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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장의 방을 나온 닥터 표는 아직 멍한 상태였다. 만일 이 과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했다. 그녀는 강지민을 떠올렸다. 똑똑하고 잘생겼을 뿐만 아
니라 환자에 대한 애정도 누구 못지 않게 큰 의사였다.
그는 학창시절에도 공부를 잘해서 항상 일 등을 놓치지 않았고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여
유가 있을 때는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그가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해 환자를 살려
내서 좋은 일이긴 했지만 기존의 의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술을 했다는 건 사실 복잡하고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녀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어가다가 들어가야 할 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실습할 학생
들과 마취과 과장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곳을 지나친 것이었다.
그녀는 되돌아가 과장실의 문을 열었다.
과장은 없고 학생들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지수가 손뼉을 탁탁 치자 5명의 학생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자, 조용히 하세요. 과장님은 어디 가셨죠?"
학생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네, 좀전에 마취할 환자가 있다고 나가셨습니다."
그녀는 문 쪽으로 가며 말했다.
"모두들 나를 따라오세요."
학생들이 우르르 그녀를 따라나섰다. 학생들이 뒤에서 앞서가는 그녀를 보고 날씬하다느
니 각선미가 끝내준다느니 하며 속닥거렸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지수가 학생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항공기는 이착륙시의 몇 분 동안의 가장 위험하단 말 들은 적 있죠? 그때 바로 조종사의
판단력과 함께 고도로 숙련된 테크닉이 필요한 겁니다. 마취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
수술실에는 간호사 두 사람이 있었고 수술대 위에는 20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잠에 든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즉, 인덕션 후 완전한 마취가 이루어지지 까지와 수술 후의 회복과정이 가장 주의를 요
합니다."
그녀는 복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잇는 기계를 옆으로 갔다.
"수술중 페이션트의 상태는 주로 두 가지 모니터에 의해 체크됩니다. 심전도와 함께
SaO2인데, 산소 포화도의 경우 70이하로 내려가면 위험해요."
학생들은 그녀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들으며 간간이 받아 적기도 했다.
그녀는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이 환자에게는 정맥주사를 통해 수면제와 근이완제가 투약된 상태예요."
지수가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수면제는 뭘 쓰죠?"
학생이 대답을 하는 동안 그녀는 튜브를 박기 위한 준비를 했다.
"만니톨이나 펜토를 씁니다."
그녀가 또 다른 학생을 가리켰다.
"근이완제의 역할은?"
"기관지 안으로 튜브 삽입을 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
그녀는 말끝을 흐리는 학생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다시 텍스트를 보고 확실히 해 두세요. 튜브를 삽입할 테니 잘들 봐 둬요."
그녀의 숙달된 손이 튜브를 환자의 목구멍 깊숙히 넣는 것을 학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레지던트 1년차가 튜브를 삽입하는 데 익숙해지려면 최소한 3개월이 걸리는데 손놀림이
좀 둔한 경우엔 6개월씩 걸리기도 해요."
그때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 자기 옆에 있는 뚱뚱한 학생을 툭치며 장난을 걸었다. 그러
자 뚱뚱한 학생이 발끈해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본 지수가 장난친 학생에게 물었
다.
"마취가스가 뭐지?"
그 학생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네... 그게... 저... ."
그러자 뚱뚱한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다.
"N2O, O2와 함께 엔프란 또는 아이소푸루란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난친 학생이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계의 노브를
돌렸다. 그러자 쉬익, 쉬이익 하는 소리가 나며 가스가 관을 통해 환자의 입 속으로 들어갔
다.
그녀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 환자는 마취된 상태예요."
학생들이 다가와 환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지금 이 환자는 심장만 뛰고 있을 뿐 사망한 상태와 거의 다를게 없습니다. 만약 누군
가가 O2의 공급을 중단시키면 환자는 이 상태에서 안락사를 맞이하게 돼요. 마취의가 수술
실에서 철천지 원수를 만난다면 복수는 아주 간단하죠."
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기계의 노브를 다시 한번 쥐고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잠그
기만 하면 환자는 사망이라는 말이었다.
학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지수는 눈을 빛내며 학생들의 표정을 살폈다.
"여기까지... 질문은?"
학생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때 아까 장난을 쳤던 학생이 불쑥 한마디했다.
"선배님은 정말 마취과를 잘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학생을 쳐다보았다.
"왜?"
"왠만한 남자 환자는 선배님을 소는 순간 그~냥 마취가 될 것 같습니다. 워낙 미인이시
라서... 헤헤."
그 학생이 말을 마치고 그녀를 곁눈질로 보며 씨익 웃자 다른 학생들도 실실 웃었다.
