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가 다시 어려움에 빠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렵게 얻은 중재안을 이사들이 번복하고 있다는 군요...하지만 다시 파업을 앞둔 CBS의 이사들은 집단으로 호주외유를 나섰다고 합니다. 그 돈의 출처가 궁급해 집니다.(혹자는 교계 선거를 앞둔 비자금이라 하는군요...)
여기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산 분을 소개 합니다. 모두가 같을 수도 없고 같아야 하지도 않지만 그도 분명 기독인 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정의는 흐르고
전 전국대학노조 위원장 장건 장로의 신앙과 삶
▲노동악법철폐 시위에 나선 장건 장로.
1983년 1월.
한국외대 용인분교 학생처로 근무지를 옮긴 장건 장로(50)는 성남 주민교회(이해학 목사)의 수요예배에 참여하고 이 목사와 만났다. 언젠가 신문에서 ‘지역을 섬기는 교회’라며 소개한 기사를 본 뒤로 꼭 찾고 싶었던 교회였다. 그 다음 주일부터 그는 주민교회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또 한 분의 하나님’을 만났다.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이었다. 이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공동체와 조직은 새로운 시각으로 비쳐졌다. 군사독재 시절, 대학교 학생처에 근무하면서 그는 시위를 통한 학생들의 요구에 귀 기울였고, 바르게 조정되도록 애썼다. 그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쌓이고 있었다.
1985년 4월.
퇴근길이었다. 교회로 가고 있는데 시위가 한창이었다. 노학연대투쟁이었다. 마침 사복경찰이 여대생의 머리 끄댕이를 잡고 연행해가는 걸 목격했다. 무턱대고 달려가 “인도적으로 할 수 없느냐”며 항의했다. 그걸 공무집행방해라며 함께 연행해 갔다. 첫 경험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확대됐다. 그가 주민교회의 청년부장이라는 걸 알고서 그날 시위의 배후조종자로 지목했던 것이다. 대공조사실에서 3일간 조사를 받으며 폭행을 당했다. 경찰서 앞에서 연일 그의 구속을 항의하는 주민교회 교인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다행히 풀려 날 수 있었다.
이것은 학교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학생주임이란 신분 때문이었다. 그해 5월 그는 이문동 캠퍼스로 발령이 났다. 일종의 문책성 발령이었다. 그에게 쌓인 정의는 그렇게 얄궂은 경험 하나를 남기며 또 다른 방향을 향했다.
1987년 6월.
6월 항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이른바 화이트칼라들의 노동조합 결성이 붐을 이뤘다. 그에게도 노조 결성의 압박이 자연스럽게 정의로 길들여진 양심을 자극했다. 한신대와 서강대가 대학노조를 만들었을 뿐 아직 대학노조는 흔치 않았다. 타자기 한 대를 구입해 집에서 발기문을 만들었고,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배포했다. 그해 10월 대부분의 대학 교직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조가 설립됐다.
대학의 3주체인 교수/학생/직원 중 그때까지 직원은 무력했다. 그것을 대등한 관계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노조활동을 통해 꾸준히 이어졌다. 얼마 안 가서 근로조건을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하는 정상적인 관계로 발전했으며, 그 기준이 교수들에게도 적용되는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경우 언제나 새로운 대가를 들여야 했다. 야간으로 보직이 이동된 것이다.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노조운동은 그의 삶을 채우는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했다.
1989년.
대학노조를 일반 기업의 단위노조에 멈춰선 안 된다는 목소리들이 거셌다. 행정서비스를 하지만 교육기관의 근무자로서 그들은 교육노동자여야 했다. 긍지를 갖는 동시에 긍지에 걸맞는 근무태도 또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국대학노동조합은 이렇게 해서 결성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준비위원장으로 일했다.
전국대학노조는 이제 직원들의 근로조건 개선 뿐 아니라 교육부를 대상으로 교육개혁운동에까지 그 운동 범위를 확장했다. 그는 전국대학노조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999년에는 소방수 역할을 위해 전국대학노조의 위원장으로 2년 간 일했다. 조직이 와해될 위기를 넘기자 재빨리 자진 사임하며 다시 대학으로 들어왔다. 명예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 일의 본질에 대한 관심으로 언제나 그는 누군가에게 명예를 양보했다.
1992년.
주민교회는 생명공동체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생태공동체의 탄생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에게도 공동체의 꿈이 자라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가정이 만나 하나의 가족처럼 사는 것,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실험이 필요했다. 그는 다른 한 사람의 장로와 함께 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하기로 했다. 2년으로 기간을 정해 놓고, 자녀들도 남자와 여자를 나눠서 한 방에서 생활하게 했다. 그는 큰아버지가 됐다. 이때의 생활이 지금도 모든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남아 있다.
생협운동도 이때 시작했다. 그해 여름 일본을 다녀오는 등 생협에 대한 많은 공부도 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1993년 주민교회 생협이 탄생했다. 노조운동에서의 경험을 살려 생협의 조직을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나아가 전원공동체의 꿈도 생겼다. 앞으로 다가올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이것은 필요하다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게 옳다 여겨지면 움직였다. 경기도 광주의 실촌면으로 아예 생활터전을 옮긴 것이다. 지금은 3 가정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
1998년.
이른 바 외대사태가 발생했다. 재단 측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학생들과의 연대 투쟁이었다. 이미 그는 1991년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투쟁 당시 파업을 주도한 대가로 재단 측이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다행히도 그는 언제나 장로라는 딱지가 붙어 다녔고, 이 때문에 개인의 공명심을 위한 행동으로 오해를 받지는 않았다. 파업 당시엔 주민교회 교인들이 함께 와서 음식도 제공했고, 예배도 드렸다. 그것이 그의 뒤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시켜 주었다.
외대사태 역시 그에겐 많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리도록 했다. 당시 노조위원장이었고, 학내 민주화를 위해 재단 퇴출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 투쟁이 성공하고 이제 관선이사에 의해 운영되는 대학으로 거듭나게 됐다.
2001년 9월.
모든 게 안정됐다. 그 안정이 도리어 불안하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서려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대가로 지불돼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매우 안정됐다. 몇 달 전부터는 이런 안정된 삶이 부끄러워 자신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매일 새벽 인근 교회를 찾아 새벽기도회를 갖게 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정부 관계자들과 일본의 생협들을 방문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 또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생협전국연합회 생협법개정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은 아예 이곳 사무실을 찾아 근무한다.
용인캠퍼스 그의 집무실에는 성구가 쓰인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장로고시를 준비하면서 새로이 깨달은 말씀이다. “고로 사람이 너희에게 베풀고자 하는 것을 이같이 사람에게 베풀라.” 이른 바 ‘기독교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이다. 말씀과 행함의 거리가 좁은 것을 일컬어, 삶이라 한다면 그의 신앙은 곧 삶인 셈이다. 복음은 그렇게 삶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복음다움을 꽃피우는 것이고 보면 내 속에서 복음은 휑하고 궁한 허상이고 만다. 마치 한국교회처럼.
박명철 (2001-09-05 오후 8:2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