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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디스트 윈터는 역사관련해서 읽었다. 제목을 직역하면 가장 추운 겨울을 뜻하는데 같은 주제를 가지고 박완서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소설을 썼으니 이 책의 내용은 어떤지 궁금하다. 인민군은 50년6월에 3주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가지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하지만 3개월후에 연합군이 평양에 도착한다. 미군은 초기에 고전했다. 2차세계대전때 사용하던 구식무기는 소련제 최신 탱크의 갑판을 뚫을 수 없었고 탄약은 수동으로 채워야 했다. 더우기 중공군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백년만의 추위가 오고 있는데 아직도 하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제목이 가장 추운 겨울이 된 모양이다.
군대는 명령이 최우선이다. 그러므로 명령권자가 제일 중요한데 문제는 맥아더가 정보의 종합과 다양한 의견을 고려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참전에 관련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중공군은 산속에 숨어있으면서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기다리다가 후방을 차단하고 측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결국 비기기위한 전쟁이 된 셈이다. 초기에는 수백명의 본부에서 수천명의 병사를 지원했지만 점차 본부가 수천명으로 늘어나면서 수백명의 병사를 지원하게 되었으니 전투력은 당연하게 하락했다. 7
인민군 10만명은 최신 소련제무기를 들고 6월25일 04시에 전면공격을 감행했고 06시30분에 이승만에게 보고되었다. 미국대사는 08시에 이러한 정보를 접수했다. 즉시 연합통신은 09시30분에 남한군 개성에서 1사단이 괴멸했다고 일요일 조간을 장식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이유는 맥아더의 과소평가였는데 이번에도 반복되었고 그는 이틀만에 완전기 기가죽는다. 국무성은 해군과 공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0 이승만이나 김일성은 똑같이 미국과 소련이 자기 입맛대로 고른 사람들이다. 지금도 재벌총수는 능력보다 충성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는 원리인지도 모른다. 12
미국군사고문단은 한반도에 산이 많아 전차의 효과가 크지않다고 생각했고 폭격기가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바른 말이다. 하지만 대전차능력이 없는 보병과 전차가 만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당시 바주카포는 소련전차를 파괴하지 못했고 전차는 시속 50키로로 240키로까지 급유없이 달릴 수있어 개전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결국 이틀만에 서울을 점령당했다. 그리고 이는 유엔결의를 촉진시키게 된다. 21 원자폭탄의 개발은 군비를 줄이게 되었고 이는 장비나 인력의 축소를 의미했다. 하지만 사용하려면 그 파장때문에 오랜 숙고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미국은 확전을 원하지 않았고 원자탄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23
민주당의 루즈벨트는 라디오라는 첨단 미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의 혼동속에 있던 블루칼라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2차세계대전의 발발에 따른 효과까지 얻어 유일한 두번의 연임을 한 대통령이 되었다. 이에 반해 보수적인 공화당은 일부는 민주당의 국제주의를 찬동하고 당내 진보주의자까지 나서는 바람에 대선에 번번히 패하게 되었다.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은 1200만명이었지만 2년내에 150만으로 감소되었으며 예산은 900억에서 100억까지 떨어졌지만 원자탄의 독점이 49년에 해소되고 중국이 공산화되어 군대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24
일본군이 인종차별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맥아더군도 그다지 다르지않다. 그들은 인민군이 미군을 보면 도망갈 것으로 생각했다.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일본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은 지역군 사령관이 그랬고 정부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달랐다. 따라서 우리가 맥아더에 대한 존경과 그를 해임한 트루만에 대한 비난은 어쩌면 반대로 되야할 것이다. 맥아더가 가끔 군사적으로 의미있는 작전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 그는 2인자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공은 자기가 그리고 모든 실책은 부하에게 떠 넘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트루만이라도 그런 부하는 제거할 수밖에 없지않았을까 생각한다. 29
장개석은 모택동과 대결할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일한 강점은 강력한 후원자였던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척하는 것이었지만 돌아서면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의 방식은 기존의 체계처럼 착취하고 착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자원이 지원되었지만 대부분은 일부 인사가 착복하고 250만의 군대가 있다고 했지만 40%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고 나머지도 돈이 없어 강제 징병되고 병든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48년에 선양을 시작으로 중국의 75%에서 대만이라는 작은 섬으로 쫒겨날 때까지 사단 전부가 항복하여 모택동군으로 가거나 수백만불의 미제 군수품을 두고 사라지는 행태를 보였다.
