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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2일(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요한 20, 19-31
안 보고 어떻게 믿나요?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토마스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주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주간 첫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비밀리에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별의 식사를 기념하여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오늘의 발현은 그 집회 중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발현 때,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드레 뒤 토마스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같은 장소에 모였을 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여드레면, 일주일을 의미합니다. 이 두 번째의 발현도 주일의 집회에서 있었습니다. 토마스가 하는 고백,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하던 고백입니다. 그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발현하셔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에서 나온 것입니다. 긍 정적으로 한 번 말하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여 강조하는 유대인의 화법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숨결을 받는 것,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구약성서 창세기(2,7)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모상에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숨결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생명을 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도망갔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보여 주신 진리, 곧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잘 살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새로운 생명, 곧 자비를 실천하는 생명을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의 뜻
오늘 복음에 토마스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원후 100년 경,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는 이미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시대 신앙인들의 실태를 반영한 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시대 신앙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존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자기 생존의 의미와 과제를 읽어 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고 용서하는 분이면, 그 생명을 사는 자녀들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정체성이 바로 이 사랑과 용서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요한 복음서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의 자녀 됨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순을 대하는 방법, 자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산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밀림에 사는 동물의 처신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모르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세법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어린이에게는 성숙한 인간의 자유가 없습니다. 어린이는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를 미숙하다고 말합니다. 성 숙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미숙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사랑하지도 용서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미숙함을 넘어서, 스스로를 베풀며 사랑하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자유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분이 하신 실천에서 성숙한 인간이 지녀야 하는 참다운 자유를 보고 배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습니다. 선의의 사람이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불행하게 태어나서 불행하게 살다 가는 생명들도 많습니다. 정직하게 노력한 사람이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순들 앞에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 자녀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사랑과 용서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 질서를 실천하며 산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유와 질서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는 인류 안에 늘 있었습니다.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었던 인류역사는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 용서 안에 하느님은 인류와 더불어 살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비는 이유입니다. 토마스, 질문하는 제자 사람들은 토마스를 가리켜 믿음이 없고 의심이 많다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동료들의 말을 토마스는 믿지 못합니다. 나아가 그는 예수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봐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과연 토마스는 믿음이 부족하고 의혹이 많은 제자인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의심은 의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토마스는 "자기체험과 경험에 의존하여 자기 확신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야만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지극히 "감각적인 경험, 체험에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저 남이 하는 말을 듣고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런 비판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질문, 명징함의 지름길 토마스는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한 14,1-4 참조) 라고 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묵묵히 있는데 토마스만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토마스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은 안다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토마스는 진정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주님의 길을 알고 나면 그 길을 걸어가고픈 토마스의 원의도 느껴집니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의혹은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흐린 것을 투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혹이고 질문입니다. 그는 불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을 얻기 위해 의문을 갖습니다. 의혹과 불신은 구별됩니다. 불신이란 “하느님의 실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반면에 의혹은 “지적으로 하느님의 실재를 확신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의혹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의혹을 경험하지 않고서 성숙한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다가, 신앙을 갖게 되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신앙이 성숙되기도 합니다.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느님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우나무노가 한 말입니다.