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수님의 교회 In the name of Jesus 원문보기 글쓴이: 본향을향하여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고 계획(計劃) 하신 그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또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들 속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救世主)이시고, 성령은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내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시다"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앙(信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는 것이 신앙(信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는데, 그 복은 하나님의 뜻대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우리의 생각을 맞추고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약속으로 인간에게 전해 주시더니,
마침내, 그 말씀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도록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이루어 놓으시고 다시 하늘로
가신 뒤에 성령께서 baton(배턴)을 받아 오셔서,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직접적으로 인간 속에서 일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해서, 그 하시는 역할에 대해서 모른다면? 그것은 예수님도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니,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귀신 섬기듯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하면? 그냥 "영"이라는 뜻에서 헬라어로 성령[프뉴-마] 'pneuma'
즉, '영'이시다. 라는 뜻 입니다. 성령하면? 비물질, 영적인 것,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 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소개 하실 때, "보혜사"
라고 소개 하시고 계십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보혜사”는
원어로 (Paracletos) “파라클레토스”'도와 주는 자, 변호자'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곁에서 도와 주고 변호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혜사 성령께서 무엇을 도와 주고, 무엇을 변호해 주시겠습니까?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 속에 함께 있을 것인데,
어떻게 함께 있는가 하면?
"너희 속에 거처를 삼고 영원토록 계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성령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 속에 들어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성령님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모든것을 대변(代辯)해
주시고, 예수님을 변호 해 주시고, 증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의 속에 들어 오셔서 예수님에 대한 모든것을 변호해
주시고, 증거해 주시고, 이 모든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말씀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사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은사나 받아서 자기 신앙 자랑이나 하게
하시고, 자기를 위해서 오신 것 처럼 착각(錯覺)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보호 해 주고 도와 주려고 오셨다?"
즉,
나를 도와서 돈도 잘 벌게 해 주고, 어디 갈 때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시고,
악한 사람 안 만나게 해 주시고, 교통사고 안 나게 해 주시고,이사 가는 것이 좋은가?
안 좋은가? 하는 자기의 일을 가르쳐 주시고, 부부 싸움해서 속상하고 슬플 때 나를 좀
위로해 주시는 분으로 나를 도와 주러 온 존재(存在)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 다니면서 보디가드(bodyguard)해 주러 오신 분 쯤으로 생각 한다는 것입니다.
문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영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삶의 지혜가 탁월해서
성공된 삶(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님은 인간을 보호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믿음을 위해서 예수님을 변호해 주고, 예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서
알려 줌으로서 예수님의 장성한 믿음으로 자라나도록 돕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 도우시는 분, 변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천국'그 나라의 법을 알게 하시고 그 법에 적용 되도록
인도 하시며,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보혜사이신 성령이 장래 일을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래 일을 믿을 수 있고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여기서
"장래 일을 알리시리라" 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나? 내가 몇 살 까지 살 수 있나? 이런 것 알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장래 일은? 곧, "예수님은 너의 죄 때문에 죽었다. 너는 용서 받은 자다.
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다.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가 되신다.
너는 영생 복락을 얻은 자요, 영원 영원히 복을 받은 자다. 예수님이 너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
육체의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
낡아빠진 헌 집은 버리고 새 집을 갖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 때문에 받은 구원에 관계
되는 장래 일에 대해서 알려 주시고, 확신을 심어 주시고 확고한 믿음이 되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보혜사" 성령님의 일 하심의 모습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혜사 성령” 원어로 (Paracletos) “파라클레토스"의 성령이 믿는 자 속에 들어 가셔서
거처(居處)를 삼으시고, 그 사람의 속 사람, 영적 사람을 성장 시키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겉에서 함께 계시면서, 능력을 입혀 사역하는 일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에서는“파라클레토스"의 영이 또 다른 일을 하실 때는
'퓨뉴마 하기온'(πνευμα αγιον)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보혜사 성령께서 사람 속에서 내주 하신 것이나, 그 사람 밖에서(그 사람 곁에서)
역사 하시는 두 가지의 역활을 하시는 것은?