이들이 망할 것이라는 것은 42년부터 중국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의 후원으로 지원이 지속되었는데 그는 일본군을 막기위한 방편으로 그를 활용하고 싶었을 뿐이다. 장개석은 대만에서 본토로 복귀를 희망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50만의 군대가 필요했고 이는 소련이 개입하는 경우 훨씬 커지고 대전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컷다. 그래서 그들은 대만과 한국을 분리해서 처리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국도 확전이 되지않도록 예방하려 했지만 결국 맥아더는 군사분계선을 너머 북진을 계속했고 압록강까지 이르러 중공군이 참전하게 만들게 된다.
미군은 5만의 해병대를 동부지역에 파견하고 장개석군 50만을 항공수송하여 일본군 120만명의 항복과 최신 일제무기를 획득하게 해주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모택동군을 8개월내에 섬멸한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하지만 모택동군은 후퇴하여 장개석군의 보급로를 길게하고 포위하여 그들을 섬멸하게 된다. 장개석군은 끌려나오고 축재에만 관심이 있어 민심을 잃었지만 모택동군은 대부분 자원자로서 1년간 15,000키로에 해당하는 대장정을 통해 민심을 얻고 확실히 우세할 때만 공격하고 사라지는 전투방식을 터득하여 미국이 25억불에 해당하는 지원을 했지만 빼앗아 활용할 수 있다며 더 좋아했다. 트루먼의 비밀조사결과 25억불울 10억불이 장개석가족에게 넘어가 미국은행에 예치되었다고 한다. 35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던 미8군의 병력은 부족했다. 10만명이 넘는 인민군에 비해 8만명으로 인원이 작았고 그나마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병사가 대부분이었다. 더우기 맥아더가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그 정도는 더욱 심해졌고 찰리중대의 경우는 인민군 2사단에 포위되어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냈다. 다행히 영산전투에서 무개념한 대령이 지시한 평지주둔을 거부하고 언덕위에서 영산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사수하는 참호를 구축한 도그중대가 제 역활을 해서 방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있었지만 그들도 수많은 인민군의 공격에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사실 용감한 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을 떨치고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니 그들은 용감하다고 할 수 있다. 38
대령은 자신의 지시를 거부한 중대장을 군법회의에 회부하려했지만 그는 육군에서 두번째로 높은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모기에 물려 뇌염에 걸렸고 몸무게가 40키로까지 줄어 일본에 후송되었는데 석달후 그의 중대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전사했으니 모기가 그의 목숨을 구한 셈이다. 41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마지막 성공작이었다. 그는 초기에 인민군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했다. 이는 일본군을 2차대전중 과소평가한 것과 같다. 그리고 산지에서 병력의 열세가 있는 경우에 전세를 뒤집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상륙작전을 추진한다. 일본군과 싸울 때도 방어 거점이 아닌 부분을 공격하여 고립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륙작전은 남침 1개월후인 7월을 목표로 했지만 장비와 훈현상태가 부실하여 불가능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9월로 연기했을 뿐이다. 이 작전의 성공운 수천명의 군인을 구했지만 제대로 퇴각하는 인민군을 무찌르지 못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고 큰 성공후에 일반적으로 따라오는 오만함으로 더욱 자신의 몰락을 촉진했다. 그는 태평양 해병사령관의 방문을 받자 해병대 1개사단이 필요하다고 했고 군비감축으로 존폐여부에 놓인 사령관의 동의를 받는다. 인천은 지리적으로는 적합했지만 위험도 높았다. 해변이 없었고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적으로 높아 아주 제한된 시간이 지나면 갯벌을 4키로나 걸어야 도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41
저자의 글은 상세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틀린 부분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부산에서 대구가 300키로가 떨어져있다든지 오히려 인천은 200키로 북쪽에 있다고 기술한 것은 정반대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안다. 그리고 대구가 낙동강 전선내에 있고 그 크기가 작다는 것과 인천이 서울인근이라는 것은 저자로 알고 있던 사항이므로 이는 지식의 문제는 물론 논리적인 오류까지 가지므로 다른 우리는 모르는 부분도 그가 자신있게 기술해서 정확한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맥아더역시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사람을 따돌리고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조금 더 길게보면 자신에게 치명타를 가한 작전을 추진한다. 기습작전인데도 누구나 9월15일이라는 날짜를 알고 있었고 이는 그대로 누출되었을 것이다. 더우기 작전책임자를 작전개시 직전에 참모들에게 알려주어 후에 트루만이 그를 해임했을 때 만장일치의 지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42
그의 성공은 김일성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는 점도 기여한 바가 많았다. 스탈린은 자신의 힘으로 혁명을 성공시켰고 모택동과 호치민은 거기에 추가해 인민들의 마음까지 잡았지만 그는 소련군의 하수인의 노릇만 잘하고 그러는 과정에 인민들을 괴롭혔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는 상륙작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전쟁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정보를 중요시했고 이를 통해 적이 약해질 때 집중공격으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곤 했기 때문에 일본 사세보항에 많은 부대와 물자가 모이고있으며 우수한 두개의 사단이 고전중인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맥아더가 대전중 상륙작전을 반복해왔다는 것을 알고 경고를 했다.
