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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1720년 전후로 써낸 이 곡들은 종교적 엄숙함과 세속적 아름다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양 떼가 안전하게 풀을 뜯는 목가적인 아리아로 마무리되는 이 컬렉션이 독서 시간을 조용히 채워주길 바란다. 그림: 베르트 모리조 《독서》(Reading, 1873)
0:00 Prelude in G Major, BWV 902 – Johann Sebastian Bach
3:42 Keyboard Concerto No. 5 in F Minor, BWV 1056 – II. Largo – Johann Sebastian Bach
6:23 Cantata BWV 147 – Jesu, Joy of Man's Desiring (arr. Hess) – Johann Sebastian Bach
9:46 Cantata BWV 106 –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Actus Tragicus) – Johann Sebastian Bach
12:30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Minor, BWV 1043 – II. Largo ma non tanto – Johann Sebastian Bach
18:27 Cantata BWV 105 – Herr, gehe nicht ins Gericht: Aria. Wie zittern und wanken (arr. Thomas) – Johann Sebastian Bach
23:17 Cello Suite No. 1 in G Major, BWV 1007 – I. Prélude – Johann Sebastian Bach
25:44 Cantata BWV 208 – Was mir behagt, ist nur die muntre Jagd: IX. Aria. Schafe können sicher weiden – Johann Sebastian Bach
음악이 흐르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가만히 있는 것
십자가의 성 요한
영혼의 노래
20절, 21절
신랑
| 날개가 가벼운 새들, 사자들, 새끼 사슴들, 뛰어오르는 암사슴들 산, 계곡, 해안, 물, 바람, 열기, 그리고 밤에 경계를 서는 공포들이여; 부드러운 수금 소리와 사이렌의 선율을 두고 너희에게 엄숙히 명하노니 분노를 그치고 벽에 손대지 말라. 신부가 더욱 평안히 잠들 수 있도록. |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평화와 고요의 향연으로 인도하시어, 그녀의 낮은 본성과 높은 본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시고, 그녀의 모든 불완전함을 정화하시며, 영혼의 자연적인 능력을 이성에 복종시키시고, 모든 욕망을 억제하십니다. 이는 다음 두 구절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신랑께서는 허황된 상상과 공상이 이제부터 사라지도록 명하시고, 이전에는 많은 고통의 원인이었던 성급하고 탐욕스러운 성향을 제어하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기억력, 이해력, 의지력이라는 세 가지 능력을 그 목적에 맞게 완성시키시고, 기쁨, 희망, 슬픔, 두려움이라는 영혼의 네 가지 감정이 잠잠해지도록 명하시고, 이제부터는 절제되고 평온해지도록 명하십니다.
2. 이 모든 열정과 능력은 첫 번째 연에 사용된 표현들에 포괄되는데, 신랑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이러한 감정들을, 하느님께서 이 순간에 자신을 신부에게 영적으로 내어주심으로써 신부가 누리는 그 크나큰 감미로움과 기쁨과 용기로 다스리십니다. 하느님께서 영혼을 실제로 당신 자신 안에서 변화시키시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의 영향 아래에서 영혼의 모든 능력과 욕망과 움직임은 본래 지니고 있던 불완전함을 벗고 신적인 것이 됩니다.
| “날개가 가벼운 새들.” |
3. 이것들은 상상력의 산만함이며, 가볍고 빠르게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날아가는 것들입니다. 의지가 사랑하는 이와의 감미로운 대화를 고요히 즐기고 있을 때, 이러한 산만함은 피로감을 주고, 빠르게 날아다니며 영혼에게서 그 기쁨을 앗아갑니다. 신랑께서는 부드러운 수금의 선율을 두고 그들에게 엄숙히 명하십니다. 이제 영혼이 누리는 감미로움이 그토록 풍성하고 지속적이어서, 예전처럼 이러한 산만함이 영혼을 방해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분께서는 새들에게 명하여 영혼을 불안하게 하는 소란을 그치게 하십니다.
| "사자들, 새끼 사슴들, 뛰어오르는 암사슴들." |
4. 사자란 격렬하고 폭력적인 성질을 가진 마음의 모습을 의미하며, 이는 행동에 있어서 사자처럼 대담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어린 사슴과 뛰어오르는 암사슴”은 욕망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 속성은 소심함과 무모함 두 가지입니다. 소심함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드러나는데, 이때 마음은 낙담하여 안으로 움츠러듭니다. 이러한 점에서 영혼은 어린 사슴과 같습니다. 어린 사슴은 다른 많은 동물보다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더 내성적이고 소심합니다.