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토마스야,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철저한 자기 경험에 의존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신다. 그때, 토마스의 내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을까? 그는 예수님께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말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의 이 고백은 그때까지 자기 자신만의 경험과 지극히 감각적인 체험에 의존하며 확신을 추구했던 그의 사고의 한계가 무너지고, 동시에 그의 사고가 확장되고 새롭게 세워지는 소리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고, 그 확신에 찬 가슴 벅찬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감각적 체험을 넘어설 때 생기는 일 우리의 신앙은 감각적이고 실증적인 체험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러한 체험을 토대로 하면서도 체험을 넘어서게 합니다. 눈으로 봐야만,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만 우리가 믿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신앙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는 눈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만져서 알기 보다 더 분명하게 내 안에서 다른 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고 확신하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눈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고, 그 신뢰는 하느님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고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최성영 신부님 (요셉)
[생활 속의 복음] 우리는 평화의 선포자인가? 이제는 완연한 봄입니다. 농촌 일손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봄에 생명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 오늘 복음을 보면서 “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믿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죽었던 스승이 부활했는데 울음을 터뜨린 마리아 막달레나(요한 20,11),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기잡이 생활로 돌아갔던 제자들(요한 21,3), 실패한 모습으로 고향으로 향하는 이들을(루카 24,13-35) 보면서 그들이 눈이 멀었거나 귀가 막힌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변화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20,19).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이고 죽음은 죄로 인해 세상에 왔습니다. 죄와 두려움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평화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저의 주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두려움과 죄를 극복합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과연 제자들만 두려움에 빠져서 살고 있을까요? 엄청난 국방비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집 문단속을 하는 이유는요? 병원에 자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모두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최초 인류도 두려워서 하느님을 피했으며(창세 3,10), 후손인 우리도 두려움 속에 살게 됐습니다. 저도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10여 년 전 굉장한 두려움에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페루의 시골 산속 해발 3750m 고지에서 생활할 때였습니다. 우기에는 거의 매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길은 진흙탕이 됩니다. 길을 걷는 게 너무 위험해 거의 사제관 안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5개월 이상을 갇혀 지내자 ‘이렇게 살아서 뭐하지?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자신을 똑 닮은 자녀들이 있고, 아프면 옆에서 걱정해주고 약도 사다 주는 부인도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인가?’ 하는 허무함도 밀려왔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자 자살 충동까지 일어났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부인과 자식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도 찾아왔습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무의하고 흔적도 없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 나의 삶이고, 사제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물도 나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때가 되면 죽는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고민해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철학과 물리학, 그리고 역사학이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삶에 대한 철저한 묵상과 책에서 배운 인문학의 도움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주어진 삶의 여정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내 행동, 생각, 말 모든 것은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이라는 코드로 정리돼 다음 세대 유전인자로 전달되므로 영원한 죽음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우주 전체적으로 보면 ‘에너지 총량 불변의 법칙’과 ‘상대성 이론’에 의해 에너지와 물질이 서로 전환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현재로 마지막이 아니며 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또 인간은 ‘자유 의지’(마음과 논리)라는 영혼을 통해 진리와 정의, 평화를 추구하며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에너지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과거 4월에는 두려움 때문에 여러 사람을 죽인 이도 있었고,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한 훌륭한 우리의 이웃도 있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참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의지를 선물로 줍니다. 지난해 4월 16일 많은 사람이 두려움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준비도 없이 공포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손톱이 없는 시신도 많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마음이 아픈 이유는 그들이 공포에 떨었을 순간에 아무런 도움과 위로를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별했습니다. 제삼자인 저도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유가족은 어떠하겠습니까? 정치적인 이해타산, 국가적인 손익 계산이 우선인가요? 아니면 두려움에 죽어간 많은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선물하는 게 먼저일까요? 희생자 입장에서, 유가족의 처지에서 생각하면서 하나씩 우리가 해야 일을 실천해 나갑시다. “주님, 평화를 주소서!” -박재식 신부님(토마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8> 문화적 도전 1
사태 해결을 위해 세계인의 적극적 관심과 노력을 부탁했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과 공동체가 이와 같은 폭력과 살인 그리고 테러 행위를 규탄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당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를 남긴 베네딕토 16세 교황 말씀이 상기된다. 서로 다름 속에 존재하는 같은 백성입니다. 서로의 상이성 속에서도 공통의 역사를 지니며 공동의 합의된 결정을 지녀야 하는 같은 백성이라는 인식을 다시 구축해야 합니다 (‘세상의 질문 일곱 가지와 교황의 답변’ 중에서).” ‘세계화의 위험성’을 교황은 이렇게 지적했다. “수많은 나라에서 세계화는 고유한 문화적 뿌리의 급격한 훼손을 의미하고, 또한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으나 윤리적으로는 빈약한 외래 문화 사조의 침입을 의미합니다”(62항). 세계 속에서 당당히 자신들 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이것이 인류 문화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에 기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약소국가의 문화를 잠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경제적 부문에서 개방과 무한경쟁의 시대를 열었고, 그 결과 글로벌 기업은 무차별적으로 약소국가의 시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거대한 자본의 힘은 약소국가의 영향력마저 약화시켜 버렸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무한 탐욕과 자유주의 시장경쟁의 절대적 독재만이 세계를 장악해 버린 듯하다. 