김일성은 이를 무시했고 이는 맥아더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그는 작전이 끝난후에도 10군단을 8군에 넘기지 않고 직접 통제하도록 해서 지휘권이 두개로 나뉘게 된다. 이는 금기사항이었고 압록강에서는 중공군 30만명이 맥아더가 준비한 공습을 피해 미리 강을 건너 산속에 매복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2차 원산상륙작전을 추진하지만 그곳은 인천과는 달리 기뢰가 설치되있어 남한군이 먼저 도착하고 미군은 기뢰작업으로 원산항 앞바다에서 장기 대기해야 했으며 그동안 75명이나 이질로 쓰러졌고 2주후에나 입항할 수 있었다. 44
미국은 중국이 수억의 공산주의 국가인지 수백만의 섬나라인지 아리송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국제적으로 중공을 인정하고 있어 미국의 대만에 끌려다니는 것은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중공이 소련과 유착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들은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냈고 모택동은 항상 적이 약한 쪽을 공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장비의 열세를 가진 대만해협보다 걸어 도강가능하고 인력의 우세를 활용할 수 있는 압록강을 선택했다. 당시 8군 사령관의 생각은 미군은 국익에 도움되지도 않고 한국민도 고마워하지 않은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이는 단기적으로 김일성과 이승만의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참전이 한국의 번영을 불러온 것이 되지만 이는 목적이 아니었다.
남침을 시작했을 때 미국이 참전한 이유는 내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진을 할 때도 군사분계선에서 멈춰야 했지만 그때는 내전이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고 남북으로 길고 산이 북쪽으로 많아지며 중공과 소련에 가까운 북쪽으로 진군할 수록 병참선은 길어져 미군은 약해지고 인민군은 강해져갔다. 여론은 북진이었고 맥아더에 내려진 명령은 북진을 하되 중공군이나 소련군과는 전투를 피하고 국경에서는 남한군을 앞세워야 한다는 모호한 것이었고 맥아더는 명령이 애매할 수록 좋아했다. 어쨌든 그는 그의 방식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책임은 회피하고 공은 가져오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46
미국정부는 맥아더가 퍠배하는 것도 걱정이지만 더 큰 것은 그가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과 전쟁하는 것을 원했고 미국은 대전으로 확대하는 것을 회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순신장군의 경우와 상황은 비슷한데 그 원인은 정반대였다. 이순신장군은 자신보다 부하나 나라가 우선인 애국자였지만 맥아더장군은 부하나 국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겼다. 모택동은 미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본토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다. 중공은 대만상륙작전을 했지만 해군과 공군의 장비문제로 실패했고 맥아더는 대만이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해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47
모택동은 인명과 비용의 부담이 큰 참전에 대해 이길 가능성이 높고 그 경우 공산당과 중공의 입지는 물론 자신의 영향력도 커진다는 점을 고려하여 결정했고 당시 실권은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서방의 예상과는 다른 결정이 내려졌다. 스탈린은 공중지원을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않았고 김일성은 소련군 참전을 요청했지만 중공에게 요청하라는 답신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공의 참전을 요청하고 만일의 경우 임시정부수립을 허용해달라고 했다. 중공은 참전을 결정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기본적으로 국익을 우선했고 사익을 더욱 우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전중 모택동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인 적도 없었고 중공이 내전에 이겼을 때 기뻐할 이유도 없었다. 48
