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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 ★ (낙동강 ←운곡천) 봉화 (4)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① * [봉화 운곡천→ 명호 낙동강]
2021년 11월 18일(목) [별도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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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천 봉화(奉化)
봉화 문수산지맥의 동쪽
운곡천 수계의 춘양(春陽)과 법전(法田)
봉화군의 북쪽은 태백산에서 영주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1,000m가 넘는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백두대간 봉화의 옥석산(1,242m)에서 남으로 분기하여 군(郡)을 동서로 나누는 문수산(1,207m)—만리산(792m) 산줄기[문수지맥]를 경계로, 서쪽은 내성천(乃城川) 영역인 물야면, 봉화읍, 봉성면, 상운면 지역이고, 동쪽은 운곡천(雲谷川)·현동천(玄洞川) 수계의 춘양면, 소천면, 법전면, 명호면이 있으며, 태백산-청옥산 산줄기 동쪽에 석포면이 있고, 낙동강(洛東江) 동쪽에는 낙동정맥에서 발원한 재산천이 흐르는 재산면이 자리하고 있다.
봉화의 동쪽 운곡천(雲谷川) 수계의 춘양(春陽)과 법전(法田)에는 영남에서 보기 힘든 노론·소론 집안인 ‘진주강씨’ 동성마을이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恥辱)’을 당하자 세상을 등지고 이곳으로 은둔한 ‘태백 오현(太白五賢)’의 후손이다.
운곡천 상류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춘양 권진사댁과 만산고택
봉화의 춘양은 문수지맥의 동쪽에 위치한 운곡천 상류에 있다. 운곡천(雲谷川)은 동쪽의 각화산 지맥과 서쪽의 문수지맥 사이의 모든 산곡에서 발원한 물들이 모여 춘양(면)을 지나 소천1리―사미정 계곡을 경유하여 명호(면)에서 낙동강 본류에 유입한다. 춘양(면)에서 안동권씨 권진사댁과 진주강씨 만산고택이 있다.
안동권씨—춘양 권진사댁 성암고택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宜陽里)
운곡천(雲谷川) 상류인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권진사댁(權進士宅)’이 있다. 운곡천(雲谷川)은 낙동강의 지천으로, 백두대간 옥석산 동쪽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춘양(면)을 경유하여 명호(면)에서 낙동강에 유입한다. 운곡천 수계의 춘양면 의양리에 ‘만산고택’과 ‘권진사댁’이 있다. 권진사댁은 성암(省菴) 권철연(權喆淵, 1874~1951)이 살던 집이다. 권철연은 안동권씨 충재 권벌(權橃)의 32대손으로, 권중하의 장자이다. 1880년경 건너 마을인 운곡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건립하였다. 성암 권철연은 1888년(고종 25) 식년시 생원시에 3등 173위로 입격하였던 인물로, 이 때문에 봉화군 일대에서는 '권 진사'로 주로 불렸다. 지금은 35대손 권탄웅 부부가 살고 있다.
만석봉(萬石峰)을 배경으로 하여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권진사댁은 춘양목(금강송)으로 지은 가옥으로, 9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게 가로로 뻗은 사랑채 앞에 넓은 사랑마당이 있다. 그 왼편으로는 3칸의 서실(書室), 그리고 대문채와 마주하여 ㅁ자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정침의 양쪽 허리부분에는 토담을 좌우고 뻗어 내외마당으로 공간부분을 하고 있으며 동향 건물임에도 툇마루를 설치하는 등 남측 면을 적극 활용한 평면 구성이 돋보이는 주택이다. 대지 1,300평에 본채 56칸, 별채 3칸, 대문채 9칸으로 형성된 웅장한 집이다. 지어진 지 140년 되었고, 많은 문인 명사와 애국지사들이 이 집에 모여 독립운동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석당(石堂) 권상경(權相經)
파리장서 유림대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수제자
권진사택은 ‘독립유공자의 집’이다. 성암(省菴) 권철연의 장자인 석당(石堂) 권상경(權相經, 1890(고종27)~1958)은 1919년 파리평화회의 '독립청원서'의 대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수제자로 '독립청원서' 서명운동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리고 1925년 김창숙(金昌淑)이 만주와 내몽고 지역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 수익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만주에 있는 조선 청년들로 하여금 무기를 훈련하여 마침내 독립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에 필요한 자금 20만원을 조선에 들어와 영남지방의 부호들에게 거두기로 했다. 김창숙은 그해 6월 말 북경을 떠나 조선에 들어왔고, 그해 10월 권상경을 찾아왔다. 이때 권상경은 김창숙의 자금 권유에 응하여 총 1,000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고, 수배 중인 김창숙을 은닉해 주었다가, 1926년 5월 9일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장기간 고초를 겪었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1958년 7월 15일 별세했다. 고 권상경은 2005년 11월 17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 조선시대 가옥이면서 독립유공자의 집인 이곳 봉화 의양리 권진사댁은 고택체험 숙박도 가능하다.
