라보았는데 3가지 요소를 주요원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만과 탐욕과 악의입니다.
첫번째 태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켰는지 자신의 시간을 선용하였는지 올바른 목적을 두고 행동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기도와 영적독서와 선행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태만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태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민첩함이 필요합니다. 민첩함은 모든 나태를 떨쳐 버리는 정신적 활기이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데 조심스럽고 신뢰심 있고 경계심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해줍니다. 다른 모든 덕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첩함입니다.
두번째로 탐욕에 대해서 자신안에 감관이나 호기심이나 또는 세속적 허영에서 비롯된 무절제한 욕망이 살아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음식과 옷 등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나 칭찬과 명예 등에 집착하는 헛된 욕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금욕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금욕은 모든 욕망을 억제하는 일종의 정신적 엄격함이며 고난과 가난, 비천함을 사랑하도록 영혼을 준비시켜 줍니다.
마지막으로 악의에 관해서 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약하게 만드는 분노나 질투심이나 신랄함이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머물러 왔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는 생각, 상징, 말 또는 마음안에, 얼굴과 목소리에 나타나며 또한 감정과 표현과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질투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웃의 성공에 대해 시기하고 이웃의 불행에 기뻐하게 하며 다른이의 비참한 처지에 무관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신랄함에서 사악한 의심, 불경스런 생각, 사악한 비방이 생겨납니다.
이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자비로움이 필요합니다. 자비로움은 모든 악을 끊어 버리는 정신적 경향을 말하며 친절과 관용, 내적 기쁨과 평화를 누리도록 영혼을 준비시켜 줍니다.
우리의 성전인 영혼을 정화시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신앙 여정 걸으시길 바랍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브와-시뇰-이삭에서 피흘리는 성체
벨기에-1405년
1405년 니벨레(Nivelles) 근방의 브와-시뇰-이삭(Bois- Seigneur-Isaac) 마을에서 성체가 피를 흘린 기적은 전유럽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었다. 이 기적은 요한 폰 홀덴베르크라고 불리기도 하는 장 뒤 브와 (Jean du Bois) 남작이 목격한 세 번의 신비스러운 발현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발현
1405년 성령강림절 전 화요일에 브와-시뇰-이삭의 기사령에 대해 경건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 유산 상속인은 자정 쯤에 한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잠이 깼다. 그의 침대 앞에는 약 서른 살 가량의 남자가 족제비 털가죽으로 된 파란 외투를 입고서 햇빛보다도 더 밝은 빛을 내며 서 있었다. 이 기이한 모습에 놀란 장 뒤 브와는 매우 놀랐으나 곧 침착하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 낯선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낯선 사람은 자신의 외투를 펼치고 자신의 온 몸을 뒤덮고 있는 피투성이의 끔찍한 상처를 보여 주었다.
“자,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었는가를 보아라!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치료해 주고 또 나를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의사를 보내라, "
신비에 가득찬 상처입은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분에 관하여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53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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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파스카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그럴 권한이 있는지 물으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표징으로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은
성전 제사를 위해 생겼습니다.
흠없는 소나 양을 마련하기 어려워서
그것을 성전에서 팔았습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돈과
성전에 봉헌하는 돈이 달라서
환전이 필요했습니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더 잘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심은 성전 제사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장사가 그 중심이 되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내십니다.
중심을 바로 잡으려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원래의 의미를 되찾으려 할 때
우리는 종종 거부 반응을 접하게 됩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고
편안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본질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우리는 벗어나기도 합니다.
매번 깨어서 내가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께서 삶의 순간마다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알아듣고도 다시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싫어함을 넘어서
거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성전 정화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대단한 사랑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편안함에 익숙해져서
변화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를 말하는 목소리가
사랑에서 나왔음을 기억한다면
마냥 거부하지만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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