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50
10월21일[연중 제28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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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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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4O1JZXikJo
[도미니코수도회 배수판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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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강건합니다!>
돌아보니 젊은 시절 저는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하고 울적했고,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특히 남 앞에 설 때, 뭔가를 발표해야 할 때, 근심 걱정을 증폭되었습니다.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정말이지 많이 변했습니다.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큰일이 생겨도 ‘하늘 아래 별의 별 일이 다 생기는 거 당연하지.’하며 흘려버립니다. 수백 명 청중 앞에서도 그럭저럭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맡기니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직무상 갖게 되는 작은 근심 걱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오시는 분들 식사 메뉴는 어떤 걸로 해야 하나 하는 걱정 정도, 때때로 식사며 침실이며,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는데, 팔십명의 아이들이 버스 두 대로 밀고 올라오는 꿈도 꾸기도 합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한 보따리 걱정을 이고 지고 살아갑니다.‘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사람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나는 체력이 약한데’ ‘나는 남들 앞에 서면 완전히 쫄아 드는데’
이런 우리를 향해 세상 자상하신 예수님께서는 달래듯이 타이르듯이 말씀을 건네십니다.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 할 최우선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강건합니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성스럽습니다. 우리가 비록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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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장차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이면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자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성조(聖祖) 아브라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서 4장 18절)
하느님의 언약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순수했고 우직했습니다. 즉시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라 하시니, 지체없이 떠났습니다. 거짓말 같은 말씀을 믿으라니 그저 믿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두말 않고 바쳤습니다.
갑작스레 고향을 떠나게 된 식솔들의 불평이 하늘을 찔렀지만, 아브라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후손들이 바닷가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주변 사람들이 다들 ‘맛이 갔구나!’ 하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장작더미 위에 꽁꽁 묶는 그의 모습에 아들조차 ‘드디어 아버지가 미쳤구나’ 생각했지만, 그는 하느님께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습니다. 온갖 현실적 희망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도, 하느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 밀라노의 대주교 마르띠니 추기경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아버지’,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의 아버지’,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아버지’, ‘신앙의 나그네 길에서의 아버지.’또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신앙여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묵묵히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여행길’,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거의 아는 바가 없었던 답답했던 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또 희망하면서 하느님을 알고자 노력했던 여정.’
아브라함의 성소 여정을 단계별로 꼼꼼히 살펴보면 위대한 신앙인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절대로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즉시 알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시로 하시는 말씀이 ‘일어나라!’ ‘떠나라!’ ‘믿어라!’ ‘맡겨라!’는 것인데, 많은 경우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무엇 하나 활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희망을 주셨지만, 그 희망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약하셨지만, 그 무엇하나 순순히,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오랜 기다림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이 컸습니다. 지속되는 여독으로 인해 삶이 늘 힘겹고 고달팠습니다. 마치도 우리들의 신앙여정, 성소여정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기쁨과 영광도 주셨지만, 다양한 시련도 함께 주셨습니다.
때로 그 시련은 우리를 극한의 고통과 좌절로 몰고가기도 합니다. 때로 그 시련이 우리를 여지없이 허물어트리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길고도 긴 여행길에 나선 우리 모두에게도 시련은 필수과목입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마다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어떻게 시련을 극복했었는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때로 시련은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그릇된 하느님상, 그릇된 신앙관, 왜곡된 인생철학을 수정하고 쇄신시키는 차원에서 시련처럼 유용한 도구는 다시 또 없습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마다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시련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비록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당신 손 안에 넣고 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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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상에서 세상을 거슬러, 교회에서 교회를 거슬러>
오늘 복음의 핵심구절은 이것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슬러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더 모호하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게 되고 또 사람들의 평가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면 분명 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맞습니다.그런데도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은 분명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이 그분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려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신다면, 성령님은 그 진리를 세상을 거슬러 선포하게 만드는 일종의 ‘충동’이라고 할지라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충동이 일어남에도 세상의 박해가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 교육에 관해 어쩌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외치고 있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한국 교육에 있다고 말하는 ‘김누리 교수’입니다. 그가 비록 너무 독일의 교육문화와 우리 교육문화를 대비하는 것에 지나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들은 분명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일대 교육의 혁명을 시작해야 할 시기라고 대부분 사람이 공감하게 합니다.