무모함은 일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 드러납니다. 이때 마음은 더 이상 움츠러들거나 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욕망하며, 자신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키려 합니다. 이 무모함은 암사슴에 비유됩니다. 암사슴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우 열렬히 좇기 때문에 달릴 뿐 아니라 그것을 향해 뛰어오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뛰어오르는 암사슴으로 묘사됩니다.
5. 그러므로 신랑께서는 사자들에게 명하여 그 격렬한 폭력성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분노의 격정을 다스리십니다.
새끼 사슴들을 달래시어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에 맞서 욕망을 강하게 하고, 암사슴들에게 명하여서는, 이전에는 사슴처럼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뛰어다니며 무엇인가를 갈망하던 불안한 욕망을 만족시키고 가라앉히십니다.이제 그 욕망은 부드러운 수금 소리의 감미로움으로 만족을 얻고, 사이렌의 선율이 주는 기쁨 속에서 평온해집니다.
6. 그러나 신랑은 분노와 욕망 그 자체에게 멈추라고 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정념들은 영혼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랑께서 멈추라고 명하시는 것은, ‘사자와 새끼 사슴과 뛰노는 암사슴’으로 상징되는 그러한 정념에서 비롯되는 괴로움과 무질서한 행위입니다. 이러한 무질서한 행위들은 이 상태에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 “산, 계곡, 해안.” |
7. 이것들은 영혼의 세 가지 능력, 즉 기억, 이해, 의지의 악하고 무질서한 행위들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극단적일 때, 또는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한쪽이 극단으로 기울어질 때 무질서하고 악합니다. 산은 높으므로 지나친 악행을, 계곡은 낮으므로 극심한 결함으로 인한 악행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해안들은 곧 높지도 낮지도 않지만 완전히 평평하지 않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곳은, 영혼의 세 능력이 참된 중용과 의로움의 균형에서 어느 한쪽으로 조금씩 벗어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대죄에 해당하는 극단적인 무질서는 아니지만, 이해, 기억, 의지에 있어서 아무리 미미한 경향이라 할지라도 소죄나 불완전함으로 기울어지는 무질서한 행위입니다.
신랑께서는 또한 참된 중용에서 벗어난 모든 행위를 삼가고, 부드러운 수금 소리와 사이렌의 선율 앞에서 멈추라고 명하십니다. 이러한 음악 소리들은 영혼의 힘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매혹하여 영혼이 진정하고 합당한 기능에 완전히 몰두하게 함으로써 모든 극단은 물론이고 극단으로 향하는 아주 작은 경향조차도 피하게 합니다.
| “물, 바람, 열기, 그리고 밤을 지키는 공포.” |
8. 이것들은 슬픔, 희망, 기쁨,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네 가지 정념의 감정입니다. 물은 영혼을 괴롭히는 슬픔의 감정으로, 마치 물처럼 영혼 속으로 밀려들어 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물이 제 영혼까지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람은 희망의 감정으로, 바람처럼 불어오며 지금 있지 않지만 바라는 것을 갈망합니다. 시편 저자는 “제가 입을 벌려 숨을 들이켰습니다. 당신의 계명을 갈망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즉, “제가 희망의 입을 열어 희망의 바람을 들이마셨습니다. 제가 당신의 계명을 희망하고 갈망하였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열기는 불처럼 마음을 뜨겁게 하는 기쁨의 감정으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졌나이다. 내가 묵상할 때에 불이 타올랐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묵상할 때에 기쁨이 넘치겠나이다.”라는 뜻입니다.
9. "밤에 파수꾼이 지키는 공포"는 영적인 혼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영적인 사람들에게서 대개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두려움의 감정입니다. 이러한 공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어떤 큰 은총을 베푸시려 할 때, 즉 제가 앞서 말했듯이, 하느님께서 마음을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시고, 육체를 떨게 하시고, 감각을 마비시키시려 할 때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은총을 감당할 만큼 강하고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때로는 악한 영이 시기와 악의로, 하느님 안에서 평온하게 지내는 영혼을 볼 때, 그 큰 축복을 파괴하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평온을 깨뜨리려 애쓰며, 때로는 영혼의 내면에서 위협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너무나 평온하고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어서 그 속을 파고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적어도 감각의 영역에서는 외적인 산만함과 불안정, 감각적인 고통과 공포를 일으키려고 애씁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해서 신방 안에 있는 영혼의 평온을 흔들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10. 이것들을 '밤의 공포'라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악령의 소행이며, 사탄이 이를 이용하여 영혼을 어둠 속에 가두고 영혼이 기뻐하는 신성한 빛을 가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포들을 파수꾼이라 부르는 이유는 영혼을 깨우고 달콤한 내면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원인인 사탄이 언제나 이러한 공포를 일으킬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포는 이미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에 수동적으로 닥치며, 하느님에게서 오기도 하고 악령에게서 오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세속적이거나 자연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그러한 두려움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11. 사랑하는 이는 이 네 가지 정념에서 비롯되는 감정들에게 멈추어 쉬도록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분께서 부드러운 수금 소리와 사이렌의 선율이라는 감미로움을 통하여 신부에게 힘과 용기와 만족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감정들이 더 이상 영혼을 지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혼에게 어떠한 불쾌감도 일으키지 못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영혼은 그 위대함과 안정감을 누리게 되어, 이전에는 자신이나 타인의 죄로 인해 슬픔의 물결에 휩싸였던 영혼(이것이 영적인 사람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입니다)이 이제는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도 고통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연민이라는 감정조차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연민이 낳는 선한 효과는 완전하게 지속됩니다.