모두 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가 전파(傳播)되어
지도록 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밖에서, 겉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속에
임하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일이 아니시고, 겉에서 일 하시는 사역적 성령께서 주시는
일인 것입니다.
같은 성령이지만 밖에서 일 하시는 그 역사를 '퓨뉴마 하기온'(πνευμα αγιον)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뜻은? 옆에서 도와 주고 변호한다. 또는 더불어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Paracletos) “파라클레토스"의 성령은? 우리 예수님을 변호해
주시고 장래 일을 알려 주시고 믿게 해 주시고 확신(確信)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퓨뉴마 하기온'(πνευμα αγιον) (겉에서 도우시는 성령)의 그 역사는?
성도들이
예배드릴 때, 그 예배 중에 그 가운데서 영향력을 끼쳐 주십니다. 예배의 모든 과정에
힘을 도우시고, 말씀이 선포 될 때, 사모하는 자의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기쁨의 관계를 이루도록 영향력을 끼쳐주시며, 공동체의 예배에 힘을
도우시고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 시키시고, 감화(感化)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의 "퓨뉴마 하기온"은? 선포 되는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달아 들려 질 수 있도록, 도우시는 역할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해 버리셨으니, 그 죄의 주관자인 사단이 심판 받아 버렸다.
그래서 이제 너희는 예수님의 '의'로 살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이제 하나님께서 '죄' 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사단의 심판에 같이 참여하는 자가 된다" 고 깨닫도록
도우시고 책망 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고 전도 할 때도 성령께서 오셔서 말씀 하시는 이 뜻을 가지고
전해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뜻대로 전하면 성령이 기뻐하시며, 구원 받을 자는 이 복음의 말을 들을 때 친히
그 마음에 감동을 주어 회개 시키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말 하면? 사람들이 거부감(拒否感)느끼지 않을까요? 너무 단도직입적
(單刀直入的)이지 않나요?" 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나 아닙니다.
담대히 성령의 뜻대로 전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는 받아들여 믿을
것이요. 구원 받지 않을 자는 그 사람의 신세타령 다 들어 주고, 비위 다 맞춰 줘 가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선물 공세 해 가면서, 교회 데려온다 해도, 그 사람은 참 성도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라도 믿게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능력
없습니다. 복음은 값싼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복음 전할까요? 그 사람 자신이 복음에 자신이 없어서 당당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과 성령의 마음과 성령의 기뻐 하심이
무엇인지? 성령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단호히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신 것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해서 하나님께로 다시 데려 가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 이 기쁜 소식을 죄인된 인간을 예수님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담대하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도둑놈을 따라 다니면?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뭐겠습니까? 도둑질입니다.
그와같이
바리새인 같은 사람 따라 다니면 또 바리새인이 되는 겁니다.
또 학자(學者) 따라 다니면 성경을 학식으로 보는 학자(學者) 밖에 못 되는 겁니다.
교인 따라 다니면? 그저 자기 기분에 충만해서 교회 열심히 다니게 하는 교인 밖에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信者)는 신자 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 자기 같은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되어진 성도는 성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 있는 것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는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으로 오직 예수님과 관계 있는 것은 그 성도인 것입니다.
자칭 성도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로 인정하시는 성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령께서는 '성경'이용 해서 사회운동(社會運動) 하라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 이용'해서 정치 운동 하고, 도덕 운동 하고, 성경 이용해서 자기 '의' 나타 내라고
오신 분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성령님이 왜 오셨는지,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 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核心)입니다. 이것 모르고 신앙 생활 하면, 절대로 참된 신앙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별하고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구약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신'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는 '성령'이라는 단어나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성령을 하나님의 신" 이라고 표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성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역사하신 보혜사 성령과 구약의 "하나님의 신"의 차이를 우리가 아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약에서도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 하셨다"라고 합니다.
