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苦를 풀다
음력 사월 초닷새, 아버님 기일이다. 부모님과 형님, 세 분의 기일이 4월에 열흘 간격으로 한꺼번에 든다. 수년 전부터 형수께 합사合祀를 권했지만, ‘형님이 생전에 아버님과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는데, 제대로 밥이나 먹고 가겠느냐’면서 고개를 저었었다. 형수의 묵은 포원抱寃을 큰 조카가 무슨 말로 어떻게 돌려세웠는지 오늘 처음으로 세 분을 함께 모신다.
주방과 거실에서는 형수와 질부가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형님이 돌아가신 바로 그 방에서 지방을 써 붙이고 제상을 차린다. 준비를 마치고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데 이십 년 전에 보았던 형님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형수의 다급한 전화에 허겁지겁 달려와 방문을 벌컥 열었다. 형님이 맨바닥에 새우처럼 웅숭그린 채 누워 있었다. 안색이 새파랗다 못해 까맣게 변해 있었다. 무릎을 꿇고 “형님”하고 부르면서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으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 혼자 넋을 놓고 앉아있던 형수가 그제야 통곡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시장에서 일하던 형수가 별안간 소름이 솟고 무언지 모를 섬뜩함이 덮치더란다. 부리나케 집에 왔더니 그렇게 숨져 있었다고 했다. 형님은 예순을 갓 넘긴 나이로 피붙이 누구도 임종하지 못한 채 서늘한 공기가 감싸고 있는 방을 혼자 허무하게 떠났다. 배웅하는 이 하나 없는 쓸쓸히 귀천歸天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으리라.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생전에 해원상생解冤相生하지 못한 한恨이 밟히지 않았으랴.
형은 평생토록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형은 일제 강점기였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비록 작은 산골이었으나 천재가 났다고 온 동네가 들썩했다. 한학자인 큰아버지와 달리 무학無學이었던 아버지가 총명한 장남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어려운 형편을 무릅쓰고 형을 읍에 있는 중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2학년 때, 아버지는 하숙비로 셈 칠 곡식을 지게에 지고 오십 리나 되는 미숭산 능선을 타고 넘었다. 어깨를 누르는 무게 따위는 장밋빛 꿈을 꾸느라 깃털 같았을 테다. 이윽고 도착해서 만난 하숙집 주인은 대뜸 왜 이리 늦었느냐고 다그쳤다. 하숙비가 석 달 치나 밀렸다고 짜증을 내었다. 형은 아버지가 다달이 꼬박꼬박 보낸 하숙비를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 몽땅 써버린 것이었다.
기가 막힌 아버지는 그 길로 형을 앞세우고 산 몇 개를 되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울고불고 용서를 빌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형의 학업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다음 날부터 형은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모습이 아버지의 성에 찰 리 없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형은 갈등과 반목의 매듭, 미움의 고※를 맺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두 돌 때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이사 왔다. 제재소에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서 했다. 형은 직물공장에서 기사 보조 일을 했고, 누나 둘도 거기에서 실꾸리를 감았다. 누나들은 쥐꼬리만 한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집으로 가져왔으나, 형은 친구들과 어울려 쓰고 빈 봉투 내미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두 분이 맺은 고는 단단해지기만 할 뿐,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해 설 대목이었다. 누나들이 우리는 이런저런 준비를 할 테니 오빠더러 쇠고기를 끊어 오라고 했다. 셋 다 같은 날에 월급을 받았는데 형만 빈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누나들이 고깃값을 건네며 오빠가 사 왔다고 말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섣달그믐날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다급해진 누나들이 형을 찾아 나섰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땅바닥을 두리번거리는 사내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니 형이었다. 고기를 사서 자전거 뒤에 싣고 왔는데, 어디서 떨어졌는지 모르겠다면서 깜깜한 골목길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당장 내일, 설날 아침 떡국 고명으로 쓸 쇠고기가 물 건너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형과 갈등이 있을 때마다 이 얘기를 두고두고 곱씹었다. 그렇게 부자 사이에는 고가 풀리기는커녕 하나씩 늘어갔다.