진주강씨 — 춘양(春陽)의 만산 고택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봉화군 춘양(春陽)은 운곡천 상류에 있다. 춘양의 만산고택(晩山古宅)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이 1878년에 건립한 고옥이다. 한때 경상북도 북부지방 여덟 고을의 최고 부자로 99칸의 대저택을 지었는데, 지금은 80여 칸이 남아 있다. ‘아흔 아홉 칸 집’은 정3품 당상관 이상만 가질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권세 있는 집안임을 알리는 동시에, 고택에 수레가 드나들 정도로 재산이 많은 집임을 자랑하기도 했던 것. 춘양면에 소재한 부유한 집이라, 만산고택의 솟을대문은 규모가 매우 장대하며 고택에 사용된 목재 역시 춘양목(春陽木)이다. ‘춘양목’은 봉화의 춘양에서 자생하는 금강송(金剛松)을 말한다. 한양의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을 지은 목재이다. 만산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79호로 지정되었다.
대부분의 주택이 사랑채를 남향으로 하는데 비해 만산고택 본채의 사랑채는 동향이고 안방이 남향으로 되어 있어, 그 결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북쪽으로 나있다. 이로 인한 찬바람을 막기 위하여 중문이 안마당과 직접 연결되지 않도록 한 번 꺾음으로써 외부로부터 시선과 찬 공기를 차단했다.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고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만산고택(晩山古宅)의 또 하나의 특징은 솟을대문 옆의 ‘행랑채에 속해 있는 대청마루’이다. 주로 하인이 거처하는 행랑채에는 외부로 돌출된 공간이 없는 반면 이곳 만산고택에는 잡다한 일을 맡아 하던 사람들에게 잠시 쉬거나 접객할 수 있는 공간이 허락된 것이다. 이 집을 지은이의 실용적인 사고와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 고택은 11칸 규모의 긴 행랑채가 있고,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과 사랑채가 있고, 정면에 측면출입형의 "ㅁ"자형 본채가 있다. 사랑마당 왼쪽으로 ‘서실(書室)’을 두고, 오른쪽에 토석 담장을 두른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칠류(七柳)’는 두 가지 의미를 담아 지었다고 한다.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조선의 국운이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차용했고, ‘류(柳)’는 우국충신이었던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성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옛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함없는 춘양목을 사용해 오직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공간을 지었던 것이다.
만산고택에는 편액이 18개가 있다.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晩山’(만산) 현판과 김규진이 쓴 ‘白石山房’(백석산방) 현판이 걸려 있다. 별채 ‘七柳軒’(칠류헌)의 현판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글씨다. 그리고 서실(書室)에는 ‘翰墨淸緣’(한묵청연)이라는 영친왕이 쓴 친필 현판도 걸려 있다. ‘글로 맺은 좋은 인연’이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 당시 만산(晩山)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주택 구성을 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북 북부지방의 건축 특성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조용하고 온화한 집이라는 뜻의 ‘靖窩’(정와)는 당대의 서예가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강벽원(姜壁元)의 글씨이고,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른다는 의미의 ‘存養齋’(존양재)는 3.1운동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의 글씨라고 한다. ‘此君軒’(차군헌)은 조선후기 서예가인 권동수(權東壽)의 글씨로 ‘차군(此君)’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강용(姜鎔)의 고손자이자 현재 고택의 주인인 강백기(姜百基) 씨는 말했다. “강용 할아버지의 선대께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성대원군(興宣大院君)과 친분이 두터우셨어요. 대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신 후 성균관(成均館)과 사간원(司諫院)에서 요직을 두루 맡았던 어른이셨는데, 흥성대원군이 직접 ‘晩山’(만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손수 글씨까지 써주었다고 합니다.”
만산(晩山) 강용(姜鎔)
누대에 걸쳐 당상관을 지낸 명문가
만산고택(晩山古宅)은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이 봉화군 법전에서 춘양(春陽)으로 옮겨 살면서 만대를 내다보며 지은 집이다. 《정감록》에도 예언된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의 명당에 자리를 잡은 곳이라 한다. 이것은 만산고택의 집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풍수가 아니라 만산고택이 자리 잡은 주변 일대의 풍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장대한 백두대간 발치에 자리 잡은 춘양은 그 기슭 안에 아늑하게 싸여있는 형국이다.