죄가
처리(處理)되지 않은 인간의 영(사람) 안에 내주 할 수가 없는데, 구약에서는 성령을
영접해 모셔들인 것이 아니고 성전에 일년에 한번씩 가서 피 흘린 제사로 용서받을 것에
대한 행위로 제사 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에서도 제사 법으로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가 완전하다"라고 완강하게
주장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데 어떻게 완전한 구원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反問)
했더니,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의해서 은혜로 주신 완전한 구원인 것이다"라고 하는
구약과 신약을 분별해서 깨닫지 못한 목회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도 구원, 신약도 구원, 다 같은 것으로 보고 이와 같은 가르침을 베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믿으면? 그냥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도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이요,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주권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따질 권리가 없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라고 하나님을
공산당(共産黨)으로 만들어 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분 하나님 속에 세 인격으로 계신 아버지, 아들, 성령이 각각 독자적으로 일 하셨음에
대해서 확실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확실하게 모르는 것이였습니다.
구약의
율법 이전 시대,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기 전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사람 안에 내주 하셔서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눈이 열려야 만이 아버지 하나님의 하신 일과 아들 하나님이
하신 일과 성령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나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분명히 주권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그 주권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를 가지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영적 존재로 지으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닮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
주권을 내 세워서 독재자(獨裁者)처럼 지배 하려고 지으신 것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비 인격적인 것을 전혀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Satan)조차도
하나님이 자기의 주권을 행사하여,
"나는
주권자니 내 뜻대로 한다. 너 같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피조물은 내 능력으로
처단(處斷)한다" 하시며 무력(武力)으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린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방법으로 사단을 패배(敗北)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서 패배 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함께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셔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신
인간에게 "나는 너의 창조주니 내 맘대로다" 하신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 라고 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즉흥적(卽興的)으로 일을 처리 하시는
그런 주권이 아니십니다.
이미
창세 전에 예수님으로 구원하기로 뜻을 세우시고 계획하시고 그 뜻대로 통치 하시며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이 정해 놓은 그 법을 절대로 초월(超越)하시지도
어기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법대로 행하시고 그 법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를 구원하시고 마귀를 멸하실 계획을 가지고 뜻을 정하신 것을? 아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셔서 하나님의 전 존재를 나타 내시고, 보여주시고,
증명(證明)해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구원 하시는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성령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셔서 사람들에게 예수 믿도록 회개 할 수 있게 감동 시키시고 회개하는 자 안에
오셔서 예수님의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오시기 전에 사람들, 즉, 구약 사람들에게는 죄를 회개시키시고 생명
주시는 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신약시대 처럼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서 예수의 생명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능력을 입혀서 일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 또는 "하나님의 신" 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에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는 능력을 입혀서 일하게 하시는 사역의 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로 오신 것이 아니십니다.
진리는
긍극적으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 안에 있는, "죄 용서와 예수님 안에 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오순절 날 오신 보혜사 성령은? 회개하여 죄사함 받은 자 속에 이 예수님의
생명의 영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속)에 들어가 거처를 삼고 거하시는 분으로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성령' 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의 신"은 예수께서 구원을 이루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단지 사명 감당
해야 될 자에게 능력을 입히시기 위해 사역 하시는 신으로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성령은 "구원 하시는 일과 사역 하시는 일" 두 가지의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 내용 전체가, 구약의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또 주장 하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 가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왜곡된 주장만 하는지? 그것이 사단의 궤계(詭計)의 속임 인
것입니다. 사단이 사람들을 혼미(昏迷)하게 교묘히 속이는 것에 걸려들어 있는
것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율법을 힘써 지키려 하지만은,
본성 자체가 죄성이 되어 버린 인간인지라, 그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그 죄로 형벌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을 범하고 마는 자신들의 연약한 죄성을 깨달을
때는?