그는 먼저 우리나라를 찾았던 ‘프랑코 베라르디’라고 하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우리나라에 대해 꼬집은 사회적 문제점을 그 시발점으로 잡습니다.
그는 짧은 우리나라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말 아프게 우리나라의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한국이 세계 자살률 1위이고, 특별히 청년들과 노인들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데 대해 그 원인을 4가지로 들었습니다.
1. 끝없는 경쟁, 2. 극단적 개인주의, 3. 일상의 사막화, 4.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
1. 한국은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죽기까지 서로 비교하며 끝없이 경쟁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고통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어쩌면 꼭 필요한 시스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쟁보다 행복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2. 극단적 개인주의도 경쟁주의 문화의 산물입니다. 경쟁하다 보면 개인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나만, 내 가족만,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극단적 개인주의는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함께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개인적으로 보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미국인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돈 있으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 일상의 사막화도 경쟁 때문에 발생합니다.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끝없는 경쟁에 함께 뛰어들어 바쁘고, 아버지는 직장의 경쟁 속에서 밤늦게야 집에 들어옵니다.
4.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주의가 아니라면 ‘빨리빨리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급해서 모든 것이 편리해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급한 것 때문에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빨리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은 경쟁교육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습니다. 김누리 교수는 시험이 없는 독일 교육, 누구나 대학에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잘 먹히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는 종사자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수 있는 말들입니다. 교육에서 경쟁이 사라지면 학원이나 사교육이 사라질 테고 그러면 많은 실업자가 생기게 되며 그런 교육을 통해 이득을 보던 사람들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경쟁’을 빼고, ‘연대와 협동,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이웃과 환경,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탄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교육, 정치교육, 생태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은 감출수록 더 큰 문제를 유발하고, 정치는 알지 못하면 유치한 지역감정 등으로 비화할 수 있으며, 생태교육은 하지 않으면 공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저는 여기에다 현실적인 ‘경제교육’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태인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주식을 가지고 실제로 투자하며 경제관념을 익힙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세상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 교육에도 경제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과 가족도 입지 못하는 비싼 옷을 사제에게 선물했는데, 그 사제는 훨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것을 받는 것이 마치 신자들이 쓰고 남아도는 돈으로 사 준 것처럼 여겨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연봉 2억이 넘는 사람보다 실제로 제가 한 달에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더 많다는 것에 놀란 일이 있습니다.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저속하다고 여겨 경제교육을 받지 않으면 마치 성에 관해서 그런 것처럼 속으로 썩어 들어갑니다.
어제 제가 수원교구 사목연구소 청소년 파트에서 주관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유튜브 채널 ‘어안채’에 초대되어 녹화하고 왔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더욱 교회를 멀리하게 된 청소년들에게 다시 교회에 돌아올 수 있도록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에게 해 줄 말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먼저 회개하여 청소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말 잘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때는 성령께서 함께하셨던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거지처럼 동냥하는 수도회를 만들겠다고 하니 당시 세속에 찌들었던 교회가 허락해 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눈엣가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 끌어 오르는 그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했다면 프란치스코는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배움을 멈추기 위해 귀를 막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무시이고 모독입니다. 그러나 이미 확신하고 끓어올라 말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해 입에 재갈을 채운다면 그것은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모르면서 짓는 죄는 큽니다. 그러나 알고도 박해가 두려워 말을 못 한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거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수준의 죄가 됩니다.