강용(姜鎔)은 진주강씨로, 시조(始祖)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이다. 그의 아들은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강희중(姜淮中)인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킨 사람이다. 진주강씨는 조선조에 들어서 높은 벼슬에 올라 명문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만산 강용(姜鎔)의 증조인 강운(姜雲)은 통훈대부로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지냈다. 그는 문장과 경술로서 칭송을 받았으며 세상에서는 ‘송서(松西)선생’으로 불렀다. 조부 강필응(姜必應)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만대(晩對)이다. 부친 백초(白樵) 강하규(姜夏奎)는 이조참의를 지냈는데, 백씨(伯氏) 강한규(姜漢奎)와 계씨(季氏)인 강진규(姜晉奎)와 함께 벼슬을 하여 향리에서 보기 드문 장관을 보여주었다. 강용의 모친은 닭실의 안동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인 처사 권재홍(權載弘)의 딸이다.
강운(姜雲), 강하규(姜夏奎), 강진규(姜晉奎), 강용(姜鎔) 등 누대에 걸쳐 당상관을 지냈고, 안동사족과 교유하며 퇴계 집안과 대대로 혼반을 맺었다. 퇴계의 후손인 독립지사 향산(響山) 이만도(李萬燾)는 이 집안의 외손이다. 강진규(姜晉奎)는 예조참판 시절 위정척사 만인소를 주도해 퇴계 후손 이만손과 함께 전라도 절도로 유배되었다. 강용(姜鎔, (1846~1934))은 중추원 의관을 지내고 낙향 후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으며, 1910년 이후 망국의 한(恨)을 학문으로 달래면서 마을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그곳에 올라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묘갈명을 썼다. 망미대 주변에 와선정·태고정 등 아름다운 정자 10여 개가 있다.
‘버저이’—‘음지/양지마을’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버저이(마을)’은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法田里)’를 말한다. ‘버저이마을’은 진주강씨 집성마을로, 운곡천의 지천인 갈방산(712m)에서 발원하는 법전천(法田川)을 중심으로 서쪽의 ‘음지마을’과 동쪽의 ‘양지마을’로 나뉜다. 춘양의 만산고택과 버저이 양지마을은 윤증(尹拯)의 학풍을 계승한 소론계(少論系) 반촌이고 음지마을은 신흠(申欽)과 김장생(金長生)의 학맥을 이은 노론계(老論系) 반촌이다. 이곳 강씨 집안을 '버저이 강씨'라 부르는데 중앙의 노·소론 싸움이 이곳까지 영향을 끼쳐 한때 법전천에 ‘노론다리’, ‘소론다리’를 만들어 따로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버저이 음지마을에 진주강씨 ‘기헌고택’, ‘경체정’이 있고 양지마을에 ‘법전강씨종택’, ‘해은구택’이 있으며, 마을을 벗어난 곳에 ‘태백오현(太白五賢)’ 중의 한 사람인 잠은(潛隱) 강흡(姜恰, 1602~1671)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이오당(二吾堂)’이 있다.
강흡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이오당’ 전면의 처마 아래에는 ‘二吾堂’(이오당)의 현판과, ‘二吾’(이오)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이오(二吾)는 ‘락오천(樂吾天)하여 종오년(終吾年)한다’ 하여, ’자연을 즐기다가 생을 마친다‘라는 의미에서 명명하였으며, 정자의 주인 강흡(姜恰)의 호(號)가 이오당(二吾堂)이다.
태백오현(太白五賢)은 이오당(二吾堂) 강흡을 비롯하여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遇堂) 홍석(洪錫),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을 말하며, 이들은 태백산 아래 이곳 봉화에서 교유(交遊)하며 시사공론(時事公論)하며 시(詩)를 짓고 자연을 즐겼다.
버저이 음지마을 기헌구려(起軒舊廬)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버저이’[法田里] 음지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기헌고택(起軒古宅)은 1780년경 첨지 중추부사인 강완(姜浣)이 짓기 시작하여 그 손자인 강두환이 1845년 현재의 규모로 완성하였다. 기헌고택((起軒古宅)은 첫인상부터 강렬하다. 무려 5칸짜리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마당이 나온다. 정면에 6칸의 사랑채가 있는데 ‘起軒舊廬’(기헌구려) 현판이 걸려 있다. 마당을 바라보고 정면 6칸, 측면 7칸의 ‘ㅁ’ 자형 안채와 ‘ㄱ’ 자형 별채가 늠름하게 서 있다. 조선 후기 반가의 생활상을 담은 건축물로 평가된다.