지수는 학생들을 째려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일 아침까지 수술중에 발생할 수 잇는 응급 사항을 체크하고 마취과적인 처치 사항과
그 메커니즘에 관한 레포트를 제출하세요. 글씨 폰트 10, 줄 간격 160, 상하좌우 여백 2Cm
로 30장 이상만 받습니다. 내용 체크는 교수님 대신 제가 하니까 알아서 하세요."
학생들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특히 NS OP중 뇌압 상승으로 심장이 멈추는 경우에 대해서는 간단한 시험을 볼 겁니
다."
학생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과제 사항을 적다가 시험 얘기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비명을
삼켰다.
지수는 모르는 척 냉정하게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마칩니다. 돌아가세요."
모두들 기운이 빠진 사람들처럼 어깨를 늘어뜨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술실을 나가는데
뚱뚱이가 장난치던 뺀질이에게 너 때문이라는 듯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지수는 수술실의 간호사와 눈길을 마주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
고는 자기의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점심시간이 휠씬 지나 있었다. 분명 지민은 지금도
점심 먹을 생각도 않은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수술이 잡힌 것은 없으니 응급
실에 있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일층에 있는 응급실로 내려갔다.
응급실은 언제나처럼 많은 환자와 의사들로 북적거렸다.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환자, 의식을 잃어버린 환자, 별로 증상이 심각하지 않은 환자, 그들 사이로 흰 가운
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수는 두리번거리며 지민을 찾았다.
그는 목에 구멍을 내어 인공호흡기를 부착시켜 놓은 50대 환자의 눈꺼풀을 까올리고 소형
플래쉬로 비춰 보고 있었다. 환자의 초점을 잃은 힘없는 눈동자가 들어났다. 그는 나머지
한 쪽 눈까지 비추어보고 그의 옆에서 X-ray를 들고 기다리고 잇던 현수와 함께 형광판 쪽
으로 이동했다.
지수가 그제서야 그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따라갔다.
이때 입구에서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스트레치카가 빠른 속도로 들어왔다.
그 위에는 택시 기사 복장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의사들 몇몇이 그쪽으로 뛰
어갔고 지민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에 와 있던 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깜짝
놀라는 눈으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물었다.
"밥 먹었어?"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가 다짜고짜 그의 소매를 붙들고 잡아끌었다. 그는 끌려가면서 현수에게 소리쳤다.
"이봐, 나머지 일 좀 부탁할께!"
현수가 싱긋 웃으며 한 쪽 손을 들어 보였다.
지민이 사정하듯 지수에게 말했다.
"지수야, 너 이러다가 옷 찢겠다. 이것 좀 놔. 따라갈 테니까 걱정말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소매를 놔 주었다.
"말을 들어먹어야 강압적인 행동을 않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에 살짝 눈을 감으며 얼굴을 돌려 외면했다. 앞장
서서 또각또각 소리내며 걸어가는 그녀를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따라갔다.
그녀는 지민을 벤치에 앉혀 놓고는 혼자서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표지수, 간단한 걸로 부탁한다."
잠시 후에 그녀가 나와 그에게 초코파이 몇 개를 던져 주고는 되돌아가서는 자판기 커피
를 두잔 뽑아왔다. 그녀는 그의 곁에 앉아 커피 한 잔을 건네 주었다. 그는 먼저 초코파이
의 껍질부터 벗겼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이었지만 아직 따스한 햇살이 그들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가을이라
바람이 조금은 스산하게 느껴지면서도 아직까지는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정면을 향한 채 이야기했다.
지수가 물었다.
"입원한 교수님들은 어떠셔?"
"최 교수님은 위를 60% 정도 잘라냈고 정 교수님은 한달쯤 더 쉬셔야겠다던데."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일복 터졌구나."
지민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지수도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시험 준비는 잘돼 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사람은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고서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과장님이 날 만나 보래?"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졌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민이 발 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살린거 아냐... . 그냥 죽을 운명이 아니라서 환자가 스스로 버텨 낸 거지."
지수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는 저녁
햇살의 오렌지색 광선이 똑똑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지수의 얼굴 한 쪽을 불그스름하게 물들
이자 그나마 부드럽게 보였다.
그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녀가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왜?"
"아냐... ."
"뭐가?"
"고마워."
"뭘?"
"우리 수술 스케줄 잘 잡아 줘서... ."
지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건 원칙대로 잡는 거야. NS라고 특별히 챙기는 거 없어."
지민은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튼... ."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 여자 퇴원했어?" 그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국회의원 딸인가 있잖아... . 너랑 결혼한다고 퇴원 안하겠다고 생떼를 썼던 애... ."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퇴원했어."
그녀가 비꼬듯 말했다.
"포기했대? 너 꼬시는 거... ?"
그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야겠다."
그녀가 일어선 그를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인간하고는... 그래, 가!"
지민은 커피잔과 빈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고는 병원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
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지수의 눈에 약간의 원망과 함께 서운함이 서렸다. 그는 벌
써 사람들 사이에 묻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항상 저런 식이었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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