아! 나는 하나님의 법을 범했으니, 하나님의 형벌(刑罰)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돌에 맞아 죽을 자가 되었구나! 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 되었구나! 하는 자신을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의 죄를 알게 하시려는 의도(意圖) 였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우리는 죽음의 심판 앞에 놓인 자이며, 그 지옥의 형벌 앞에
놓여진 자신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신 분인지를 알게 되고, 그 예수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죄(율법)를 범했습니다. 나를 살려 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인간
앞에 그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한 방편(方便)으로 죄와 상관 없는 소나, 양을 잡아서
죽게 함으로 피 흘려서 그 피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 오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 때문에 이렇게 양을 잡아 죽일 때마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다른 생명이 대신 죽는 이것을 통해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고 더럽고 추한지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이 죽어서 피 흘리는 것은? 행위의 법으로서 행실의 죄는
용서 될지언정,
에덴
동산에서 지은 원죄(原罪)를 용서 받는 것은? "죄 없는 진짜 사람이신, 믿음의 법을
가지신 구세주 메시아[Messiah]가 와서 피 흘려 주실 때 너희의 죄가 완전히 사해져
구원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죄(原罪)가 처리 되어야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구약의 사람들은 그 조건을 해결 받지
못하고
"용서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는 믿음만 가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살 수 있다"
라는 믿음은 가졌으나, 예수님이 아직 죄를 처리 안했기 때문에 그들은 원죄를 그대로
가지고 믿음만 가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만은 살았다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순간에 그들의 믿음이
역사해서 그들의 죄도 깨끗히 용서 받아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구약의 사람들도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구약의 사람들도 그렇게 많은 소나, 양(짐승)을 죽였어도
구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림자'에
생명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짐승의 피를 수 없이 드린다고 해도 영적인 원죄가 해결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속에 성령이 들어 가시겠습니까?
성령은? 원죄가 해결 되지 않은 자 속에는 절대로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그것은 초월(超越)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 10:4,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성령은
거룩하신 영이시기 때문에 죄 없는 자 속에 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람 속에
영적인 죄가 처리되어 있지 않으면? 그의 안에 임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약에도 "하나님의 신"이 사람 안에 들어 가셔서 그의 영에 예수의 생명이 와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왜 오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 영이신 하나님 안에 인성이
계셨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으로 또한 오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인간만이 대신 할 수가 있습니다. 짐승으로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 없는 인간만이 대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령님도 아버지
하나님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신성과 인성으로 계신 로고스(말씀)가 육체로 오셔서 죄를 대신 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영이신 성령께서 사람의 죄가 처리되지 않은 자 속에도 임의(任意)로 임하셔서
죄를 사하여 영생을 주실 수 있다면? 예수님을 보내서 피흘려 죄의 짐을 지는 고통을
당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 하나님의 신은? 사람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 필요한 그 사역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겉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동행 (同行) 이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동행 (同行)은 옆에 손잡고 같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필요에 의해서는 떠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사람 위에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이 곁에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출] 35:31,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눅] 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위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전의 일 입니다,
이와 같이 '충만함을 입어' '충만케 하여' 라고 하신 것은? '옷을 입었다' 하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의 원어의 뜻은 "덮어 씌웠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전부 다 인간 위에
덮어 씌웠다, 동행 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사람들에게 제사법으로
원죄가 해결이 되어 하나님의 영생의 생명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구약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복음에 흠이 생겨서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하나님의 신으로 옷 입듯이 입히셔서 동행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떠나 버리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순절 날에 오신 보혜사 성령은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처를 삼고, 성령과