기헌(起軒) 강두환(姜斗煥, 1781~1854)은 정조 5년(1781)에 출생하여, 순조 7년(1807)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으로 세자인 헌종(憲宗)을 가르쳤다. 헌종이 즉위한 후, 강두환은 세 차례 헌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서 함경도 함경도 경성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이후 임금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봉화의 ‘버저이’[법전리]로 낙향하여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헌종 11년(1845)에 이 집을 지었다.
기헌은 4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권세 있는 집을 출입하지 않았으며 일부러 벼슬과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국왕에게 대간(大諫,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으며, 특히 군덕을 닦을 것을 경계하면서, 헌종의 치정의 안이함을 보고 성학(聖學)에 힘쓰라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강직함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불손함을 지적하여 국문(鞠問)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를 두둔하면서 유배형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결국 유배 가게 만들었던 그의 상소문이 지금 기헌고택 솟을대문 앞에 〈上疏 ‘聖學疏 集句’〉(상소 성학소 집구)라는 제목으로 자연석 위에 새겨져 있다.
“일국흥망 만백성이 전하에게 달렸는데 강독공부 독초 같고 노는 것을 수이하니 나라위해 갈고닦을 임금공부 어찌할고? 좋은날씨 궁궐에서 뭐를 하고 계시는지 성군 공부 그만두고 한가하게 세월허비 저번 상소 답하신 것 어떻게나 실현할까 직언함은 신하도리 실천함은 님의 임무 두 개 모두 되지 않아 대간 직무 허무하네” (一國興替 萬姓休瘁 皆係於殿下一身 頓祛宴安之私 痛加儆戒之志 趲程督課磨礱尋繹 則自可以薰陶德性… 而今殿下倦於講讀視若烏啄之不可食 恬於遊宴不趐饑渴之易爲飮 如是而聖學何以進就乎 … 후략)
경체정(景棣亭)
법전천(法田川) 곁에 아주 예쁜 정자가 있다. ‘경체정(景棣亭)’이다. 경체정(景棣亭)은 조선 정조 때 예조좌랑과 승지을 지낸 강윤(姜潤, 1711~1782), 첨지중추부사 강완(姜浣, 1714~1794), 가의대부 강한(姜翰, 1719~1798) 등 3형제의 우애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강완의 증손자로 철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강태중(姜泰重, 1778~1861)이 1861년에 건립한 것이다. 강윤은 강흡(姜恰)의 현손이고 감태중은 강윤(姜潤)의 증손이다.
강흡(姜恰) 이래 3대째 벼슬을 멀리해 가세가 기울어질 즈음, 삼형제는 뜻을 모아 학문에 전념, 벼슬길에 올랐다. 강윤(姜潤)이 노론과 혼맥을 맺으면서 음지마을은 노론(老論) 색이 짙어졌다. ‘경체정’은 《시경(詩經)》소아편, '상체지화(常棣之華)'에서 따왔다. '형제간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는 뜻이 담겼다.
경체정 현판은 모두 네 개다. 정자 정면 예서체로 쓴 글씨가 추사(秋史)의 친필이지만 원본은 도난당하고 없다. 왼쪽 해서체 글씨가 철종(哲宗)과 고종 때 안동김씨의 세도 물결을 제대로 탄 김병국(金炳國)의 글씨다. 모두 노론 집안 출신 글씨로 음지마을에 있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전주이씨 송월재고택(松月齋古宅)
조선후기의 대학자 송월재 이시선
‘송월재고택’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학자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의 고택이다. 송월재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의 아호다. 이시선의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조 태종의 7남인 온녕군(溫寧君)의 8세손으로 부친은 추만공(秋巒公) 이영기(李榮基)이다.
송월재(松月齋)가 법전면 풍정리에 살림집을 짓고 서재를 만들어 학문을 연구한 이래, 그 후손들이 280년 이상 사용해 왔으며 100여 년 전에 지금의 법전면 버저이 음지마을로 종택을 옮겨 다시 지었다. 종택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6칸의 口자형 건물이다. 사랑채는 앞쪽에 있으며 5량가의 팔작기와 집이고 2통간(通間)의 사랑방과 2칸의 부엌, 안방, 대청의 상방과 이어져 2통간으로 된 안방이 안뜰 쪽을 보고 있다. 2005년 12월 2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6호로 지정되었다.
송월재는 ‘진흙 수렁에서의 명리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취할 바가 못된다’는 부친의 가르침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전국을 두루 탐방하고 돌아와 향리에 송월재(松月齋)라는 서재를 짓고는 두문불출 한 채 독서와 학문탐구에 전념했다.