오로지 돈과 쾌락의 우상만을 좇는 문화를 양산했다. 교황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했다. 모두가 높은 경각심을 갖고 비판 의식을 높일 것을 주문한다. 무비판적 추종과 답습, 몇몇 초강대국 문화에로의 편입과 보편화가 올바른 세계화로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오늘날 가톨릭 신앙은 신흥 종교 운동의 확산으로 도전받고 있습니다. 일부는 근본주의의 경향을 띠고, 일부는 하느님 없는 영성을 제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흥 종교 운동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파고들어, 개인주의가 팽배한 문화 속에서 세속적 합리주의가 남긴 공백을 메우려고 합니다. 일부 세례받은 이들이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또한 특정 구조와 일부 본당과 공동체들의 냉랭한 분위기, 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단순한 문제든 복잡한 문제든 이에 대응하는 관료적인 태도에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많은 곳에서 행정적 측면을 사목적 측면보다 우선시하고, 복음화의 다른 형태들은 뒷전으로 물리고 성사 집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63항). 우리 한국의 사목자들이 깊이 반성해 볼 대목이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영적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신흥 종교를 통해 그들의 고통에 대한 즉각적 해결책을 찾고자 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교육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모두를 경험하면서, 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현재의 노력이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사목적인 면에서 다른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지, 평가해 볼 일이다. 가정과 혼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룬다. 이 부문은 다음 회에 다루어 보겠다. -홍기선 신부님 (히지노)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다
1957년 고아로 출생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12살 때 고아원에서 도망쳐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잡지를 읽고는 삶이 바뀌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중국집 배달로 월급 70만원을 받으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도왔습니다. 1.5평 고시원에 살면서 이십 년 넘게 피던 담배와 안 좋은 것들을 다 끊으며 절약하여 아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후원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2011년 배달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故 김우수씨는 남을 도우면서 자신의 안 좋은 습관들까지 고쳐지고 도울 수 있는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故 김우수씨는 가난한 아이들이 자기 처지처럼 느껴져 돕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눔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 2주일이기도 하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파우스티나의 ‘자비의 예수’ 그림을 공경할 것을 권하시며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정한 날입니다.
자비란 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상징됩니다. 피와 물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기에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내 것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 자비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로우면서 자기 것을 먼저 챙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명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모든 것입니다. 그 권한을 교회에 주시며 죄의 용서를 위해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교회에 맡겼는데 그 성령을 통한 성사를 베풀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 받은 성령 때문에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는 이유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말고 아낌없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라고 증언합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이 아무 것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근본구조가 ‘공동소유’였다는 것을 거의 잊었습니다. 나눌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자신의 재산을 더 늘려달라는 기도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하느님이 원하신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물질만능 주의는 우리나라의 경쟁적 교육과 사회구조에서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집니다. 공부는 다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 배웁니다. 외국에서는 이미 유산기부가 정착되어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은 어리석게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진 자들부터 얼마나 세습을 위해 피땀을 흘립니까?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는 사람에겐 신앙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지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주인으로서의 하느님은 내게 머무실 수 없습니다.
류시문 한맥 도시개발 회장은 기부천사로 유명합니다. 어릴 적 사고로 다친 다리와 청력의 문제까지 안고 있지만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하여 지금까지 총 30억을 기부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기부하기로 결정한 힘은 바로 대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 부부가 “너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남을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끊임없이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과 신뢰가 너무 고마워서 그 말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닮아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의 사람이 될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에게 비슷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는 세상의 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약속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믿어주셨다면 우리 또한 세상에 복이 되기 위해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나의 복을 먼저 챙길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자신의 돈으로 사서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살 땅을 마련하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자신의 아내 사라의 무덤을 샀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소유했던 최초의 땅이었습니다.
복이 되려면 가진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당신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소유의 백성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래서 자신의 것을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잘 살게 되었지만 그 공동소유의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28세의 한 젊은 엄마에게 이혼과 해고라는 두 어려움이 동시에 닥쳐왔습니다. 그녀는 생후 4개월 된 딸과 함께 어려운 시간을 버텨야만 했습니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우는 아기를 달래가며 카페에서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작가의 꿈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복지급여’라는 사회가 베풀어준 고마움이었습니다.