스탈린은 미국이 중시하는 유럽에서 그리스내전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 아시아에 군대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고희연에 참석하여 스탈린식 신격화를 따라한다. 그가 숭배하는 것은 주왕이었고 그는 경쟁상대자를 잡아 사지를 절단하고 시체를 공개하여 다른 도전자의 기를 꺾곤했다. 그는 김일성의 참전요청에 4배의 인해전술이 가능하고 중포병대신 박격포를 2배로 지원하도록 준비했다. 하지만 소련이 공군지원을 국경이북으로 한정하고 대신 2차대전 장비를 주겠다고 말을 바꾸자 작전을 중지했지만 대만에 미국이 지원하고 있고 상륙작전에 소련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남한군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공격을 명령했다. 대신 야간에만 이동과 작전을 하기로 변경했다. 54
공화당의 매카시는 국무성에 공산주의자 200명이 있다는 허위주장으로 선풍을 일으키면서 전후 첫 상원의원투표에서 그의 주장이 허위라는 사실을 보도한 타이딩스를 4천표라는 엄청난 차이로 제치고 당선된다.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의 고향이라는 아테네에서 적법하게 사형판결을 받고 죽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대중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하는 편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기적이지만.. 매카시는 민주당 당수였던 루카스도 같은 방법으로 치명타를 날려 낙선시키고 이는 의회의 좌석수를 줄였고 대통령의 위상을 약화시킨다. 62
독선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맥아더의 지휘를 받은 미8군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와해된다. 그는 전혀 책임을 지지않고 지휘부의 비협조로 패배했다고 주장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리지웨이 장군이 투입된다. 그도 신비로운 면이 있는 것은 맥아더와 같지만 전혀 과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기임무에 충실한 타입이었다. 그래서 군에서는 리지웨이만큼 할 수있는지가 평가의 수준이기도 했다. 그는 파리에 공군을 투입했고 인도네시아에 미군이 프랑스를 돕기위해 파병되는 것을 막았고 그리고 미8군의 재건에 착수한 것이다.
대전중 이태리 육군총장이 미공군을 투입해주면 같이 독일군과 싸우겠다고 해서 미국에서 받아들였지만 그는 불확실성이 크다고 반대했고 지휘부가 그의 건의를 듣지않자 부관에게 이태리를 정찰하도록 지시했다. 부관의 보고는 이태리가 독일군에게 맞설준비를 전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는 그의 주장에 정찰결과를 추가하여 지휘부가 비행기에 엔진을 걸고 출동하려던 공군의 출격을 취소하게 만든적도 있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쉽지않지만 고급장교가 자신의 자리를 걸고 상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그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68
그는 취임후 즉시 차량으로 이동하던 미군이 중공군과 같이 도보로 이동하도록 바꾸었다. 또한 중공군의 지도표시를 48시간이내에 정찰한 결과만 표시하도록 만들어 원자탄사용을 고심하던 지휘부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71 그는 중공군의 약점이 보급에 있고 미군의 강점이 막강한 공군이라는 것을 활용하여 보급선을 길게하고 공습으로 식량과 탄약을 실어오던 트럭을 파괴하여 중공군은 한줌의 밀가루와 눈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부족한 총알고 고생했고 동상으로 부어오른 발로 신보다 커지면 맨발로 행군해야만 했다.
중공군은 남하를 늦추고 북부에서 전투를 하려 했지만 지휘부는 하루빨리 서울을 점령하여 자랑을 하고자 했다. 남한에서는 지리도 잘 모르고 보급선도 훨씬 나빠질 것이 뻔한 상태여서 군과 정치인간의 목적이 달라지게된 것이다. 미군의 피해는 전투중보다 퇴각시에 발생했는데 이는 중공군이 미리 위회하여 퇴각로의 고지를 선점하고 공격하여 많은 무기를 좁은 길에서 운반하여 후퇴하는 군대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리지웨이는 이를 개선하여 후방이 끊기더라도 공군을 이용하여 최대한 보급을 계속하는 형태로 변경하여 후퇴시에도 병력손실이 최소화되도록 했다. 72
원주는 철도와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점령하면 대구까지 용이하게 진군이 가능해서 중공군의 표적이 되었다. 리지웨이는 정찰을 중시했지만 그들은 밤에 길이 아닌 곳으로 이동을 했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쌍굴에서 세번의 전투가 발생한다. 처음 정찰대는 소규모의 중공군만 발견하고 약간의 접전만 하고 돌아와 두개의 중대에서 차출한 60명으로 정찰대와 관측기를 보냈는데 관측기와 소통이 가능한 짚차가 먼저 가다가 파괴되는 바람에 항공기에서 경고를 주지못하고 본부에만 보고했다.