송월재는 학문을 하되 육경(六經), 사서(四書)와 성리학을 최우선으로 하고, 한편으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등을 섭렵하여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그는 당시 외면 받던 노장(老壯),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통달해 일가견을 이뤘으며, 병서와 지리는 물론 심지어 점법에 관한 복서(卜筮)에도 정통했다.
이렇게 송월재는 성리학의 여러 서적과 사서(史書) ·병가(兵家) ·지리(地理) ·복서(卜筮)의 서적 등 학문 전반을 섭렵하여 당대 학문의 대가로 알려졌으며 호쾌 활달한 문장으로 유명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익(李瀷)이 쓴 이시선의 묘지명에 "경서는 물론 고금의 서에 박통(博通)하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금의 서적과 학문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송월재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널리 알려진 저술로는 《송월재집(松月齋集)》이 있고, 편저서에 《사보략(史補略)》 ·《역대사선(歷代史選)》·《경서훈해(經書訓解》·《칠원구의(漆園口義)》·《서전삼평(書傳參評)》·《시전람과(詩傳濫課)》·《전의병지(傳義騈枝)》 등과 손수 편집한 문집 《하화편(荷華編)》이 있다. 송월재 이시선의 고절한 학문과 효우를 기리기 위해 영남유림의 결의로 길이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不遷位)로 받들게 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의 토대를 마련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송월재(松月齊) 문집의 발문(跋文)에서 그의 학문을 두고 ‘함우지정(函牛之鼎)에 손가락 끝이나 한번 적시는 정도’로 비유했다. 다시 말해 송월재의 학문을 ‘한 마리의 소를 넣을 수 있는 큰솥’이라고 하면 자기 학문의 깊이는 그저 그 큰 솥에 손가락 끝을 약간 적시는 정도로 여긴 것이다. 이익(李瀷)과 같은 대학자가 송월재의 학문을 이렇게 여겼으니 그의 학문이 얼마나 광대심원한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버저이 양지마을
‘도은구택’ — ‘법전강씨종택’
버저이 진주강씨종택은 ‘도은종택(陶隱宗宅)’이라 한다.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치욕적으로 끝나자 도은(陶隱) 강각(姜恪)은 형인 강흡(姜洽)과 함께 버저이[법전리]에 은거하며 스스로 절조를 지키며 살았다. 1600년대 도사(都事) 강윤조(姜胤祖)의 아들인 형 강흡(姜恰)이 ‘음지말’에 거주하고 동생 강각(姜恪)이 이곳 양지말에 거주하여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여 ‘새마’로 불리었으나 지형적으로 양달에 위치하여 양촌(陽忖, 양지말)이라 하고 형이 살던 건너마을은 음지마을로 불린다.
그렇게 법전리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少論)으로 활동했던 강각(姜恪)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老論)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姜恰)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고,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도은종택은 현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숙종 1년(1675) 강각(姜恪)의 장자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이 안채를 지은 이후 사랑채 등을 증축하여 안채, 사랑채, 재청, 사당, 별묘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경에 도은의 6대손인 유계(柳溪) 강명규(姜命奎)가 중수하였다.
도은종택에는 ‘陶隱舊宅’(도은구택) 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 해서체 글씨다. 집이름이 ‘陶隱’이다. 동진(東晋)의 처사 도잠(陶潛, 陶淵明)의 이름 가운데 형 강흡(姜恰)은 도잠의 이름을 취해 잠은(潛隱)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반면 동생 강각(姜恪)은 도잠의 성(姓)을 취해 도은(陶隱)을 당호와 자호로 삼은 것이다. ‘도은’은 도연명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편액의 해서체 글씨는 강각의 7대손인 유계(柳溪) 강명규(姜命奎)의 장인인 동원(東園) 김희수(金羲壽)가 쓴 것이다.
종택은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주춧돌 삼아 우뚝 세운 기둥들은 아름이 넘어 보이며 규모가 웅장하다. 이 건물은 1639년에 창건되었고 성건재(省愆齎)는 도은공의 아들(찬)이 1710년 후학 지도를 위해 건립한 정자로 종택과 함께 관리되고 있다. 영조 46년(1798)에 수리하였으며, 60여 년 전에 다시 고쳤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ㅁ' 자형 살림집에 안채와 사랑채가 있고, 그 왼쪽에 재실과 사당이 있었다. 안채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사랑채보다 높은 곳에 있는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윗방·안방·부엌이 사랑채를 향하여 있으며, 부엌 왼쪽은 다락으로 꾸며 안방에서 통하게 하였다.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원형은 일부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문화재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 영남척사만인소(嶺南斥邪萬人疏)를 주도한 강진규(姜晉奎)는 춘양의 만산고택에서 강필응(姜必應)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법전의 도은문중으로 양자(養子)를 왔다.