헤리포터라는 글로 1조원이 넘는 재산을 소유하게 된 그녀는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 자선재단을 설립하고 약 500억을 기부했으며 에든버러 대학에는 185억을 어머니를 앗아간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연구비로 기부했으며 익명으로 낸 책의 모든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바닥에 있을 때 영국의 복지를 통해 나는 일어섰습니다. 나는 영국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에 대한 애국심의 표현으로 영국의 납세자로 남고자합니다.”
한 사람도 나라에서 받았던 도움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재산을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데 우리는 우리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께 감사한 마음으로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에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해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해 주는 것입니다.
제가 ‘내 것, 내 것...’이란 말을 많이 쓸 때는 아프리카와 인도 친구와 방을 같이 쓰던 신학생 때였습니다. 그들이 저의 것을 마음대로 쓰고 돌려주지 않자 저절로 짜증이 나서 내 것부터 챙기는 버릇이 생겼고 말에서조차 ‘나의 것’이라고 자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아, 사랑이 사라지면 나의 것부터 찾게 되는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생명을 주셔서 생명을 바치셨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나누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나눔이 곧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우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착각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귑시다. 돈을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줄어듭니다. 나중에 그분이 물으실 것입니다.
돈을 더 좋아했는지, 하느님을 더 사랑했는지. -전삼용 신부님 (요셉)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 말씀 중에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는 말씀이 마음에 많이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불어넣어주시고 만들어주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의 경우에는 이런 체험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런 겁니다. 어제 하루 종일 바빴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볍씨 앉히는 작업을 했고, 오후에는 장례식장에 가서 돌아가신 할머님 장례미사를 봉헌했었습니다.
부랴부랴 섬에 들어와서 오늘 강론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사목회와 연수를 오신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기현아, 오늘 많이 힘들었지.. 걱정하지 말구, 오늘은 푹 자라~ 내일 강론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 신부님도 사목회 분들과 친교를 나누고 계셨기 때문에 많이 피곤하시고 힘드셨을 텐데, 강론을 해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감사히 그 말씀대로 신부님께 강론을 맡겨 드렸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요. 아마 강론을 쓰려고 했어도 잘 못 썼었을 겁니다. 책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참 감사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는 안개가 많이 껴서 배도 운항을 안 하고 시야가 많이 가리웠었는데요. 오후부터는 너무나 맑게 날씨가 개었었습니다. 그래서 2시간 정도 걸었는데요. 걸으면서 보여지는 소박한 풍경들이 저의 마음을 너무나 편안하게 해 준 거 같습니다.
논도 밟아보고, 맑은 하늘도 한 참 바라보고, 바다와 저수지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래 물과 나무... 그 이상 뭘 바라겠는가...’ 하면서 작고 소박한 행복을 느꼈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본당 부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요. 많은 시간 함께 해 주지 못하였고, 뭔가 더 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신자들을 위한 음식도 많이 남았고, 다른 친지들도 3일 동안 고생해서 오늘은 집에 가서 쉰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신자들과 함께 부회장님 댁에 모이게 되었는데요. 그 자리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중간 중간 더 많이 함께 해 주지 못하고, 위로가 되어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요. 함께 해 드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었습니다. 아마 바빴던 신자들도 그런 마음을 가졌을 거 같습니다.
어쨌든 그 자리가 저와 다른 신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평안하게 해 주었던 거 같습니다. 작은 일들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자리와 기회를 만들어 주셨던 거 같습니다. 그 일들이 저에게 다시 힘을 주는 거 같습니다.
‘평안함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가 보거라.. 신자들을 대해 보거라...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 보거라...’ 하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런 일들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주신 평안함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거 같습니다.
평안하지 않으면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고, 일을 해야 할 그 사람과의 진행도 자꾸만 미루게 되는데요. 그러지 않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저에게 작은 평안함들을 만들어 주시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감사하죠. 오늘 하루, 주님께서 만들어 주신 평안함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 일로 얻은 에너지를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신주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소변이 마려우면 어떻게 할까?
밑에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한다고 한다. “어이~” 그러면 모두 고개를 돌린다고 한다.
-김기현 신부님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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