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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전과웅 (55세/정선)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전길남 박사. 일본 오사카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시스템 공학을 전공한 그는 산업화에 뒤쳐졌던 한국이 발전하려면 고급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박사학위 취득 후 한국으로 향했다. 1970년대 말 컴퓨터를 국산화하자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 전 박사는1982년 마침내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 사이를 연결하는 최초의 인터넷 네트워킹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터넷 역사의 시작점을 찍고 대한민국이 오늘날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놓은 전길남 박사. 그의 인생을 만나 보자.
전길남 박사 인터뷰 영상
1943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어요. 경상도가 고향인 부모님께서 일찍 일본에 정착하셨고 저는 대학교까지 일본에서 나왔어요. 2차대전 직후에는 누구나 고생을 한 시절이죠.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풍족하게 생활한 것 같아요. 재일교포로서는 여유롭게 살았던 편이었죠. 하고 싶은 것도 다 하면서 살았으니까요.
저는 활달한 성격의 평범한 아이였어요. 공부보다는 운동을 훨씬 더 좋아했죠. 등산, 수영 등 안 해 본 운동이 없을 정도였어요. 수영선수를 하느냐 마느냐는 고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영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영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영으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 수영 실력이 금메달을 딸 수준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어요.
수학을 좋아했어요. 그냥 수학이라는 과목이 가장 편하더라고요. 어린 시절, 형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는데 토론 주제는 항상 비슷했어요. ‘대학 졸업하고 은퇴하고 나면 뭐 하면서 살까?’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죠.
저는 “네팔에 가서 높은 산을 바라보며 수학문제를 풀면 행복할 것 같다.”고 대답하곤 했어요. 수학문제라는 건 무한대잖아요. 하루만에 풀 수 있는 문제도 있고, 답을 찾는 데 10년씩 걸리는 문제도 있고요. 높은 산에 올라가 그런 수학 문제들을 하나씩 풀면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보니 그게 인생이더라고요. 수학 문제를 푸는 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 거죠. 수학문제도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제가 시원하게 풀리면 굉장히 기분이 좋지만 어려운 문제를 만나서 답을 찾지 못하면 기분이 좋지 않잖아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대에서 수학한 전길남 박사. 그는 고교시절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했고, 그때부터 줄곧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조국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길남 박사, 가운데 일본 전통 복장을 입은 이는 담임선생님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제가 학생회 회장을 맡았어요. 그 당시 한국에서는 4·19혁명이 일어났고, 일본 역시 유사한 문제로 시끄러웠죠. 하루는 학생들이 모여 오사카에서 큰 시위를 벌였어요. 고등학생만 약 1만5천여 명이 참석했었고, 그 중 제가 다닌 학교 학생들이 가장 많았죠. 그러니까 학생회장이었던 제가 학생 대표로 자연스럽게 연설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연설문 중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라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지더라고요. 거기서 ‘우리나라’라는 것은 일본이라는 의미인데 제 입에서 그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머릿속에서는 ‘지금 남한은 4·19로 시끄러운데 내가 여기서 일본을 우리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연설을 하다 도중에 말을 멈추었죠. 그때 ‘아, 나는 결국 한국으로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결론적으로 일본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거죠.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길남 박사는 첨단 기술과학 분야인 전자공학을 선택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65년경, 일본의 어느 산에서 전길남 박사.
부모님보다 형제들끼리 그런 주제로 자주 이야기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어디에 취직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답도 결국 정체성과 연결이 되더라고요. 제가 보통의 일본사람이면 일본에서 취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저희 형제들처럼 교포인 경우에는 당시 일본 기업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들어가고 싶은 회사라고 해서 모두에게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니었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가는 걸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같은 고민을 한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처럼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고민과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었지만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친구들은 많이 힘들어했죠.