만인소(萬人疏)는 1만명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대규모의 집단 상소를 말한다. 영남척사만인소에 남인이 본격적으로 상소에 참여하게 된 것은 1880년 김홍집이,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국내에 반입하여 고종에서 바치면서 국내에 유포되자 이에 자극받았기 때문이었다. 영남유생들은 수십 통의 글들을 검토하여 강진규의 영남척사만인소가 채택하였다.
버저이 양지마을
해은고택(海隱古宅)
해은고택(海隱古宅)은 법전의 진주강씨 강필효(姜必孝)의 고택이다. 강필효는 초명은 강세환(姜世煥).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海隱) 또는 법은(法隱)이다. 봉화 법전(法田, 버저이) 출신으로 아버지는 강식(姜植)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이중연(李重延)의 딸이다.
강필효는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증(尹拯)의 제자 강찬(姜酇)의 후손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스승으로 섬겼다. 정조 24년(1800) 집 동쪽에 중국 창주(滄洲)에 있는 주희(朱熹)의 경의재(敬義齋)를 모방하여 서실을 짓고,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성혼(成渾)의 「우계서실의(牛溪書室儀)」를 써서 걸고, 윤증의 획일도(畵一圖)를 준칙(準則)으로 삼았는데, 사방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순조 3년(1803) 유일(遺逸, 명망있는 산림선비)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842년(헌종 8)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 도사로 옮겼으며, 이듬 해 통정대부에 승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여러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천명(天命)은 이(理)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논하였다. 또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에 있어서 이선기후(理先氣後)·기선이후(氣先理後)가 모두 가능하며, 이기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는 이기론을 전개하였다. 저술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 《근사속록(近思續錄)》· 《소계회화록(素溪會話錄)》· 《석척록(夕惕錄)》· 《사유록(四遊錄)》· 《경서고이(經書考異)》 등이 있으며, 문집인 《해은유고(海隱遺稿)》가 있다.
명문 종가, 그 문화사적 가치
▶ 봉화는 고려 때부터 봉화금씨(奉化琴氏)와 봉화정씨(奉化鄭氏)의 향리였고, 봉화읍 거촌리 ‘쌍벽당’, ‘도암정’과 ‘경암헌고택’, 물야의 창녕성씨 ‘계서당종택’, 명호의 ‘도천고택’ 등 봉화 땅에는 사족(士族)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고택과 정자가 오늘날에도 금옥처럼 빛나고 있다.
2011년에 경상북도 내 종가 중 점필재 김종직 종가, 농암 이현보 종가, 충재 권벌 종가, 회재 이언적 종가, 퇴계 이황 종가, 소재 노수신 종가, 학봉 김성일 종가, 서애 류성룡 종가, 한강 정구 종가, 여헌 장현광 종가 등 10곳, 2012년에 보백당 김계행 종가, 송설헌 장말손 종가, 송재 손소 종가, 허백정 홍귀달 종가, 약포 정탁 종가, 호수 정세아 종가, 우복 정경세 종가, 갈암 이현일 종가 등 8곳, 2013년에 대산 이상정 종가, 응와 이원조 종가, 후조당 김부필 종가, 동강 김우옹 종가, 청신재 박의장 종가, 창석 이준 종가, 잠와 최진립 종가, 자암 이민환 종가 등 8곳을 선정하여 26권의 책을 출판한 바 있다.
경상북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종가와 현저한 종가문화를 보유한 곳이다. 경상북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종가 고택만도 120여 개소가 있으며, 비지정 종택을 포함하면 240여 개소에 달할 정도이다. 이번 경북의 종가문화 시리즈 4는 경상북도에 있는 종가 8곳(정양공 이숙기 종가, 허백당 김양진 종가, 지산 조호익 종가, 귀암 이원정 종가, 탁영 김일손 종가, 해월 황여일 종가, 경당 장흥효 종가, 옥천 조덕린 종가)을 선정하여 종가의 입지조건과 형성과정, 역사, 의례 및 생활문화, 건축문화, 종손과 종부의 일상과 가풍의 전승 등을 토대로 일반인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철저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각기 집필함으로써 종가별 특징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동안 종가는 양반문화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지만, 최근 급격한 산업화 및 종손 종부의 고령화 등으로 종가문화가 급격하게 훼손 소멸되고 있다.
