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를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
젊은 사제 시절, 방황하는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별의별 문제성을 지닌 아이들과 함께 살다보니 매일이 사건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학교 담임 선생님 지갑을 털지를 않나, 도시 가스 파이프 라인을 타고 남의 집으로 들어가지를 않나? 수시로 보호자 자격으로 경찰서를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중에 가장 두려운 사건은 방화와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인명 피해라도 나면 뒷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야밤에 주인이 퇴근한 문구사 안에 침입했다가, 추워진 날씨에 불을 피우다가 화재를 냈습니다. 사건을 수습하느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경찰에서도 방화범은 강력계에서 담당합니다. 불 한번 제대로 나면 막대한 재산피해는 물론이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큰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방화라는 것은 반사회적이고 치명적인 범죄이기에 특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이란 일반 방화범처럼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무 이유 없이 질러버리는 그런 불과는 철저하게도 다른 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불은 ‘사랑의 불’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향한 강력한 구원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입니다. 눈멀고 귀먹은 우리 인간, 켜지지도 꺼지지도 않은 우리, 무기력해진 우리를 각성시키고 일깨우기 위해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한 예수님 사랑의 불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싫어하셨던 부류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큰둥한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쪽에서는 피리를 불고 춤을 추지만 그저 소 닭 보듯이 멀뚱멀뚱 쳐다만 봅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불러보지만 별 반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인(聖人)들은 우리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을 공통되게 지니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의 불이 지속적으로 활활 타오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체하지 못하던 사랑의 불을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도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인류의 횃불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면에 지니셨던 사랑의 불은 얼마나 뜨거웠던지 스스로를 완전히 연소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불신과 냉담함으로 가득했던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마음을 뜨겁게 만드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활활 불타오르게 하심으로써 동토의 땅이었던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사고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참으로 유한합니다. 한때 그토록 뜨거웠던 마음을 지녔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한줌 재처럼 그 마음이 자취를 감춥니다. 한때 죽고 못살던 그런 사랑이었는데 불과 몇 달 못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사랑이 변합니다. 활활 타오르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냉랭한 마음, 무기력한 얼굴로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변해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의 불을 활활 지피고 계십니다. 냉담했던 우리지만 그분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따스한 그분의 기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그분 사랑의 불을 우리에게 옮겨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당신 내면 가득 채우시고 차갑고 냉담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우리,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우리를 향해 뜨거운 당신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령의 불이 붙은 리더: 내외적으로 적을 만든다>
복음: 루카 12,49-53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해야 할 일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오로지 보수에만 있기에 일에서 흥미를 찾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이 고위직에 앉으면 그 회사나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로마 황제 네로(서기 37~68년)를 꼽고 싶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가서 보면 그의 목욕 욕조가 엄청나게 큰 붉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보다는 사치와 시, 연기 등에 더 관심을 가졌고 로마 대화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랬다고 뒤집어씌워 박해와 같은 수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에 대한 충실성이 부족하고 제국의 통치를 소홀히 하여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황제를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하는 근위대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원로원도 네로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의 체포와 잔혹한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소문을 들은 네로는 처형이라는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기로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를 잃고 있는가!”
무능한 리더는 내부에서만 적을 만듭니다.
그다음은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코닥 필름을 이끌었던 CEO 케이 위트모어(Kay Whitmore, 1990~1993)가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재임 동안 수익성을 유지하고 사진 필름 시장에서 지배력을 유지했습니다. 회사는 표면적으로 여전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고, 그는 특별히 무능하다고 인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코닥의 리더십은 디지털 혁명을 충분히 일찍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수익성이 높은 필름 사업에 너무 집중하여 디지털 사진에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위트모어는 업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비전과 사진의 미래를 향해 회사를 전환하려는 결단력이 부족했습니다.
코닥의 디지털 기술 전환 지연으로 인해 경쟁업체가 디지털카메라 시장을 주도하게 되었고 결국 코닥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코닥이 마침내 따라잡으려고 시도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회사는 2012년에 파산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지금 삼성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는 일하지만, 그래서 겉으로는 수익이 나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지만, 이런 사람도 결국 한 나라나 회사, 가정을 말아먹게 됩니다.