본부에서는 60명에 몇개 대대가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전투기를 투입하고 인근에 주둔하던 연대에 지원군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지원중대는 인근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탄약이 떨어지고 부상자가 속출하여 전멸상태에 있던 정찰대를 구원하게 된다. 광합성을 하지 않는 동물에게 먹이는 필수품이다. 그런데 그중 군인은 먹이외에도 탄약이 그러하다. 만약 탄약이 바닥나면 아무리 우수한 군인도 전사자나 포로 명단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포병대의 유효사거리 밖으로 항공지원이 불가능한 날씨에 진격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맥아더에게 아부하여 진급한 알몬드 군단장이 그러한 명령을 내렸다. 프리먼의 연대에 흐린 날씨에 유효사거리를 너머서는 쌍굴로 진격하라고 사단장을 배제하고 지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명령을 따르면 중과부적인 중공군에게 전멸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프리먼은 최대한 천천히 방어진을 구축하면서 이동하여 고지에 참호를 파고 밤을 보내기로 했다. 중공군은 새벽안개속에서 사단규모로 공격했고 1차대전부터 복무하여 삼성장군이지만 프랑스가 파견한 대대급을 지휘하기 위해 중령으로 지휘한 프랑스대대가 맹활약하여 버텼지만 탄약고갈로 전멸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안개가 겉히면서 제트기보다 오래 상공에서 공격가능한 프로펠러기가 기관총, 로켓, 폭탄으로 공격하여 다행히 위기를 벗어날 수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평리로 이동했다. 이곳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었고 여러번 양측의 군대가 지나가면서 버려져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동서로 철도가 지나가고 남북으로 도로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양측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리먼은 가장 높은 고지가 너무 넓어 연대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조금 낮지만 작은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76
원주에서는 중공군 4개사단이 매복하고 있다 한국군 2개사단과 미10군단을 섬멸했다. 이 역시 인종차별적인 알몬드 군단장이 중공군을 깔보면서 진격을 명령해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는 퇴각하면서 부사단장에게 연대를 지휘하라고 하면서 우측에서 적이 공격할 것같다며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스튜어드 부사단장은 보병지휘관이 되고 싶었지만 경력이 애매해서 군수분야를 담당해왔다. 하지만 부대간 교환근무를 통해 포병술을 배웠고 마침 중공군 2개사단이 접근한다는 관측기의 보고를 받고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포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방어에 성공했다. 포병대장은 포탄의 부족을 염려했지만 그는 바닥날때까지 사격하라고 하면서 일본에 보급을 지시하여 몇시간후에 받았고 포가 녹아내릴 것같다는 의견에도 다 녹을 때까지 멈추지말라고 주문했다. 85
맥아더는 중공군과의 전면전을 펼치려는 발언을 계속했고 지휘부의 금지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지휘부는 최대한 확전을 막아보려하고 평화회담을 준비중이었지만 그가 중공군에게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모독함으로서 이를 깨뜨려서 트루만은 링컨의 사례를 조사하게 했다. 그도 항명하는 장군을 해임하고 일시적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역사는 올바른 결정으로 인정했다. 결국 트루만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8군사령관을 후임으로 임명했고 참모와 각료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았지만 발표에는 혼자 결정한 것으로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준다. 86