물론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를 뛰쳐나가며 비판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뛰쳐나가서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비판은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진리를 무시하며 성령의 충동에만 치중하는 균형 잡히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먼저 존중한다면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모독하지 않으려면 ‘교회 안에서’ 쇄신되어야 할 것들을 박해를 각오하고 ‘외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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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23년 ‘한가위’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축일과 겹쳐진 날이었습니다. 그날 미사는 축일 미사 대신에 ‘한가위’ 미사로 하였습니다. ‘한가위’는 우리 민족의 명절이기에 천사들의 축일이 양보하였습니다. 명절에 밀려서 축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명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천사들이 기꺼이 양보하였다고 생각하니 착한 일을 한 것이 알려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 강론에서 신부님은 ‘한가위’의 의미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한가위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부가 첫 수확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수확한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이 한가위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고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듯이, 우리는 재물을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하늘의 창고는 우리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린 이들 가운데 있습니다.
2023년 한가위에 ‘이민자들들 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민자들이 많은 브루클린 교구에서 이민자들의 공동체를 초대해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봉사자를 시상하는 행사입니다. 브루클린 교구에는 한인 공동체가 4곳이 있습니다.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 베이사이드 성당, 우드사이드 성당, 브루클린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당이 있습니다. 이날 오후 6시에 있는 행사가 우천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모두들 저녁 시간을 비워 놓았기 때문에 신부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축일 축하파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민자들을 위한 행사가 저에게 천사 축일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천사 축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지하에 물이 고였습니다. 어떻게 청소를 할까 막막했는데 신부님들이 팔을 걷고 도와주었습니다. 내리던 비도 그치고 그렇게 한가위와 천사 축일이 지나갔습니다.
어제 저는 두려움과 믿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한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이 크면 믿음은 작아지고, 믿음이 크면 두려움이 작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낯선 곳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평탄하게 이루어지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뜨거운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다고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기에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셨고,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잘 아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종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백인대상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때로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신앙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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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8-12: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우리 신앙인들이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언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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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틀 전 목요일 복음에서 언급된 제자들의 운명에 관한 예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배경’이 됩니다. 박해의 상황에 놓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도록 요청됩니다.
루카 복음 12장 8-9절에서 표현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선명한 대조적 평형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와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를 나란히 배치하시고 반대 의미를 가진 단어들, 곧 ‘고백하다’(안다고 증언하다)와 ‘부인하다’(모른다고 하다)를 각각 되풀이하시며 서로 대조시키시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이 하늘에서 보상으로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예수님과 맺은 관계를 인정하는 이는 보상을 약속받지만, 그 관계를 부인한다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약속과 경고가 함께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경고에 이어서 예수님의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박해나 핍박을 받을 때 무엇을 말하여야 할지 몰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하여야 할 것을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증인들에게 초월적 능력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걱정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극복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때 비로소 그분과의 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를 되돌아보도록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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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 증언의 첫째 자리에 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그 증언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고 부정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도 민망하고 쑥스러운 일인데,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식사 전 기도를 하려고 성호 긋기도 어려워하는 우리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기가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성령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예수님을 알기도,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모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 그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지 않는 삶의 자세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증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일치시켜 주십니다.
내 생각과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위한 자리와 시간을 내어 드리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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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맡은 일을 할 때 그 일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그 일에 대한 보람’일 수 있습니다.
한번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시골 본당에서 성주간과 부활 대축일 지내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기차를 타고 시골로 갔는데 웬 노인 신부님이 나오셨는데 영화배우처럼 키도 크고 미남이셨습니다.
신부님은 키에 비해 무척 작은 차를 몰고 시골길로 또 산등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산 동네에 있는 시골 성당이었습니다. 그 시골에서 성주간이라고 해봐야, 성당 안에서 신부님은 저쪽에서 그리고 이쪽에서 가물에 콩 나듯 오는 교우들이 고해성사 보러 오는 것을 아침에도 또 오후에도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노인 본당신부님은 간간이 졸고 계셨습니다. 부활 대축일이 끝나고 신부님께서 미안하셨든지 좋은 포도주를 내 놓으시고 가난한 식탁에서 조금 낫다고 할 정도의 음식을 마련하셔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신부님은 로마 그레고리안에서 공부하신 인재이시고 무엇으로 보나 이 산등성 시골 마을에서 60평생을 지내실 분이 아닌데, 어쩌다가 이 시골에 그토록 오래 계시느냐?는 투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다정하신 모습은 어디로 가고 성난 듯 저를 쳐다보시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너 성서대학에서 공부하면 다냐? 네 마음에는 헛바람이 가득하구나. 아니 시골 교우들이 그레고리안 대학 나온 신부와 함께 있으면 안되냐? 너 그런 교만 버리지 않으면 사제로서 큰 코 다친다.'