저는 대학을 졸업하면 조국에 가서 조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했어요. 어떤 공부를 해야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변에 묻곤 했죠. 그래서 공학분야를 공부하기로 했어요. 공학 중에서도 첨단 과학기술을 공부하면 한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죠.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가까운 공부를 하려고 보니 전산학이라는 전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게 되었죠.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어요. ‘지금 공학을 공부해봤자 취직도 쉽지 않다.’는 말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고생하며 공부해 놓고 무엇하러 한국으로 가려고 하느냐’까지. 그래도 저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워낙 수학문제 푸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전산학이라는 분야가 낯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죠. 60년대 초에는 연구실에서 컴퓨터도 만들었어요. 컴퓨터를 만드는 연구 자체가 굉장히 즐거웠죠. 특히 대학원 시절에는 훌륭한 교수님을 만나서 학업이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레너드 클라인락(Leonard Kleinrock) 교수님이었는데, 당시 UCLA에서 알파넷 연구를 시작하고 계셨죠. 알파넷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셨고 강의를 굉장히 쉽게 잘 하셨어요. 학교에서도 강의를 잘 하는 교수님으로 유명하셨던 분이었어요."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저렇게 쉽게 설명을 잘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어요. 항상 강의 내용에 맞는 예시 문제를 보여 주면서 가르치시는데 평소에 어렵게 생각한 문제도 쉽게 이해가 되었죠. 그때부터 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게 좋은 강의라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교수로서의 저를 돌아보면 설명을 잘 하는 편도 아니고 그분처럼 노력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교수님을 40년 만에 만났어요. 제가 2012년 인터넷 국제표준을 정하는 ISOC(인터넷 소사이어티)가 만든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그 교수님도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오르셨더라고요. 40년만에 스승과 제자가 한 자리에서 만난 거죠. 굉장히 감격스러웠어요. 그때 교수님께 학창시절 수업을 재미있게 들었던 학생이라고 인사를 드렸어요.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전길남 박사는 미항공우주국 제트 추진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한다. 결과적으로 그곳에서의 경험이 한국에 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2년 미국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높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휘트니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으로 뒷줄 가운데가 전길남 박사이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후에 우주지질학에 대한 연구를 했어요. 제가 우주지질학을 연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제가 수행한 연구는 수학에 가까운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었는데, 우주선이 착륙하면 어떤 식의 반응이 일어나는지, 온도는 어떻게 변하는지 등에 대한 연구를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거예요. 연구실에서 수학을 잘 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잘 하는 학생을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그게 우주 지질학과 관련된 연구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그때의 연구 덕분에 대학원 박사 학위 과정을 마친 후에 미항공우주국(NASA) 제트 추진 연구소 (Jet Propulsion Lab)의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도 지구에서 화성, 목성, 토성으로 보내는 우주선을 컴퓨터 네트워크 방식으로 지구와 연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을 했죠. 쉽게 말해 우주선 안의 컴퓨터와 우리가 갖고 있는 컴퓨터를 연결해서 우주 환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거예요. 컴퓨터 네트워킹을 통해 얻은 연구 결과물을 과학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죠.
사실 저는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바로 한국으로 올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박사학위 과정이 끝났을 때 아내가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해서 시기적으로 한국에 올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아내의 박사과정이 끝날 때까지 미 항공우주국에서 일을 하게 된 거죠. 결과적으로 그곳에서의 연구 경험이 한국에 오는 데에는 더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일본에서 대학을 마칠 때쯤 한국에 있는 대학교 선배에게 상의를 한 적이 있어요. ‘지금 한국에 가고 싶은데 가면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그 선배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일본 대학 졸업장만 갖고는 한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할 거래요. 그러면서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오는 편이 더 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미국으로 가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거예요. 저 스스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열정이 있었다기보다 한국에 가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어쩌면 미국행은 한국을 가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죠.
