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1〉 신(申·辛·愼)씨, 평산 신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3-11-12 21:38:24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신(申, 辛, 愼)씨
우리나라에 있는 신씨는 모두 3가지 성이다. 신(申), 신(辛), 신(愼)이 그것들이다. 그 중 ‘납 신(申)’을 쓰는 신씨가 제일 많은데, 2000년 국세조사에서 인구 69만8171명에 가구수 21만7591가구로 전체 성씨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 순위에서는 13번째로 밝혀졌다. 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등 10여 본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평산 신씨로 70%를 차지하며, 그 다음이 고령 신씨로 약 17%를 차지한다.
그 다음 ‘매울 신(辛)’을 쓰는 신씨는 16만명 정도로 전체 성씨에서 46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본관은 영산(靈山)과 영월(寧越)이며, 양쪽이 같은 연원의 분파로 알려져 있다. 시조는 고려 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신경(辛鏡)이며, 당나라에서 신라(경덕왕) 때 귀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후손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고려말(공민왕)에 세도를 부렸던 승려 신돈(辛旽)이 있다.
‘삼갈 신(愼)’을 쓰는 신씨는 중국의 천수(감숙성)에서 시작된 성씨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나라엔 거창 신씨 단본이다.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문종) 때 귀화한 신수(愼修)로 숙종 때 우복야(右僕射)와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냈다. 신(愼)씨는 인구 수에 비해 조선시대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愼丞善)과 그의 아들인 신수근(愼守勤), 신수영(愼守英), 신수겸(愼守謙)은 모두 정승 반열에 올랐으며, 왕의 사위 혹은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했다. 2000년 통계청에 따르면 거창 신씨는 총 1만3623가구에 4만3890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황해도 평산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한다. 신숭겸은 전남 곡성출신으로 무예를 닦은 후, 강원도 춘천(광해주)으로 이거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궁예가 세운 태봉에 무장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그는 활 쏘기 재주가 뛰어나서 신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태봉의 무장이 된 뒤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자,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 공로로 고려 개국원훈대장군(開國元勳大將軍)에 올랐다. 하지만 927년(태조 10년) 대구 공산동(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자, 왕건을 피신시키고 자신이 왕으로 위장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 덕택에 왕건은 무사히 살아나올 수 있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신숭겸에게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그 후 평산 신씨는 신숭겸의 14대손에서 25파로 갈리는데, 군수공파(郡守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이상공파(貳相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제정공파(齊靖公派), 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문희공파(文僖公派), 장령공파(掌令公派),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등이다. 그 중 사간공파, 문희공파, 제정공파, 정언공파, 한성윤공파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평산 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 8명, 대제학 2명, 공신 11명, 문과 급제자 186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2000년 통계청에 따르면 총 15만4612가구에 49만68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산 신씨의 유래와 연혁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평산 신씨의 시조는 신숭겸으로 왕건을 왕위에 올린 4명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궁예의 태봉에 들어와 무장이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양민(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활을 잘쏘고 무예에 능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가 평산을 본관으로 하사받게 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사에서는 평산 신씨를 하사받게 된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왕건이 장군들과 평주(평산)에 사냥을 나가는 도중에 기러기 세 마리를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맞힐 수 있는가?” 하니 신숭겸이 나서서 말하길, “저 세 마리 중 가리키시는 새를 쏘아 떨어뜨리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왕건이 웃으면서 세 번째 기러기를 지정하자, 그가 활로 쏘아 세 번째 기러기를 명중시켰다. 이에 왕건이 탄복하여 그 일대의 땅 300결과 평산을 본관으로 하사하였다.’
신숭겸이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목숨을 거둔 뒤 왕건은 삼중대광태사 개국공신에 추봉하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그의 아들 신보장을 원윤으로 삼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또 팔관회 때마다 신숭겸과 김락 등 전사한 공신들의 상을 만들어 두도록 했다고 한다.
신숭겸의 11세손인 신연(申衍)의 아들 신중명(申仲明, 병조참판에 추증), 신자명(申自明, 춘천부사 역임), 신헌주(申憲周, 상호군) 삼형제에서 가세가 크게 일어났다. 또 신중명의 아들 신집(申輯)은 전리판서와 수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아우 신군평(申君平)은 공민왕 때 좌대언과 어사대부에 올랐고, 막내인 신현(申賢)은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신집의 아들 신안(申晏)은 판관을 거쳐 종부시령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평산 황의산에 들어가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들 신개(申?)는 조선 초기 문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와 좌찬성, 우의정을 지냈다. 우참찬으로 있을 때 ‘고려사’ 수찬에 참여했으며, 세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의 후손들이 문희공파를 형성했는데, 신개의 세아들 신자준(申自準, 관찰사 역임), 신자승(申自繩, 대사성 역임), 신자형(申自衡, 집의 역임)도 모두 현달하였다. 신개의 증손 신상(申?)은 중종 때 호당(湖堂)을 거쳐 이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신상의 손자 신잡(申?)은 공신으로 평천부원군에 봉해졌고, 신잡의 아우가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申砬)이다.