해임은 상당한 정치적 공격을 야기했다. 맥아더의 귀국길은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고 공화당은 청문회를 통해 해임이 잘못이라는 것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평소 자기말을 상황에 따라 바꾸던 맥아더에게는 치명적이기도 했다. 그의 실수는 물론이고 책임까지 많은 사람들이 제시했고 발뺌을 하기 시작했지만 많은 내용이 기록되있어 결국 공화당이 원하는 정치공세는 오히려 민주당에게 유리한 결과를 내었다. 민주당은 여당으로서 헌법에 기대어 결정했고 공화당은 야당으로서 언론에 호소하여 어쨌든 단기적으로는 여당이 되는 성과를 내었지만 맥아더가 아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다. 89
트루만은 퇴임시 지지도가 최악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호도가 상승했고 특히 저평가되있었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매카시는 공화당에서 제명되었고 승리가 아닌 사상자를 최소화하는 형태로 전략이 변경되어 종전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잠재적 양대 적국이 전쟁을 지속함으로서 어부지리를 얻던 스탈린이 죽어 미국과 중공이 휴전에 합의하기 훨씬 좋은 상황이 된 상태에서 이승만은 혼자라도 싸우겠다는 허풍을 떨고 인민군포로를 석방하는 등 맥아더와 비슷한 일을 했지만 이 역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 행동으로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2년간 전선이 정체되면서 중공군은 공습에 대비해 산뒷면에서 시작하는 땅굴을 파서 공격지점앞까지 연장함으로서 비행기의 공습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동굴에 숨겨둔 포를 이동시켜 20발을 목표지점에 발사하고 다시 숨김으로서 반격을 받는 것을 예방하기도 했는데 이는 베트공이 더욱 발전시켜 사용하게 된다. 한국전쟁에서 스탈린은 중미간의 전쟁으로 이득을 보았고 모택동도 중국의 권력자로서의 입지를 더욱 강화해서 스탈린과 같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역시 대약진운동과 같은 결과로 2천만명이라는 많은 인민들이 아사하게 만든다. 90
김일성은 모택동을 능가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련이나 중국도 현대화되었지만 그는 전혀 변함이 없었고 그가 지나가는 도로는 모든 교통이 통제되었고 곳곳마다 그와 아들의 사진이 게시되었으며 모든 인민이 항상 그의 사진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에 반해 남한은 마샬플랜의 성공을 능가하는 미국의 최고 성공작이 되었다. 군에서 시작한 현대화는 교육, 사회, 경제를 거처 정치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수준에 다다랐고 미국은 케네디가 집권하여 다시 베트남에서 중국과 똑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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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부 운산에서 얻은 교훈; 제1장 중공군과의 첫 교전
제2부 쓰라린 날들; 제2장 인민군 남하, 제3장 관심 밖의 나라, 제4장 김일성과 스탈린의 후원, 제5장 남한군의 전비태세
제3부 미국의 참전; 제6장 워싱턴의 참전 결정, 제7장 아서 맥아더, 제8장 핑키 맥아더, 제9장 맥아더의 정치적 행보, 제10장 미군과 인민군의 전비태세, 제11장 월튼 워커와 에드워드 알몬드
제4부 두 대륙 간의 정치; 제12장 미국 정세와 국방 예산, 제13장 딘 애치슨과 조지 케넌, 제14장 해리 트루먼, 제15장 중국 문제와 미국 정치, 제16장 중국 국공내전, 제17장 차이나로비
제5부 북한이 던진 마지막 주사위; 제18장 낙동강방어선전투
제6부 전세 역전; 제19장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 제20장 서울 진격과 원산상륙작전, 제21장 예고된 충돌
제7부 38선을 넘어 북으로; 제22장 국무부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제23장 중국의 경고, 제24장 마오쩌둥과 스탈린, 제25장 웨이크 섬 회담과 맥아더의 오만, 제26장 최종 진군
제8부 중공군의 공격; 제27장 그림자 없는 유령, 제28장 폭풍 전야, 제29장 무너지는 전선, 제30장 덫, 제31장 시련의 길, 제32장 절망과 기적, 제33장 끔찍한 현실, 제34장 침묵하는 영웅들, 제35장 대혼란, 제36장 새로운 국면,
제37장 매튜 리지웨이와 전쟁의 전환점
제9부 중공군과 싸우는 요령; 제38장 이름뿐인 서울 재탈환, 제39장 원주에 감도는 전운, 제40장 1차 쌍굴 전투, 제41장 2차 쌍굴 전투, 제42장 달라진 준비태세, 제43장 원주 전투, 제44장 지평리 전투와 지휘권 다툼, 제45장 크롬베즈기동부대, 제46장 맥기 언덕, 제47장 지평리와 원주 전투 이후
제10부 장군과 대통령; 제48장 불붙는 갈등, 제49장 위태로운 파면 결정, 제50장 청문회로 옮겨간 전투
제11부 전쟁의 결말; 제51장 쓸쓸한 퇴장, 제52장 승자 없는 전쟁, 제53장 그 후의 변화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