그 당시 한국은 돈도 없고, 시설도 없고, 경험도 없는 나라였죠. 한국의 경제력은 지금의 아프리카 가나 수준이었어요. 기술 수준도 컴퓨터 HW나 운영체제(OS)를 만드는 건 상상할 수 없었고 TV를 간신히 만드는 수준이었죠. "PC, 뭐에 쓰는 물건인고"하는 게 그 시절 분위기였죠.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인터넷은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였어요. 서울대 연구실은 비가 샐 정도였고, 인터넷은 물론이고 컴퓨터도 보급이 될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은 남들이 갖지 않은 걸 갖고 있었어요. 열정이었죠. 당시 선진국이 아니고서는 컴퓨터를 특화한 나라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은 국가적으로 컴퓨터 활성화를 추진하고, 이를 위한 전문 연구단지까지 만들었으니까 열정만큼은 정말 대단했죠. 그러다보니 저 같은 연구원들은 불가능한 연구환경보다는 어떻게 하면 과제를 성공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했어요. 가난한 조국이 기술발전을 위해 과학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을 보니 조국을 위해 공헌하겠다고 결심했던 제 꿈이 생각 나더라고요. 정말이지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은 대단했어요. 당시 한국 직장인의 월급은 필리핀보다 못한 수준이었는데 과학자인 저한테는 미국에서 받았던 월급과 유사하게 지급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자동차와 운전기사까지 전부 나라에서 지원을 해 줬으니까요. 과학자들에게는 연구 환경이 아주 좋았죠.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요.
전길남 박사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암벽등반을 한다. 한국인 최초로 유럽 3대 북벽 중 하나인 마테호른 등반에 성공해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어디를 짚고 어떻게 힘을 주는지, 순간의 판단과 집중력에 따라 전진과 추락이 결정되는 암벽등반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IT엔지니어의 길과 닮았다. 암벽등반 중인 전길남 박사의 모습.
저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네트워크 개발을 시작했어요. 인터넷 연구에 들어가는 통신비용이 1년에 2억~3억 원이 들어갈 정도로 막대했음에도 KT가 통신비를 전액 투자했죠. 대기업들도 글로벌 선진국의 사례와 기술을 참조해가며 연구를 도와주었어요. 1982년 5월이었는데, 구미에 있던 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개발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흘렀죠. 수십 명의 연구원들이 저를 둘러싸고 컴퓨터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어요.
컴퓨터 화면에 서울대학교의 영문 약자인 ‘SNU’라는 글자가 뜨자 연구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터뜨렸죠. 서울대의 PDP 11 중형컴퓨터와 전자기술연구소의 VAX 11/780 중형컴퓨터가 1,200bps 속도의 전용회선으로 연결돼 통신에 성공한 거였어요. IP주소를 할당 받고 이를 패킷방식으로 연결하는 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방식이었어요. 속도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컴퓨터끼리 접속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죠. 우리나라에서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해 통신에 성공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만약 그때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한국 네트워크 개발은 10년가량 늦어졌을 거에요.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1992년경 인터넷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네트워크 발전은 1990년 이후가 됐을 거예요.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절박함에 탄생했고, 그 결과 우리나라가 IT분야에서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끼우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한국이 성공할 거라는 예상은 못 했을 거예요. 기대는 물론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일본이나 호주, 중국, 대만에 대해서는 기대했겠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었거든요. 성공하고 나니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한국이 되는데 일본이 안돼?”라는 분위기였어요. 국내에서는 대학원생들이 굉장히 좋아했고요. 제가 네트워크 개발을 주도했던 것도 국내 학생들을 위해서였어요. MIT, 스탠퍼드 대학 등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우수 논문을 인터넷에 올리고 인터넷을 연결해 바로 받아가는 시스템 같이 한국 학생들도 좋은 연구 환경을 갖추게 되었으니 좋아할 수밖에요.
파리나 런던에 가면 기차역이 도심이 아니라 도심 주변의 변두리 지역 3~4곳에 퍼져 있어요. 그들은 산업혁명 이후 기차역을 만들 때 역이 지금 원자력 발전소와 같이 위험한 공간이라 생각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들이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안정성을 검증 받은 후에 일본이나 우리는 바로 도심부에 기차역을 세웠어요. 비슷한 이치일 수 있어요.
우리가 인터넷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다른 나라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야 해요. 인터넷 게임중독, 음란, 폭력 등 우리가 겪고 있는 인터넷에 관한 문제들을 혼자서 해결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봐요. 다른 나라들과 협력해야 해요.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은 나라도 분명 있을 거에요. 다른 나라보다 우리가 빨리 해답을 찾은 부분도 있을 수 있고요. 그에 대한 소통이 필요한 거죠. 인터넷 규제라는 주제를 놓고 과학ㆍ법률ㆍ인문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국제 심포지엄 등을 열어 사회적인, 그리고 글로벌한 합의점을 도출해 낸다면 한국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 허브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되어야만 인터넷 강국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나라가 되겠죠.