신립 이후 문희공파에서는 주로 무인이 많이 나왔는데, 그의 아들 신경진(申景?), 신경유(申景裕), 신경인(申景?) 삼형제는 모두 무과 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특히 신경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으로서 무과 출신으로는 드물게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이다. 조선시대 무과출신 영의정은 신경진을 포함하여 2명이다.
이렇듯 평산 신씨 문희공파에서만 장신이 10여명 나왔으며, 신립의 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신완(申琓)은 장희빈(張禧嬪) 처벌 때, 서인의 소론(少論)에 속하여 온건론을 주장하였다. 또 여류문인이며 서화가이자, 조선의 대표적 여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신사임당(申師任堂)도 평산 신씨 문희공파이다. 또한 조선 후기 서화가인 신위(申緯), 신명연(申命衍) 부자가 있는데, 신위는 한시(漢詩)의 대가로 대사간, 도승지를 지냈다.
정언공파는 신개의 아우인 정언공 신효(申曉)를 파조로 하는데, 신효의 증손인 신영(申瑛)은 김식(金湜)에게서 글을 배우고, 수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었다. 정언공파 후손 중에 대표적 인물은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이다. 그는 인조 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의 4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의 아우 신감(申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왕조실록을 복간하는데 공이 컸고, 아들 신익성(申翊聖)은 인조 때 척화 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청(淸)나라에 잡혀갔다. 그는 아우 신익전(申翊全)과 함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밖에 숙종 때 명인 신정(申晸),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신응조(申應朝), 그리고 판서를 지낸 신응현(申應顯)도 정언공파의 후손들이다. 이렇듯 정언공파는 문희공파와 달리, 영의정 신흠 이후 문신집안의 길을 걸었다.
사간공파에서는 어사대부 신군평의 손자로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사간공 신호(申浩)를 파조로 하고 있다. 신호의 6대손 신점(申點), 신암(申?) 형제가 뛰어났는데, 신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그의 직계후손 신율(申慄)이 대북파(大北派)에 가담, 소북파(小北派)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게 되어, 인조반정 이후로는 쇠퇴하였다.
하지만 동생 신암의 후대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아들 신민일(申敏一)이 대사성, 현손 신사철(申思喆)은 중추부영사를 지냈다. 또 그의 아들 신만(申晩)과 신회(申晦) 형제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숙종 때 공조판서, 참찬을 지낸 신임(申?), 이조참의를 지낸 신심(申?), 현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신재식(申在植), 형조판서를 역임한 신사운(申思運), 예조판서였던 신석우(申錫愚), 신석희(申錫禧) 등도 사간공파의 후손들이다.
신점의 조카 신충일(申忠一)은 선조 때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를 서술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지도부기를 작성했으며, 근세 인물로는 고종 때 참정대신을 지낸 신기선(申箕善)과 판소리 여섯마당을 체계화한 신재효(申在孝)가 있다.
◆평산 신씨 근현대 인물
평산 신씨 근현대인물에서는 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申乭錫)이 있으며, 경북의용단장이었던 신태식(申泰植),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신팔균(申八均)이 있고, 신석구, 신정백, 신석균, 신덕균, 신덕영, 신현구, 신우현 등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으나, 유세 도중 숨진 신익희씨도 평산신씨 사간공파 사람이다.
그 외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신현확(국무총리), 신병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신두영(감사원장), 신직수(법무부장관), 신태영(국방부장관), 신현돈(내무부장관), 신상철(체신부장관), 신동원(외무부차관), 신태익(법제처장), 신응균(국방부차관), 신언한(법무부차관), 신상초, 신상식, 신경열, 신영국, 신옥철, 신하균, 신철균, 신옥철, 신윤창, 신동준, 신필균(이상 국회의원), 신정철(대법관), 신성철(대전지법천안지원장) 등이 있다.
또 학계에서는 신태환(서울대총장, 통일원장관, 건설부장관), 신석철(충남대의대학장), 신현천(경상대총장), 신태수(건국대총장), 신동훈(서울대 의대학장), 신사훈(서울대교수), 신국주(동국대행정대학원장), 신석균(한국발명학회 회장), 신일철(고려대 교수), 신동욱(연세대 교수), 신영복(성공회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신동관(태평양화학그룹부회장), 신덕균(동방유량 회장), 신훈철(삼성항공 사장), 신동호(조선일보대표이사) 등이 있으며, 기타 문화계에서는 신영균(영화배우), 신중현(가수), 신동우(만화가)씨 등이 있다. (전·현직 구분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