그리고 신부님은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사제가 명예나 보람으로 산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말씀을 하시더니 끝에 가서 ‘사제가 보람 찾지 말고 대신 주님과 교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불쌍한 교우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월이 지났어도 인자한 모습으로 타이르시던 노인 사제의 그 말씀은 오래도록 가슴에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일, 인내하고 기다리며 계획한 일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묵상하면 그에게는 끝없는 절망이라는 의미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보람도 없었고 유일한 핏줄이며 희망이었던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느님이 말씀을 듣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아들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보람대신, 일흔 다섯에 하느님을 따르다가 이십 오년을 광야에서 배회한 뒤 아들을 얻어 유일한 기쁨으로 살았는데 어느날 하느님의 명령대로 모리야 산으로 아들을 바치기 위해 올랐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람대신 그의 삶에는 자손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에 실망만을 남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주시는 하느님께 순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내세우며 다음과 같은 교훈의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로마 4,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면 당신도 천사들 앞에서 모른다.’고 대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요.
다음에 따르는 말씀은 쉬우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이 말씀을 얼핏 보기에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사람의 아들을 거스르는 말’과 ‘성령을 모독하는 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사실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설명이 없이 이 둘을 합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에 대한 것과 사람의 아들에 대한 것을 구분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감정을 가졌습니다. 다 쉽게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아라든지 가르침에 대해서 믿고 따랐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부정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고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일들에 반대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왜곡한 것입니다.
마귀를 쫒아낸 기적을 가지고 모독하는 말에서 예수님 자신은 참을 수 있으시지만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래는 예수님 자신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성령과 더불어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쫒아낸 것을 마귀두목 힘을 빌려 쫒아냈다고 하는 그들은 정면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처럼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에 우리는 감탄스런 마음을 가집니다. 좋든 나쁘든 성실하게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사실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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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고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고의로 거부하는 것은 그분의 선물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그 자유조차 존중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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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고마리’라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너무 번식력이 강해서 ‘그만, ’고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또 하나는 더러운 물을 정화해 준다고 해서 ’고마운, ‘고마우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식물은 더러운 시궁창에서도 잘 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시궁창의 물을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는 것입니다.
문득 ‘고마리’도 깨끗하고 모든 환경 조건이 만족스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아니더라도 ‘여기는 도저히 못 살겠어.’라면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기 주변을 정화하면서 변화시킵니다. 물을 깨끗하게 하고, 그래서 벌이 날아오게 하면서 자연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곁에도 ‘고마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주변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분이었지요. 이 세상에 악이 얼마나 많이 판치고 있습니까? 그 ‘악함’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통해 악을 이기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궁창처럼 더럽고 냄새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사랑의 실천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의 악이 우리를 박해하면서 온갖 고통과 시련을 주더라도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많은 말과 행동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도 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자신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희망 없는 절망으로 몰아넣는 이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고마리의 모습처럼, 용기 있게 주님 사랑을 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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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가장 크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한 ‘사람’으로써 그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할 때,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상대방에게 전혀 의미 없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며 무시당할 때,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진심이 왜곡되고 모함을 당할 때일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두고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모함한 것이 예수님을, 더 나아가 성령을 모욕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로하여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게 해 주시려는 ‘선의’로 하신 일을, 마귀 두목의 힘까지 빌려가며 당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려는 ‘교만’ 때문에 하신 일이라고 왜곡하고 모함했으니 예수님께, 그리고 그분과 함께 활동하시는 성령님께 그보다 더 큰 모욕과 상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큰 자비와 넓은 아량으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그런 행동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거슬러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를 때, 예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뜻대로 해달라고 그분께 강요하며 고집부리고 떼 쓰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런 이들은 용서하겠다고 하시지요.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반대하며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했던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가 당신 뜻을 거스른다고 하여 단죄하거나 벌 주시지 않고, 그저 ‘내 뒤에 서라’고 하시며 그에게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당신 뜻을 따르도록 참아주시고 이끌어주신 겁니다.