답은 간단해요. IT, 이공계 분야를 더욱 매력 있는 분야로 만들어야 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게요. 요즘 구글에서 일하는 제자들이 많아요. 구글에 취직했다고 제자들이 연락해 오면 축하의 인사를 전해주지만 왠지 아쉬움이 남아요. 최근 우리 나라의 IT기업의 새로운 상품이나 기술개발에 대한 열정이 예전만 못한 것 같고, 저 역시 자신 있게 제자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우리 기업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죠.
구글에서 근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물으면 직장 생활이 즐겁다고 이야기 해요. 우리도 그런 직장을 만들어야 해요. 구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국내 IT기업에 옮기게 한 후 직장생활이 어떤지 물었을 때 구글에서 일했을 때처럼 똑같이 즐겁다는 답이 나와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직장을 만들려는 노력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했을 때에도 뒤쳐지지 않는 좋은 직장을 만들어야죠.
그런 노력도 없이 IT, 이공계 기피현상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에게만 인기 있는 회사가 아닌, 세계 어느 나라 사람도 근무하고 싶어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한국 기업이지만 미국 사람, 중국 사람, 인도 사람 등 모두가 일하고 싶어하는 근무 환경을 만든다면 지금처럼 IT, 이공계 기피현상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해요.
분야를 잘 잡아야 해요. 한국 IT 벤처기업은 실력은 뛰어나지만 대다수가 내수 시장에만 집중해 규모가 작은 편이죠. 그러니 한계가 있어요. 시선을 세계로 돌려야 해요.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문화와 프로세스를 글로벌에 맞게 바꿀 필요가 있어요. 우리도 중국의 바이두ㆍ알리바바ㆍ텐센트나 일본의 소프트뱅크 같이 글로벌 10위 안에 올릴만한 인터넷 기업을 만들어야 해요.
예를 들어 국내에 잘 알려진 메신저 서비스는 국내에서는 모바일 패러다임 전환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으로 평가 받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시각이 조금 다릅니다. 이 서비스 회사가 혁신 벤처의 아이콘은 분명하지만 스카이프나 구글플러스 등 쟁쟁한 해외 서비스들과 겨뤄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란 의미죠. 이 회사는 국내에 만족하지 말고 실리콘밸리로 나가 R&D 투자를 끌어내고, 현지 우수 인력을 채용하는 도전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이공계 기피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해요. 우리나라 인구를 5천만 명으로 잡는다면, 국내 기업이 아무리 성공해도 잠재 수요 5천만 명을 넘어서지 못하죠. 하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50억 시장이 있어요.
저는 소프트웨어가 생산수단이 되는 시대에 사물지능통신(M2M)이 전략사업으로 급부상할 거라고 전망해요. 지금의 흐름으로 보면 인간에 의한 인터넷 수요는 70억 명으로 끝나는데, 이 시기는 10년도 채 남지 않았죠. 하지만 기계와 기계를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분야의 시장 전망은 밝죠. M2M 시장은 우리에게 닥칠 가장 벅찬 도전 중 하나예요. 우리나라가 SNS와 게임에 열광하는 사이 중국과 미국의 M2M 시장은 급팽창하고 있어요. 만질 수 있는 상품에 서비스와 솔루션을 적용하면서 부가가치를 키울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죠. 일례로 M2M 기술을 적용한 BMW 자동차는 일반 차량에 비해 가격이 40% 이상 높아요. 애플이 BMW와 같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 아이카(iCar)를 선보일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해볼 만 하죠. 그런 가정을 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M2M 시장이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길남 박사의 공헌은 해외에서는 더욱 크게 인정을 받는다. 그는 최근 인터넷을 국제적으로 대표하며, 관련 표준을 정하는 ISOC(인터넷 소사이어티)로부터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헌액된 인물 중에는 리눅스 운영체제를 만든 리누스 토발즈, TCP/IP를 개발한 빈트 서프 같은 IT계의 세계적 리더들이 있다. 2003년 1월 3일, 전길남 교수님의 회갑기념 논문출판 기념식 사진으로 왼쪽이 전길남 박사, 오른쪽은 제자인 KAIST 이동만 교수다.