종가(宗家)는 유교문화와 선비정신 그리고 현 시대가 요구하는 공정사회의 핵심 아이콘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온전히 지키고 실천해 온 한국정신문화의 정수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로서,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정신적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신과 혼을 되찾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한 종가에 남아 있는 문화, 전통, 음식, 역사 등은 새로운 문화콘텐츠이자 가장 한국적인 문화브랜드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운곡천 상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대한민국 산림청 주관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조성된 수목원이다. 총면적은 5,179ha로, 2015년 12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백두대간 옥석산(1,242m)-우구치[도래기재]-구룡산(1,346m) 산곡에서 발원하는 운곡천의 물줄기가 한 곳으로 모이는 춘양면 서벽리에 있다. 춘양에서 영월로 가는 88번 국도를 타고 운곡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목이다. 사방에는 해발 1,000m가 넘는 문수산-옥석산-시루봉-각화산이 솟아있다.
산림청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아시아 최대 규모로(면적 5179ha) 조성되었다. 한반도 산림자원을 지키는 대한민국 대표 수목원으로서 ‘백두산 호랑이’를 방사한 호랑이 숲을 비롯해 세계 최초의 산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 기후변화지표식물원, 고산식물 연구동, 야생화 언덕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천혜의 청정지역에 종자저장시설, 연구시설, 기후변화지표식물원, 전시 공간 등 시설이 설치되었다. 종자영구보존시설(Seed Vault)은 아시아권에 최초로 들어서는 시설로 지하 40m 터널형 구조이며, 항온항습 환경에서 200만점 종자영구보존이 가능하다. 수목원 전체 부지는 크게 생태탐방지구(4,973ha)와 중점조성지구(206ha)로 구분하여 조성되었다.
* [생태탐방지구] ☞ 생태탐방지구는 금강소나무를 대표 수종으로 하는 자연 생태를 그대로 보존하여 자연환경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생태탐방지구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550년 된 철쭉군락지와 꼬리진달래군락지가 있다.
* [중점조성지구] ☞ 중점조성지구는 진입 및 커뮤니티지구, 주제정원 전시 및 교육지구, 산림생물자원 연구지구, 산림보존 및 복원지구로 구분되어 있어 연구, 교육, 체험이 함께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측백나무를 이용한 미로원, 교과서원, 모험의 숲 등으로 아이들의 식물에 대한 흥미를 유도하고 세계문화자원식물원 등으로 세계의 민속생활문화를 익힐 수 있으며, 오색정원, 꽃나무원 등의 전시원에서는 식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테마식물원
* [진입광장] — 수목원의 진입공간으로 수목원에 대한 정보를 얻고 관람객이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 중심 공간입니다. 넓은 면적에 조성된 잔디광장을 비롯하여 트램승차장, 매점 등이 위치하여 있으며, 수목원의 주요 행사시 무대로 활용되기도 하는 공간입니다.
* [백두대간 자생식물원] — 기후특성에 따라 온대북부지역, 온대중부지역, 온대남부지역으로 구분하여 백두대간의 생태적 가치와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특히, 보전가치가 높은 희귀·특산식물을 수집 및 전시함으로써 백두대간 자생종의 유전자원 보전과 식물 진화 등의 연구를 위한 현지 외 보전원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대표 수종은 망개나무, 가침박달, 정선황기 등이다.
* [단풍식물원] — 다양한 색상과 아름다움을 지닌 단풍나무속 식물을 중심으로 수집, 전시 및 보전하는 공간이다. 섬단풍, 네군도단풍 및 복자기 등 다양한 단풍나무속 식물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대표수종은 꽃단풍, 네군도단풍, 노랑잎 병꽃 등이다.
* [관상칩엽수원] — 세계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아름답고 희귀한 상록침엽수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공간이다. 색상, 수형 및 질감 등을 고려하여 황금실화백, 직립노간주 등 목본식물 76분류군을 식재하였으며, 침엽수종과 잘 어울리는 초화 및 화관목류를 식재하여 관상 가치를 한층 높인 공간입니다. 대표수종은 구주소나무, 코니카가문비, 화백 등이다.
* [고산습원] — 기존의 지형을 살려 고산의 습지를 재현한 정원이다. 습지의 천이단계에 따라 생육하는 고산습지식물을 관찰하고 학습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수종은 솔비나무, 산수국, 한라부추 등이다.
