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한줌에 실린 꿈
노 희 정
드디어 잘랐다.
드디어 줄 수 있다.
20여 년 동안 꿈꾸어 왔던 그 시간이 오늘 온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노희정은 생머리를 하고 항상 모자를 쓰는 여자로 통했다. 물론 4년이나 5년 만에 머리를 잘랐을 때는 잠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 외에 오랜 시간 머리카락을 기르며 살아왔다.
20여 년 전 어느 날 대중 매체를 통해 소아암이나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어린 소녀의 소원을 듣게 되었다. 그 소녀의 꿈이 가발이라도 좋으니 단발머리나 긴 머리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투병 중에 머리카락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그 소녀의 가슴도 또래 소녀 못지않은 감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단 머리카락을 기증 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머리카락에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해서는 절대 안 될 것, 즉 화학적 제품에 머리를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건강하고 청결한 머리카락만이 면역성이 떨어지는 환자에게 가발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쉽게 생각했다. 까지 것 그냥 길러 잘라 주면 되지 했었다. 하지만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술꾼이다. 술에 취하고 나면 그때부터 나라는 존재는 까맣게 잊고 술이 주인이 되곤 한다. 나는 작은 공처럼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못된 성질을 가졌다. 그런 행동들이 2~3년에 한 번씩은 달거리하듯 찾아 왔다. 전날 저녁 테잎이 끊길 정도가 되면 어느 샌가 길었던 내 머리카락은 이 나간 가위로 잘라 낸 듯 산산 조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후회해도 소용없고 잘린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기르는데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내 성질도 나이가 들면서 늙기 시작했다. 지천명이 넘더니 술도 약해지고 성격도 무던해진 것인지 5년 동안 머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동안 파마도 해 보고 싶고 염색도 해 보고 싶은 유혹은 많았다. 오랜 세월 생머리를 하고 있으니까 젊어 보이고 싶은 모양이라는 말도 들었고 처녀도 아닌 사람이 치렁치렁한 생머리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나는 평생에 꼭 한번은 이 꿈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머리카락은 한 달에 2cm에서 3cm 정도 자란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덜 자랄 수도 있다고 한다. 가발을 기증하려면 머리카락이 최소한 25cm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 머리칼이 단발정도 되게 하려면 길이가 최소한 70cm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한 프로그램에서 한 청년이 장발을 하고 있다가 삭발을 했다. 3년 넘게 머리를 길렀다고 했다. 그 청년도 나와 같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이번만큼은 꼭 해내리라 다짐했었다.
2015년 4월8일 오후 5시
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잘린 내 머리카락은 30cm가 넘었다. 새치 몇 개가 있는 머리카락을 포장 했다. 머리를 자르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가발을 만들어 소아암이나 백혈병 어린이에게 기증해 주는 업체를 찾아 보았다. 처음엔 한국 두피모발 관리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서는 ‘어머나’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어머나'란 '어린 암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의 줄임말로, '어머나 운동'은 일반인들로부터 25cm 이상의 머리카락 30가닥 이상을 기부 받아 항암치료로 탈모가 심한 어린이용 특수가발을 제작해 소아암 어린이에게 기부하는 운동이었다.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문의를 하는데 담당자가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친절하지 않았다. 내 머리를 자른 미용실 원장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그런 상황을 접해 보았다고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머리카락을 기증한다고 했을 때 그 정신을 헤아려 조금만 더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용실 원장이 한국 소아암 백혈병 모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친절하게 안내를 받았다. 25cm의 모발과 기증자의 전화번호와 이름 그리고 사연을 함께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난 머리카락을 한국 소아암 백혈병 모발 담당자 앞으로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내 머리카락이 모든 검사에서 통과가 되어야만 가발이 만들어 진다.
보잘것없는 내 머리카락 한 줌이 이름도 모르는 어느 꿈 많은 소녀에 전달되어 그 소녀가 건강하고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첫댓글 노희정 육필문학관 관장님~~!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
꿈 많은 소녀에게 전달되어, 유용하게 쓰여지길 바랍니다~~~^^
좋은 일 결실 이루셨네요.
사실 저도 작년에 레인보우재단에 기증려했는데 염색머린 안되더군요. 긴 시간과 정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