그런 예수님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도 용서하지 못할 자가 있는 걸까요? 우리 죄를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도 한계가 있는 걸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주의해서 잘 살펴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셔도 우리 인간 편에서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여 의심하고 오해하며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용서하신다고 해도 내가 나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절대 용서하거나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단죄하려고 드는 겁니다.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감사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그렇게 하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감사할 일을 찾을 수 있다면, 나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들을 알아볼 수 있고, ‘하느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단절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당신과의 관계를 끊으면 당신도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으시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과 맺은 사랑의 관계를 끊지 말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시는 겁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누구에게 손해일까요? 누가 아쉬울까요?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더 손해이고 그래서 우리가 더 아쉬워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주님께서 더 아쉬워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만큼 진심을 담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사랑 넘치시는 주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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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백>
루가 12,8-12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고백>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불신의 사람들 앞에서
믿음의 고백을 굳세게
절망의 사람들 앞에서
희망의 고백을 환하게
증오의 사람들 앞에서
사랑의 고백을 뜨겁게
배척의 사람들 앞에서
포용의 고백을 따뜻하게
독선의 사람들 앞에서
관대의 고백을 부드럽게
탐욕의 사람들 앞에서
나눔의 고백을 아낌없이
불의의 사람들 앞에서
정의의 고백을 거침없이
폭력의 사람들 앞에서
평화의 고백을 넘치게
억압의 사람들 앞에서
해방의 고백을 드높게
죽임의 사람들 앞에서
살림의 고백을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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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어제에 이어 오늘의 로마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얘기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 믿었기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하였다는 말로 읽힙니다.
그런데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한다는 게 도대체 뭔 말입니까? 희망이 없는데 뭘 희망을 한다는 것입니까?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희망이고,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이 영적인 희망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세상 사람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희망이 가능성이 있을 때 그것을 희망하거나 소망하고, 그 희망의 가능성을 자기나 다른 사람 안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자기든 남이든 인간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이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하게 되지요.
이에 비해 믿는 이들은 이때 희망을 하느님 안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질 때 하늘의 별이 보이고 달이 보이는 법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불이 꺼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을 보고, 별을 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아무 것 없어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찾으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도 아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을 우리는 갈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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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성령님!>
- 신망애(信望愛)의 삶 -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미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시편8,1)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의 소주제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교회에 속한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인 우리의 사명이자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참 좋으신 주님을 그대로 한결같이 끊임없이 반사하는 참 좋은 삶, 말그대로 신망애의 삶입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행복하게 살게 하는 신망애의 삶,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언제나 하느님으로 행복하지만 어제도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주문했던 커다란 그림 동화집, “사랑을 주면 줄수록”이란 책을 받았고 그림만 봐도 행복했습니다. 책은 다음처럼 끝납니다.
“아이는 언제나 더 많은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돌려 받았어요, 돌아온 사랑이 더 컸을까요?
그럼요! 사랑은 지금껏 아이가 상상해 온 것보다 훨씬 더 컸어요. 그리고 그 사랑 덕분에 행복했답니다. 그곳에 숲이 있었어요.”
사랑의 숲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 바로 거기가 사랑의 숲이요,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서부터 사랑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사랑을 받습니다.
어제 뜻밖에 46년전 1977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8명으로부터 쌀 8부대를 선물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13세때 아이들은 지금은 59세의 장년들이 되었고 당시 29세의 쳥년교사였던 저는 지금은 영원한 현역의 75세 노수도승이 되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잊지 않고 수도원에 사랑의 선물인 쌀을 보내주는 제자들입니다. 오늘 고마운 8명 제자들을 위해 생미사를 봉헌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이런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줍니다. 주님을 증언할 힘을 줍니다. 모든 사랑의 뿌리에는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예수님을 알게 되고 닮게 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안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랑의 증언입니다. 사랑할 때 압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안다고 증언합니다. 어제 원장 수사가 노트북 파일 정정법을 가르쳐 준 후, 요즘 쓴 시를 달라 하기에 나눈 짧은 두 시가 있습니다. “하늘”과 “하늘과 산”이라는 시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바 사랑입니다.