* [호랑이 숲] — 백두대간수목원의 또 하나의 특징인 호랑이 숲에는 백두대간의 상징적 동물인 호랑이가 서식하는 숲을 재현하여 시베리아호랑이를 방사하여 사육하고 있다. 2017년 1월 25일 한·중우호협력사업으로 도입된 백두산 호랑이 2마리를 이전하였다. 2018년 5월 4일에 개장하였으며 현재 3마리(두만, 한청, 우리)가 살고 있다. 또한 버드나무, 금강송, 서양측백, 소영도리나무 등을 심었다.
본격적인 숲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좁은 면적이지만 그래도 기존 동물원의 철창 우리보다는 확실히 넓은 면적으로서 안에다 개울이랑 언덕도 만드는 등 나름 자연 그대로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했다. 관람객들은 5.5 m의 울타리 밖에서 호랑이를 관찰할 수 있다.
* [수변생태원] — 기존의 하천을 자연 그대로 보존한 수변체험 활동 공간으로, 수변 및 수생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트램 이동 동선을 따라 계곡과 산이 어우러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물억새와 달뿌리풀 등이 만들어내는 경관 또한 매우 우수한 전시원입니다. 대표수종은 돌배나무, 까실쑥부쟁이 등이다.
* [알파인하우스] — 세계 고산식물자원의 전시, 보전을 목표로 조성된 공간으로 고산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의 생육을 위해 3동의 고산냉실 및 다양한 암석경관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2020년 상반기, 1동의 냉실이 먼저 공개 되었으며, 한국, 중국, 몽골, 네팔 등 아시아 지역의 고산 및 아고산지대에서 자라는 희귀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 [야생화 언덕] — 수목한계선 부근의 광대한 고산초원을 재현한 정원으로, 기존의 경사지를 활용한 대규모 초화류 군락을 통해 고산지대의 대표적인 경관인 초원을 형상화하였습니다. 2019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자페스티벌 여름축제의 주요 무대로 활용된 전시원이다.
* [식물분류원] — 식물의 진화과정과 계통 및 분류 체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조성된 정원으로, 식물분류원을 통해 일반인과 전문가들의 분류학적 학술 정보 습득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대표수종은 황벽나무, 화살나무, 비비추 등이다.
* [모험의 숲] — 놀이 활동을 통해 자립심, 모험심 및 공동체의식을 기를 수 있는 숲 속 모험의 공간입니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식물 생태관찰 길, 나무 흔들다리, 백두대간 보물길 등의 놀이와 체험 활동 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각종 동물과 곤충 모형으로 산림생태계의 이해를 돕는 공간입니다. 대표수종은 복자기,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다.
* [잔디언덕] — 경사 지형을 활용하여 수목원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전시원으로, 방문객의 휴식공간으로도 활용한다. 또한 드넓은 잔디언덕과 높은 금강송의 대비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수목원 관람 안내
백두대간수목원 운영은 ‘화요일~일요일’로 주 5일 개방한다. 휴원일은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연휴’ 등이다. 계절별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에는 9:00~18:00(17시까지 입장 가능), 동절기(11월~2월)에는 9:00~17:00(16시까지 입장 가능)이다. 입장요금은 ‘성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이다. 편의시설은 푸드코트(식당), 편의점, 가든샵, 물품보관함, 유모차, 휠체어, 보행기, 보행보조기 대여 가능, 수유실, 장애인 주차공간 등이 준비되어 있다. 기타 문의사항은 (고객센터) 054-679-1000, (홈페이지) www.bdna.or.kr를 활용할 수 있다.
봉화십경(奉化十景)
끝으로 봉화군에서 설정한 ‘봉화10경’은 다음과 같다. 제1경 청량사 응진전, 제2경 춘양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제3경 닭실마을 청암정·석천정사(국가 명승60호), 제4경 석포면 백천계곡, 제5경 백두대간 구룡산 제6경 (승부—분천) 세평 하늘길, 제7경 축서사 석양(해발 800m), 제8경 소천면 고선계곡(태백산 발원 20km 원시림계곡), 제9경 청옥산 자연휴양림, 제10경 명호 매호유원지 등이다.
* [청량사 응진전(應眞殿)]▶ 청량산 금탑봉(金塔峰) 중간 절벽에 동풍석(動風石) 아래 절벽 위에 위치한 청량사 부속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맞배기와집으로 내부에는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과 16나한(羅漢)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16나한과 더불어 법당 내부에 공민왕(恭愍王, 1330~1774)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상(像)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공민왕의 청량산 몽진(蒙塵)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응진전은 천애의 절벽에 위치해 있는데 뒤쪽 절벽 위에는 동풍석이, 요사체 옆의 절벽 사이에는 감로수가 흘러나온다. 또한 법당 앞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59~1554)은 자신의 자를 따서 경유대(景遊臺)라 이름하였다. …♣ [봉화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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