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교회 장로와 전도사와 몇 사람의 성도들과 함께 그들을 따라 장지로 갔다. 아침 일찍 출발을 했음에도 점심때가 넘어 장지에 올라가는 산기슭에 도착을 했는데 거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장지까지 가는 길목에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길이 없어 차가 올라 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많이 온 비로 인해 난관에 난관이 겹쳤다. 그렇다고 여기서부터 관을 운구할 수도 없었다. 차에서 내려 차를 밀기도 하고 길을 만들어 가면서 4시간에나 걸려 겨우 장지에 도착을 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늦은 시간에 관을 하관 했다. 그리고 하관식 예배를 들이려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죽은 사람의 삼촌이 되는 시골 노인네가 술을 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관식 예배를 못하게 했다. 재래식으로 장례를 해야지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만하기도 했다. 그 집안에서는 한 사람도 주님을 믿지 않았고 오로지 시집을 온 며느리만 주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 였다. 주변의 사라들이 간신히 말려 하관식 예배를 드리긴 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들은 오후 5시가 되어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 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유족들이 내려오지 않았다. 전도사를 시켜 알아보니 재래식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정말 힘들었다. 마침 서울로 가는 차편이 있어 그 차를 이용하고 싶었으나 전도사가 급히 볼일이 있다면서 내 의사도 묻지 않고 그 차를 붙들었다.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도착을 했을 때는 밤 12시가 넘어 있었고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다음날 2시에야 자리에 눞일 수 있었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은 한 가정의 장례에 온통 교회가 매달려 몸부림을 치며 지나가고 말았다. 교회에서는 사망한 사람도 그렇지만 유족들을 생각해서 이중 삼중으로 조의금을 거두어 힘에 겹도록 그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며칠 후부터 나는 몹시 견딜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강단에서 물을 홀짝거리며 계속 먹어대는 나를 본 권사가
[목사님 아무래도 이상해요. 병원을 가 보세요]했다. 나도 병원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의도 성모 병원에 근무하는 집사를 통해 진찰을 받았다. 검사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에 그 집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왔다.
[목사님 당뇨가 온 것 같은데요------]
그랬다. 나는 당뇨 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혈당의 수치가 최악이었다. 500-600이 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즉시 입원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병에서 놓여나지를 못하고 있다. 당뇨는 발병하기 5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된다고 하니 꼭 그 장례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여름의 과로가 발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집사는 그런 난리를 치르고 난 6개월 후에 종암동에 아파트를 세로 분양을 받았다면서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렇게 교회 일이 열심이던 여자 조카는 교회에 놔 둔 지갑에서 10,000원을 잃어 버렸다는 핑계를 대고 조금 후에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1년쯤 지냈을 때 어떤 일인지 모르나 종암동의 그 아파트에서 우리 교회 근처로 다시 이사를 왔다. 그들이 이사를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심방을 하려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깨끗이 거절을 당했다. 성도들은 그들을 교회로 대려 오지 못하는 목사의 무능력을 암암리에 질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