영혼의 미덕은 더 이상 약점을 보이지 않으며, 이제는 변함없고 강하며 완벽합니다. 천사들이 모든 슬픈 일을 완벽하게 이해하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연민의 감정 없이도 자비의 행위를 완전하게 수행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변화된 영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특정한 상황에서 영혼이 이 문제에 있어서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도록 허락하시는데, 이는 영혼이 사랑에 더욱 열렬해지고 공덕을 쌓도록 하기 위함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들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동정녀 어머니와 성 바오로와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이 세상에 있을 때의 일반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12. 또한 지금은 희망에 대한 갈망이 영혼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하느님과의 합일에 만족하여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더 이상 갈망할 영적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의 풍요로움으로 충만함을 느끼며, 비록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는 있지만,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이성과 영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강한 성향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복직관에 대한 갈망조차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13. 영혼을 이전에는 다소 격렬하게 움직이곤 했던 기쁨의 감정도 이제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풍성함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을 뿐입니다. 영혼의 기쁨은 이제 바다와 같아서, 그곳에서 흘러나가는 강물 때문에 줄어들지도 않고 그곳으로 흘러드는 강물 때문에 더 많아지지도 않습니다. 영혼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나는 샘.”
14. 나는 영혼이 이러한 변화의 상태에서 새롭거나 특별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은 영광을 받은 이들에게조차 주어지는 부수적인 기쁨(accidental joy)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수적인 기쁨과 감미로움이 이 영혼에게 낯설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이 평소에 누리는 그러한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럼에도 영의 본질적인 나눔에 있어서는 기쁨이 더 증가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을 영혼이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이미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은 새롭게 더해지는 어떤 것보다 훨씬 큽니다. 따라서 외적인 것이든 영적인 내적인 것이든, 기쁨과 즐거움의 어떤 대상이 영혼 앞에 나타날 때마다 영혼은 즉시 자기 안에 이미 지니고 있는 풍요로움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그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새롭게 더해진 어떤 것이 주는 기쁨보다 훨씬 큽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영혼의 소유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기뻐하시지만, 그 무엇보다 당신 자신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모든 선이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당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더해지는 모든 기쁨은 오히려 영혼에게, 참된 기쁨은 이러한 부수적인 원인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지닌 내적인 보화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내적인 보화가 부수적인 원인들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15. 영혼이 특정한 일에서 기쁨을 얻을 때조차도, 더 큰 가치와 기쁨을 주는 다른 일을 떠올리고 그 일에서 기쁨을 찾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즐거움의 추가와 그것이 영혼에 남기는 새로운 인상은 우연적인 성격을 띠지만, 영혼 내면에 있는 본질적인 근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의 변화에 이르고 성숙한 영혼은,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영혼들처럼 이러한 영적인 기쁨의 부수적인 것들을 통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새로운 기쁨을 더 받지 않으면서도 마치 새로운 기쁨을 받는 것처럼 보이고, 동시에 이미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영혼이 그 기쁨을 언제나 새롭게 맛보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계속 새로워지기 때문에 영혼은 마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더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혼은 그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16. 그러나 이 영혼의 품 안에서 하느님께서 때때로 일으키시는 영광의 빛, 곧 하느님께서 영혼으로 하여금 당신께서 그 안에 간직해 두신 기쁨과 풍요의 심연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누리게 하시는 어떤 영적인 친교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을 어느 정도라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마치 태양이 바다를 비춰 깊은 바닷속을 밝히고 진주와 금과 보석을 드러내듯이, 신랑의 신성한 태양이 신부를 향해 비추어 그녀의 영혼안의 풍요로움을 드러내어 천사들조차 놀라워하며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라고 말합니다. 이 빛은 영혼의 위대함에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혼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어 영혼이 그 안에서 기뻐하게 할 뿐입니다.