인터넷학회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헌정식을 했어요. 인터넷 개발에 공헌한 사람, 활성화에 공헌한 사람, 세계화에 공헌한 사람 30명을 명예의 전당에 헌정한 것이죠. 저는 세계화 공로를 인정받아 그 자리에 갔어요. 국내에서는 저를 ‘인터넷 개발자’라고 말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인터넷 세계화 공로를 더 인정하고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대한 서운함이 있지는 않아요. 제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우리나라는 석유 파동 때문에 난방도 제대로 못할 때였어요. 그럴 때 UCLA에서 박사를 마친 저한테 보통 교수 월급의 3~4배를 제시하며 고국으로 들어오라고 했잖아요. 기사가 있는 차를 주고, 아파트까지 준다고 약속했고 약속도 지켜주었죠. 그 어려운 상황에서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최고의 연구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한 나라잖아요. 그런데 왜 서운함을 갖겠어요. 모두가 어려운 시대에 그만큼의 연구환경을 만들어 준 것으로 감사하죠.
승용차 없이 생활을 하는 것과 인터넷 없이 생활하는 것,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하면 무엇을 선택하겠어요? 아니,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울까요? 승용차가 없으면 대중 교통을 이용할 수 있지만 인터넷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사람이 많아요. 그만큼 인터넷은 사회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시스템이 된 거죠. 이처럼 인류에게 중요한 자원인 인터넷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 또한 지금 제가 안고 있는 숙제에요. 후세에게 인터넷이 꼭 필요한 시스템이 되어야지 짐이 되면 안되잖아요? 원자력도 개발 초기에는 최고의 기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원자력으로 인한 문제가 많잖아요. 인터넷이 훗날 우리의 후세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중요해요. 그래서 제 마음도 바쁘네요.
한국 인터넷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전길남 박사는 최근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몰두 중이다.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과학자들과 IT 시작 단계인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IP 표준, 정보 보안, 사생활 침해 등 인터넷 전반의 문제를 조언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열린 포럼(Africa Asia Forum on Network Research & Engineering)에 참석했다가 시장을 방문한 전길남 박사.
지금 한국 인터넷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몰두 중이에요.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과학자들과 IT 시작 단계인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IP 표준, 정보 보안, 사생활 침해 등 인터넷 전반의 문제를 조언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어요. 일 년에 두 번 정도 아프리카를 가죠. 서울 지하철 1호선 진행방향이 다른 호선들과 다른 이유는 영국의 표준을 따른 일본 방식을 들여왔기 때문이에요. 영국은 산업혁명 때 처음 발명된 전차 방향을 그렇게 정했던 것이고요. 최초 표준은 이래서 중요해요. 인터넷 인구가 지금 20억 명인데 10년 내 30억 명이 돼요. 한국이 겪은 기술적 문화적 시행착오는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세계적으로 인터넷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해요. 인터넷이 이 세상에 없으면 안 되는 인프라 시스템이 될 건데, 거기서 한국이 리더십을 가지면 좋겠어요.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제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걸 한국이 도와주어야 해요. 아프리카를 보니까 인터넷 관련된 조직이 3~4개밖에 없어요.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10개 정도 만들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더 나이 먹으면 못하니까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하려는 겁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연결하고, 동양과 서양을 묶는 작업을 한 사람. 젊은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그래도 좋은 시스템을 남겨 준 사람이다”라고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른여섯, 한국으로 돌아오다
1979년, 보장된 출세길을 마다하고 박정희 정부 시절 해외 과학자 유치 계획에 따라 한국 생활을 시작한 전길남 박사. 그는 독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미국 동료들은 모두 "미쳤느냐"며 한국 행을 만류했다. 그러나 전 박사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조국의 선진화에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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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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