할 일만 하는 리더는 내외부에서 다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리더로 적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애이브러햄 링컨’의 사례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직 내내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도덕적 신념, 비전, 결단력 측면에서 그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준 탁월한 지도자의 모델입니다. 그는 노예해방까지 주장하며 남북이 전쟁하게도 했습니다. 사실 노예제도 해방 문제로 전쟁을 해야 할 때 적들에게만 반대를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내부에서도 반대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기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문에 희화화되었고, 정치적 경쟁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속한 당의 일부 구성원들로부터 멸시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가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에 계속 집중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보존하고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실천한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링컨이 오늘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감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우려를 뛰어넘고, 반대를 견디며, 더 큰 이익을 위해 용감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리더에게 강력한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도 불이 붙었고, 그 불의 열정은 자신을 짓누릅니다. 또 분열을 일으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한 사람은 큰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이 붙은 사람은 내부와 외부에서 다 큰 분열을 일으키지만, 결국 한 가정이나 회사, 나라를 부흥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델이 고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체의 리더를 뽑을 때 성령의 열정으로 분열을 초래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그 단체의 장래는 밝을 수밖에 없지만, 안정만 추구한다면 그 장래는 밝을 수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불을 질러 경건한 삶을 살게 하고 성령으로 타오르게 한다고 한다(로마 12,11 참조).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마음을 다니며 속된 것,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태워버리고 순수한 것으로 단련시킨다. 사랑은 불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더 좋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이 불을 세상에 지르셨다. 그래서 믿음이 밝게 빛나고 신심이 불타올랐다. 주님께서는 이 불로 사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셨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절). 이 세례는 피와 순교의 세례인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이 세례를 받으셨다. 이 세례는 어떤 얼룩도 더럽힐 수 없는 숭고하고도 복된 세례로, 당신의 죽음을 말한다. 짓눌린다는 것은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당신이 고통을 겪고 수난 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공경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면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서나, 가정 안에서나 갈등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첫째가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공경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자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면 부모를 지으신 분은 얼마나 더 공경해야 하겠는가? 자기 부모의 아버님을 몰라보는 자가 어찌 부모는 알아보겠는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게 되면 나의 이웃도 올바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것으로서 올바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느님의 집이거나 악마의 집이다. 이 둘의 싸움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신부님! 저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안 될까요? 세상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되는 것은 없고…. 하느님께서는 왜 저에게 이러실까요?”
몇 년 전, 어떤 형제님께서 식당을 3년 동안 했지만 결국 장사를 접고 제가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함에 대한 한탄이었지요. 그런데 이분께서는 재기에 성공해서 저를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당시에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냥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노력하는 중이야’라는 기분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력한다고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거든요. 제 마음을 다스리며 기쁘게 살아야 사람들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쉬지 않고 일하는 것만 노력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진짜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가짜 노력을 했다는 말씀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많은 이가 이런 착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가짜 노력으로는 힘만 들고 성과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삶만이 진짜 노력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 함께 살 수가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돈을 비롯한 물질적인 것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이를 얻기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질적인 풍요를 얻어야지만 행복과 평화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반해 주님을 따르는 삶, 사랑의 삶에서는 이런 물질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하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들에 맞서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남들은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무시하며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런 비난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는 사람에게 그런 비난의 소리와 행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질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갈라지더라도 어떤 행복을 좇아야 할까요? 사랑을 통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풍요보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기억 속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자리에 누군가를 둔다. 비록 끝났어도 불완전하지 않고, 떠나갔어도 꿈에서든, 서로의 마음에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를(하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주님께서
세상에 지르신 불꽃이
활활 타올라
우리의 심장에 옮겨 붙으면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네.
주님께서
세상에 지르신 불로
타오르는
믿음의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밝고 환하게 빛나는 거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평화의 반대개념은
갈라서고 맞서고 짖누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평화롭지 못하다면
아마도 누구와 갈라서 있거나
누구와 반목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짖누르거나 짖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은 나를 태우고 정화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꽃을 통해 사랑이 타오르게 합니다.
나의 삶을 무덤으로 만드는
내 안의 모든 잡념,
내 안의 모든 의심,
내 안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내 안의 모든 미움, 시기, 질투...
내안의 모든 욕망과 무질서한 애착
이 모든 것들을 태우지 않으면
평화가 깃들기 어렵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불살라 없애 주십사 청해봅니다.
성령의 불이여, 제 안에 오소서...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3,14-21
형제 여러분, 14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