우리의 영이 하나가 되어서, 신비한 연합을 이루시고 영원토록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토록은? 언제 까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 그 생명으로 자라서 그 생명으로 영원히 가서 또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의 일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영 안에 오신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믿음을 도우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경험 시키시면서 깊이 알아 가도록 하십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의 지식과 지혜가 있게 하시고 그 영혼의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게 하시고 영적으로 성장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겉에서 신앙을 도우시고, 필요에 따라서 능력을 행하게 하시는 "퓨뉴마 하기온"으로도
계십니다, '퓨뉴마 하기온'은 곁에, 옆에, 오셔서 은사를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겉에 나타나는 은사 주시는 성령만 받아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하는 자처럼 그렇게
속아서 사단에 의해서 끌려다니며 말씀 전하면서, 이와 같이 신약, 구약, 분간(分揀)도
못하면서, 그들은 성령의 흔적이 자기에게 조금만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라고 그렇게 잘 못 전해 주면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순복음
교회가 많이 강조합니다. "방언 받으면 구원 받은 증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도 구원의 증거라고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곁에 오셔서 우리에게 은사
주시는 분은? "퓨뉴마 하기온"의 성령의 일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분별해서 자기 믿음을 돌이켜 보고 또한 들여다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퓨뉴마 하기온'의 성령은? 우리 곁에서 신앙을 도우시고, 또 필요에
따라서 능력을 행하게 하시며 거듭난 사람에게도 와서 계시는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인 것입니다. 성도 속에도 계시면서 곁에서도 계시면서 믿음을 돕고
하나님의 나라 일 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두 성령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도 들어 오실 수도 있고 우리 곁에서도 함께 하시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곁에 일 하실 때는? "퓨뉴마 하기온"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고
말씀을 깨닫도록 죄인 인 것을 알도록 도우십니다.
또
우리 안에 오셔서도 믿음을 도우시는 분,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히 자라 갈 수 있도록
말씀을 우리 안에서 깨닫도록 도우시는 성령을 (Paracletos) “파라클레토스"보혜사
성령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내 속에 오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보혈로서 깨끗하고 거룩한 심령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율법으로 정죄 받은 죄인 인 것을 알고 자기 죄를 보고
애통 할 줄 아는 사람 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보혜사 성령께서 내 속에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더욱 예수님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또한
겉에서 '퓨뉴마 하기온'(πνευμα αγιον)도 각종 은사와 능력이 나타 나도록 인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아서 성경 전체를 바로 깨닫고 말씀의 능력으로
더욱 성령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첫댓글 윗 내용중 두가지 부분은 좀더 깊이 고려해볼 내용이 있는듯 싶다고 판단합니다.. 첫째는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며 둘째는 원죄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원죄에 대한 관점은.. 제가 성경을 보고 깨달은 바로는.. 상당 말씀에 비해 곡해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원죄부분에 대해 조금 설명드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원죄라는 것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명령불복종의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아담의 범죄가 유전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게 맞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첫사람 아담이 불순종 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죄와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거역한 죄와 동일한 죄느냐는 것이지요..
조금만 눈여겨 보더라도.. 그 둘은 전혀 다른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죄가 하나며..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온 죄로써... 아담의 범죄가 원인이였다면 로마서에서 세상속에 들어온 죄는 결과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이 범한 죄는... 그의 범법 자체를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코스모스) 속에 들어온 죄는 범죄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자~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상한 간증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내속 곧 내육신에 한 다른 법이 있어 악을 행하게 되더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이어서 고발합니다.. "이제는 이것을(악) 행하는 것은 더이상 내가 아니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말하더라는거지요..
바울이 증거한 '육신에 거하는 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 속에 들어온 죄'를 말합니다. 그럼 이 죄가 아담의 범법한 행위의 죄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선 창세기로 돌아가야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숨었지요.. 이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고 하나를 더 부르셨는데 뱀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판결과 징계등이 있습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남자에게는 땀흘려 일해야만 하는 고통을, 마지막으로 뱀(옛뱀)에게도 판결을 하시는데.. 많은 이들이 뱀에게 내려진 판결에 대해선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데 엄청 중요하답니다. 자~ 뱀에게 내려진 판결이 크게 두가지인데... 첫째,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는 것이요 둘째, 배로 다니라는 것이였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뱀은 영적으로는 옛뱀이요 사탄 마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임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 뱀의 활동무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흙입니다(배로 다님) 둘째 뱀의 먹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흙입니다.. 실제.. 흙을 먹고 사는 뱀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느냐는 것이지요..
