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독립투사 고헌 박상진의사 생가
울산의 무룡산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용맥에 와혈로 횡룡결작한 생가
전경도
안채
일자문성 현무
생가 뒷편과 좌청룡방
뒷편에서 본 좌청룡방
뒷편에서 본 우백호방
일자문성 안대
기념관
대문밖 좌청룡방 진응수 우물
용이 춤을 추듯 기세좋은 울산의 무룡산에서 부터 이위굴곡하며 길게 내려온 용맥에
횡룡으로 결작하여 와혈로 자리한 생가터는
특이하게 현무와 안산이 일자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술국치 100주년에 즈음하여..
과거 친일주의와 기회주의자들은 득세하여 오늘날 전국의 명당을 섭렵하고, 재벌이 되고,
벌렬가문이 되어 있는 반면, 여기 나
라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고 가문은 몰락하여 묏자리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위대한 독립투사의 생가를 소개합니다.
만석지기 재산은 독립자금으로 쓰였고, 위의 생가도 타인의 소유로 넘어갔으나
몇년전 울산시에서 복원하였습니다.
조선말기인 1884년 12월 7일 울산군 농소면 송정(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경주.울산의 만석지기 승지 박시규와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100여일만에 백부의 양자가 되고,
1898년 그의 나이 15세에 월성최씨 영백(鉉敎의 장녀)과 혼인했다.
14세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애국계몽사상가)의 문하에 입문하여 정치와 병학을 배우게 되고,
그의 스승이자 의병장 허위선생의 영향은 명사문객들과 교제하며 국제정세를 습득하게 하였다.
1906년 양정의숙에 입학아여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태백산호랑이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었다.
을시보호조약’이 성사되면서 박상진은 학교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었고,
신돌석과 함께 평해에서 항일 의병항쟁을 일으킨다.
1908년 신돌석이 일제의 교활한 농간에 빠저 순국하고 스승 허위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 당하는데, 이를 지켜본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후,
홍성에 상경해 김좌진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 결의를 맺는다
이는 뒷날 김좌진을 대한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1909년 ‘양정의숙 법률경제과를 졸업한 박상진은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0년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해 평양 지원에 발령까지 받았으나 결국 부임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 상해 등지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느낀 것은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 잃은 뼈저린 아픔이었고,
일제에 대항하여 의병을 능가하는 군사력과 군사조직을 위한 자금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당시 박상진은 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을 통한 무력항쟁이라는 양대 전략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금 조달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1912년 박상진은 삼정물산에 전답을 저당 잡혀 빌린 자금으로 김기덕, 오혁태와 함께
〈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회를 대구에 설립하여 겉으로는 무역업을 겸한 곡물상으로
속 내용은 독립운동기지 및 각종 연락기관, 자금조달기관으로 삼는다.
박상진은 이후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했고, 당시 진행 중이던 중국신해혁명을 본보기 삼아,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대한광복회’를 결성한다.
그의 나이 32세, 1915년(양)7.15일에 일어난 일이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는 총사령에 박상진이, 부사령에 이진룡이 임명되어
활동이 시작되지만, 이진룡의 체포로 의형제 김좌진이 그 뒤를 잇게 된다.
항일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는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기본강령을 바탕으로 충청도 .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였다.(1916년)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회를 비롯하여 광주, 삼척, 예산, 인천, 용천, 서울, 해주 및 만주의 봉천,
장춘에 설립, 곡물상,잡화상을 연락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친일부호들과 금광, 세금수송 우편마차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자금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군자금 조달은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군자금 출연을 거절하는 친일부호를 처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칠곡 장승원 처단 사건이다. 이외 벌교부호 서도현 사살, 보성 박곡의 양재성
처단, 대구 서우순에 대한 모금사건 등 조국을 뒤로하고
동포를버린 친일부호처단은 계속 되어졌다.
1918년 봄까지 11월 장성원 처단사건 이후 ‘대한광복회’는 최대 수난기를 맞게 된다.
1918년초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종국’의 배신은 전국 조직망을 발각 되게 하고,
결국 박상진도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8월 11일 서른여덟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의 교수대에서 순국했다.
전원의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