17. 마지막으로, 밤을 지키는 공포들도 그녀의 순결함과 용기,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 때문에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악령들은 그녀를 어둠으로 뒤덮을 수도 없고, 공포로 놀라게 할 수도 없으며, 폭력적인 공격으로 괴롭힐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고, 아무것도 그녀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들어가,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완전한 평화와 감미로움과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 적용됩니다. "안정된 마음은 마치 끊임없는 잔치와 같다." 잔치에서 모든 음식의 풍미와 모든 음악의 감미로움을 맛볼 수 있듯이, 신부가 사랑하는 이의 품에 품은 이 잔치에서 영혼은 모든 기쁨을 누리고 모든 감미로움을 맛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 그리고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복된 상태에 도달한 영혼이 경험하는 것에 비하면 항상 부족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평화에 이르게 되면, 사도의 말대로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그 상태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부드러운 수금 소리와 사이렌의 선율을 두고 너희에게 엄숙히 명하노니.” |
18. 부드러운 수금 소리는 신랑께서 이 상태에서 영혼에게 전하시는 감미로움이며, 이를 통해 그분은 영혼의 모든 고통을 없애주십니다.
수금의 음악이 영혼을 감미로움과 기쁨으로 가득 채우고, 황홀하게 자신을 잊게 하여 모든 피로와 슬픔을 잊게 하듯이, 이 감미로움도 영혼을 온전히 사로잡아 어떤 고통도 영혼에게 닿지 못하게 합니다.
신랑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감미로움으로 너희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게 하라."
사이렌의 선율은 영혼이 누리는 일상적인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를 사이렌의 선율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이렌의 음악이 너무나 감미롭고 황홀해서 듣는 사람이 황홀경에 빠져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이 결합의 기쁨에 흠뻑 빠져 새롭게 활력을 얻어,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번뇌와 고통에 마법처럼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구절의 다음 부분은 바로 이러한 점들을 가리킵니다.
| “너희의 분노를 그치고.” |
19. 이것은 제멋대로인 행동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괴로움과 불안을 의미합니다. 분노가 평화를 어지럽히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일종의 폭력인 것처럼, 이러한 모든 애정 또한 그 움직임 속에서 영혼의 평화와 고요함의 경계를 넘어서고, 그것들이 영혼에 닿을 때마다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그러므로 신랑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그리고 벽에 손대지 말라." |
20. 벽(담장)은 평화의 영역이며 덕과 완덕의 요새입니다. 그것은 영혼을 지키고 보호하는 방어벽입니다.
영혼은 사랑하는 이께서 꽃들 사이에서 양식을 취하시는 정원이며, 오직 그분만을 위해 보호되고 지켜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아가서에서는 영혼을 "둘러싸인 정원"이라 부릅니다.
신랑께서는 모든 무질서한 감정들에게 '당신의 정원'이 지닌 영역과 그 벽에 손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 “신부가 더욱 평안히 잠들 수 있도록" |
21. “신부가 더욱 평안히 잠들 수 있도록.” 이는 신부가 사랑하는 이 안에서 누리는 평온과 감미로움 속에서 더욱 큰 감미로움을 누리며 기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영혼 앞에 닫힌 문이 하나도 없으며, 영혼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이 사랑의 감미로운 잠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가」에서 신랑께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노루와 들의 사슴들을 두고도 너희에게 엄숙히 명하노니,
사랑하는 이가 스스로 원할 때까지 그를 깨우지도, 흔들지도 말아라.”
노트
신랑께서는 당신의 신부를 육신과 악마의 권세에서 구하여 자유롭게 하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신 뒤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기뻐하며 자신의 어깨에 메고 돌아온 착한 목자처럼 신부를 두고 기뻐하십니다. 또 등불을 켜고 집을 쓸어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이 친구들과 이웃들을 모두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말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영혼을 사랑하시는 목자이시며 신랑이신 그분께서는, 완덕에 이른 영혼을 당신의 어깨에 메고 계시며, 그 영혼을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그토록 갈망하던 포옹과 일치 안에 있게 하시는 모습을 바라보실 때, 놀라운 기쁨과 즐거움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기쁨은 그분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과 복된 영혼들도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아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보아라.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맞이하는 날,
그의 마음이 기뻐하는 날에 씌워 준 관을 쓰고 있는 솔로몬 임금을 보아라.”
그분께서는 그 영혼을 당신의 면류관, 당신의 신부, 당신 마음의 기쁨이라 부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혼을 당신의 팔에 안고 가시며, 신랑이 신부를 신방으로 이끌어 가듯 그 영혼을 이끌어 가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영혼의 노래 출처: https://ccel.org/ccel/john_cross/canticle/canticle.xxv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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