형은 장가를 든 후에도 자립할 형편이 되지 않아 함께 살았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것이 없이 그르치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해 받을 돈 대신 술 한 잔으로 탕감해 주기 예사고, 줄 돈은 남이 손 내밀기 전에 먼저 주어 버리니 짧은 밑천이 금방 거덜 나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나마 아버지가 날품 팔아 근근이 마련하여 대준 사업자금이었다. 급기야 조카들 교육이나 치송까지 아버지가 도맡았다.
부자는 성격의 결이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는 매사에 일 처리가 철두철미했으나, 형은 천성부터 느긋함이 넘쳐 대충 대충이었다. 칡은 왼쪽으로 감아 돌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꼬며 올라가다가 결국 서로 매듭을 짓듯이 갈등이 이어졌다. 다름의 뿌리는 아버지였고 형은 그 뿌리에서 비롯된 열매일 터였으나. 뿌리가 열매를 부정하고 열매는 뿌리를 외면했다.
달의 앞면과 뒷면이 하나이면서 저마다 다른 곳을 쳐다보듯 하는 사이, 아버님께서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한참 만에 내가 형님께 들렀더니 술 한잔하러 나가자고 했다. 형제가 처음으로 집이 아닌 술집에서 마주 앉았다. 형은 어렸을 때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에 일부러 두대바리※※ 행세로 평생을 보내기로 작정했다고 털어놓았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라 두대바리 노릇에 인이 박여 속내와 달리 자꾸 엇나가게 되었다며 술잔을 거푸 비웠다. 아버지를 보내고 나니 후회가 막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보란 듯이 성공하여 아버지께 내로라하고 싶은 마음이야 고래 아니면 굴뚝이지만, 뾰족한 두량이 없어 처자식까지 맡겨야 했던 형의 속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술값을 치르고 가게를 나서는 나를 형님이 불러 세웠다. 돈 있거든 좀 주고 가라고 했다. 얼른 돈을 꺼내 드렸다. 그때 지갑에 있던 돈을 몽땅 드리지 않고 지폐 몇 장을 남겼든가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물은 흐르다가 흙탕물이 섞이기도 하고, 다시 또 맑아지기도 한다. 형에게는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손을 넌지시 건네기도 했을 성싶다. 그러나 두 분은 살아생전에 끝내 손을 맞잡고 맺힌 매듭을 풀지 못했다.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린다. 오늘은 아버님, 어머님, 형님이 한날한시에 오신다. 한평생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원망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 그런 아버지에게 반발해 두대바리로 살다 가신 형님도 함께 메를 드시러 오신다. 두 분이 부디 화해하시기를 빌면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술 한 잔씩 가득 따르고 제물祭物을 드시도록 불을 끄고 나왔다.
거실에 켜둔 텔레비전에서 진도 씻김굿 전수자의 고풀이 공연이 한창이다. 이승에서 맺은 고를 풀지 못하고 저승으로 간 영혼을 달래주는 사설이 해금과 장구 장단에 맞춰 구슬프게 이어진다. 하얀 무명에 지은 고를 기둥에 묶어 놓았다가 풀어내는 춤사위가 자못 장엄하다. 무명베에 잔뜩 매여 있던 고가 하나씩 풀려 맺힌 데 없는 시원始原으로 돌아가는 굿춤이 꼭 아버님과 형님을 위한 몸짓 같다. 이승에서 부자가 지은 얽히고설킨 고 때문에, 평생토록 타다 만 잿불처럼 품고 살았던 아픔(苦)을 저 굿춤에 실어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후 안방에 들어서니, 제상 뒤에서 아버님께서 형님을 부둥켜안고 등을 토닥이는 모습이 내 눈물에 얼비쳐 보인다. 아버님은 당신의 눈에 차지 않는다고 몰아붙이기만 했던 게 모두 욕심이었다고 말씀하신다. 형님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당연한 바람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다면서 아버님의 품에 안겨 용서를 구한다. 부자父子의 늦은 화해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 어머니의 모습이 희뿌연 향연香煙 사이로 얼핏얼핏 흔들린다.
※ 고는 옷고름이나 노끈 따위의 매듭이 풀리지 않게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맨 것을 말함
※※ 두대바리는 일처리가 민첩하지 못하고 엉성하거나 실수가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
『좋은 수필』2023.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