이제 감이 조금 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흙이라는 것이 곧 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흙 곧 육신이 사탄의 활동무대가 되었다는 것이며 육신이 사탄의 먹잇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육신은 타락했고 변질되었으며 부패하고 섞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아담의 범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겠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전엔 사망이 없었는데 범죄후엔 사망이 왔습니다.. 또, 사람에게만 부패와 사망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모든 짐승과 식물에게조차도 부패와 사망이 왔습니다.
이에 대한 예를 들어 드립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그날이 오면 어린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했으며 사자와 뒹굴고 논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사자는 초식동물을 잔인하게 잡아먹고 서로 으르릉 대며 죽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온 죄입니다. 이 죄가 교리적인 그 원죄라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들에게도 원죄가 유전되었다해야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그 죄는 주님이 오실 천년왕국때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므로 지상에 이 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과 사자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시대가 옵니다.
사나운 바람과 폭풍우 그리고 허리케인등등도 모두 세상에 들어온 죄때문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 죄는 오늘날 교리에서 정의한 그 개념의 죄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고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죄라는 용어자체가 성경에도 없을 뿐더러.. 설령 그 용어를 필요에 의해 만들었다하더라도 개념과 정의를 정확히 가져가야 되는데.. 전혀 엉터리로 만들어 놓고 기독교계에 누룩을 확산시켜 놓았습니다..
원죄 교리가 얼마나 잘못되었고.. 또 이 잘못된 원죄 교리로 인해 진리가 얼마나 파괴되고 누룩으로 부패케 되었는지 모릅니다.. 더나아가 이 원죄교리를 정확히 분석해보면 이 교리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사악한 교리인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설명은 생략합니다만... 암쪼록... 이 죄는... 사함을 받는 성질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한 그 불복종의 특정한 죄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가죽옷을 입힌 사건에서.. 사함의 원리가 나타나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의 결과 세상에 들어온 죄는 사함을 받는 성질의 죄가 아닙니다. 사함이 필요한 죄가 아니라 심판이 필요한 죄입니다. 이 죄는 심판을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될 죄이지... 은혜와 긍휼로 용서받아야 되는 성질의 죄가 아닙니다.. 이 죄는 옛뱀이요 옛뱀의 본성과 사악한 성품과 권능을 가리키는데 사탄이 긍휼로 용서받아야 된다는 것과 결론적으로는 같은 말이 됩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까요?
원죄교리는 초대교부라 불이우던 어거스틴이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거짓 성경가들에 의해 주창되었고 기독교탈을 쓴 카톨릭에 의해 내려오는 거짓 교리가 지금까지 유전되어왔고... 지금도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누룩교리인 원죄교리를 별 관념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밝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죄를 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원죄라고 정의한다면.. 이 죄는 심판해야 될 죄이지.. 우리가 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영원히 사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주님 재림하실때 무저갱속에 가두어 버리실 것입니다.
삼위일체론도 원죄교리와 같이 카톨리즘으루터 내려온 2천년된 거짓된 누룩교리이며.. 바벨론 종교인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를 신격화하면서 만든 삼각형속 눈인 전시안 교리를(삼위일체론) 카톨릭이 그대로 수용한 이 교리도 얼마나 오랜동안 교회와 기독교를 부패시켰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두리뭉실 기법으로 속이면서 신비라고 사기를 치지만... 이 교리는 음밀히 말하면 삼신교며... 한분 하나님을 삼신 하나님으로 쪼갠 가증한 교리입니다. 세르베투스가 말한대로.. 삼두신론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