-“고결高潔하게
살라고
언제 어디서나
눈들면
높고 높은 하늘
넓고
깊게 살라고
언제 어디서나
눈들면
넓고 깊은 하늘
날마다
배우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다”-
날마다 배우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하늘 같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이어 ‘하늘과 산’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나
아, 평소 늘 그리고 바라던
하늘이
산이
하늘과 산이 되었구나”-
언제나 늘 거기 있는 하늘같은, 산같은 “하느님 사랑”이 되기를 소망하며 쓴 고백시입니다. ‘하늘과 산이 되었구나’ 말마디를 바꾸면 ‘사랑이 되었구나’가 될 것입니다. 사랑의 성령,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가 사랑입니다. 진리이자 사랑이신 성령을, 주님을 모독하면 안됩니다. 진리이자 사랑인 성령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자 성령을,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성령, 진리의 성령이요, 이런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성령의 힘은 주님의 힘입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을,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 앞에서 참으로 겸허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겸허와 감사를 거스르는 것 역시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의 희망, 성령의 사랑, 성령의 믿음입니다. 성령이 답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모독함은 삶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참으로 어떤 박해의 어려움중에도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않게 하는 믿음은 순전히 성령의 선물입니다. 적절한 필요한 말을 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주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야 말로 신망애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모범입니다. 다음과 같은 아브라함의 묘사가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던 희망의 사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그 희망과 믿음의 저변에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께 대한 깊디 깊은 사랑과 앎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말그대로 신망애의 영웅, 아브라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한 희망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희망없이 살 수 없다. 매일의 적은 희망을 잘라내면 우리의 정체성도 잃게 된다. 우리는 희망위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적 희망은 매우 수수하지만 그러나 매일 양념을 치는 것과 같다.”
참으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궁극의 희망이신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신망애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 9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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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12,12)
<(1)성령의 시대!>
오늘 복음(루카12,8-12)은 어제 복음인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내용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보다, 성령이 함께하고 있는 '교회의 시대'요, 지금 '우리의 시대'인 '성령의 시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당신을 믿고 따랐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성령'은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육으로 존재하지 않고, '영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성령'은 단순하고 진솔하게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하고, 이 큰 사랑 안에 머물 때 주어집니다. 묵상기도나 관상기도를 통해서 더 깊이 머물면 머물수록 더 큰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이끄십니다. 제때에 필요한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 기적인 하느님 체험'입니다.
성령은 '성령세미나'를 통해서만 주어지거나, '방언의 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표지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 사랑 안에 '머물 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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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2)깨어 있자!>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한 단락을 이루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8절)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성당 밖인 삶의 자리, 곧 믿지 않는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내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이며, 성당에 다니는 사람임을 얼마나 잘 드러내고 있는가? 혹시 부끄러워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십자성호도 잘 긋지 못하는 신자는 아닌지? 나는 얼마나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복음 12장 9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이슈 앞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깨어 있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서 2장 20절)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굳게 믿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 깨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이 성령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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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lk1W3tO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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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2)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가장
좋으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좋으신
성령께
우리의 삶을
내어맡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성령께서
알려 주시기에
수 많은 걱정을
내려놓습니다.
홀로 너무 많은
일을 혼자서
감당하려
했습니다.
성령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앞에
오만을 먼저
내려놓습니다.
가장 좋은 오늘을
선물로
주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고통도 걱정도
슬픔도 두려움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께
맡겨드립니다.
비천한
우리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우리의
영혼까지
감싸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겐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절망에서 용기를
걱정에서 기도를
배우게 하십니다.
갇혀있는
우리 자아를
빠져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근심걱정과
조바심의 영역이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역이
됩니다.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용기와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느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성령께
온전히
우리자신을
맡겨드리는
기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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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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