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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5월14일 토요일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수도회]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응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15-17.20-26
† 복음 요한 15,9-17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려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
(사도 1,21-26 참조).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루카 10,1-2 참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 오늘의 묵상
성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에서 선택되어, 유다 이스카리옷이 내버린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의 초기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이와 제비뽑기에서 선택된 마티아는 무엇이 다를까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티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입니다. 재물과
부귀영화가 따르는 행운을 우연히 붙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할 사도로 선택된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스트로마타』라는 저술에서, 마티아 사도가
언행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마티아 사도는 유다 지방 또는 이집트에서 순교하였다고 초기 교회의
오래된 전승은 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려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신비로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외면적이거나 짐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서로 사랑하여라.
2016년 5월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5-17.20-26
복음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얼마 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 나라에 가신 한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꽤 오랜 시간을 성지에서 봉사활동을 하셨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서 조문하러 장례식장을 찾아갔었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봉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즉, 건강하고 모든 것이 다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암이라는
병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봉사활동을 하셨습니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봉사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자매님께서는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직접 치유를
해주시면 더 감사한 일이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죽음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셨고, 임종 맞으실 때의 얼굴은 너무나 편안하셨다고 이 자매님의
따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발버둥 친다고 해서 질병이나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내 곁을 떠날까요?
발버둥 칠수록 내 마음은 더 불편해질 뿐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는 말도 있듯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상하다면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봐야 누구만 손해일까요?
맞습니다. 자기만 손해인 것입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극복하기 위한 노력 역시 주님의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대신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원망만을 외치고
있을 때인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이겨낼 수 있는 노력과 믿음의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배반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마티아
사도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열심히 복음 선포에 매진하셨고, 결국
십자가형이나 참수형으로 참수되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분께서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부르심을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부르심이 싫다고
발버둥 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힘썼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쉽고 편한 것만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다면서
불평불만으로 주님께 원망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을 통해 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에는 많은 질문이 필요하지 않아. 사랑은 묻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거야.(파울로 코엘료)
성 마티아 사도.
스물여섯 명의 충고가 담긴 원고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이자 성공 컨설턴트의 배리 파버의 첫 책은 스물여섯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한 끝에 비로소 나올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원고를 거절당했을 때 크게 상심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역시 계속해서 거절당했고,
여섯 번째 거절당했을 때 출판사로 연락해서 자신의 원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직접 물어 보았습니다. 출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중에 비슷한 책이 많아 출간이 망설여집니다.”
그는 충고를 받아들여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신선한 아이디어가 담긴
원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 역시 다른 출판사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또 다시 원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렇게 거절당할 때마다 그는 낙담하기보다는 거절당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의 제안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지요. 그러다보니 원고의 질은 점점 향상되었고, 드디어 스물일곱
번째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했습니다. 출판사 측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당신은 스물여섯 번이나 거절당한 원고가 아니라, 유능한 편집자 스물여섯
명의 충고가 담긴 원고를 책으로 내는 겁니다.”
고통과 시련에 그냥 주저 앉는 삶이 아니라, 이를 딛고 일어나는 삶이 훨씬
더 멋있지 않을까요?
마티아 사도의 순교.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응답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5월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Saint Matthias
부르심에 대한 사랑의 응답
마티아는 배반자 유다 대신 사도들에 의해 뽑혀 사도단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분입니다(사도 1,15-26).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그는
일흔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루카 10,1-17). 그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날까지 계속 제자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뽑혔습니다(사도 1,21-22).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나누었으며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음을
뜻합니다. 이는 사도들에게 확신을 갖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원체험의 힘으로 피의 증거자가
됩니다.
우리도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을 증거하려면 예수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깊은 인격적 만남의 체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사랑하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지녀야 하겠지요. 이것이 뽑힌
이들의 혼이요 소명입니다.
예수님처럼 벗을 위해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그것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곧 ‘너’의 기쁨, 고통, 슬픔, 시련, 결점 등.
상대의 전 존재를 받아들이며 운명을 같이 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상대의 모두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자신 모두를 건네주는 삶입니다.
나의 마음, 생각, 행위가 상대편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의 절대적인 기준은 예수님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목숨을 다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분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는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사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사랑 없이 살 수 없고, 사랑 없이는 그분을 알 수 없으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곧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런 사랑을 지니고 살아갈
끈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5,16)는 말씀은
사랑도 믿음도 약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과의 우정관계가 제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졌으니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와 예수님의 친밀성의
원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은 신적이고
긴밀한 관계입니다.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아버지와의 신적 친밀성 안에서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15,13)
을 살아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부와
권력 등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헌신적 사랑의 모범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5월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그러고(기도하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사도 1,26)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이 옷을 입을까 저 옷을 입을까 저 사람을 만날까 말까
잠에서 깨어날까 더 잘까 이 사람을 뽑을까 저 사람을 뽑을까
...
하루에도 수없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선택은 어느 옛 광고문구처럼 10년을 좌우하고
평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여하튼 좋은 선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에 사도들의 보궐선출 방식이
그 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도들은 먼저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후보자를 선택합니다.
선택의 변수가 많으면 실수할 가능성은 더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기준을 토대로 2배수로 압축하면 좋습니다.
문제는 둘 중에 어떤 것이냐의 문제이지요.
사실 이미 압축을 해 놓았기 때문에 둘 중 무엇을 선택도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야겠지요.
그렇다면 눈을 감고 내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적인 판단은 내려놓고 제비뽑기를 합니다.
동전으로 앞뒤를 가리든지 옛날방식으로 손바닥에 침을 뱉고
손가락으로 쳐서 침이 튀는 방향으로 하든지 아니면 홀짝으로 하든지
바둑돌로 하든지 가위바위보를 하든지... 우연에 맡기는 겁니다.
그걸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요 실수가 아니라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선택을 따라가면 됩니다.
끝~~
단순명쾌하게 신택의 결정을 잘 내리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모든 불자들께 성불하시길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5월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 16)
주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할 우리들의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주시기에 거부할 수 없는 저마다의 역사입니다.
뽑힌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뽑힌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주님과 소통된다는 것입니다.
뽑힘은 새로운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뽑히는 여정을 통해 세상 전부라고 여겨온 것이 세상 전부가 아닌
착각이었음을 깨닫게됩니다.
'뽑아 세웠다.'는 말씀 안에서 가장 절실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 뻗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당신 친히 뽑으시어
올바른 곳으로 옮겨 심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사랑으로 뽑힌 이들은 끝내 사랑으로
뽑아주신 주님께로 돌아갈 것임을 믿습니다.
뽑힌 이들은 먼저 부여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합니다.
소명을 향해 나아가야 할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친히 뽑아 세우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첫마음을 새로이 세우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정신을 표현하듯 주님께서 뽑아 세우십니다.
뽑아주신 주님을 다시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 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부활 제7주간 토요일
2016년 5월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 15,9-17
오늘은 모처럼 산행을 하려고 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번거롭다는 이유로
산행을 못했습니다. 20년 전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하려합니다. 20대
청년들이 지금은 모두 중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볼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 시원한 바람,
깨끗한 공기를 마실 것입니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정겨운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산행을 위해 필요한 것을 몇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근심, 걱정은 모두 버려두고 산행을
해야 합니다. 산행 중에 근심과 걱정을 함께 데리고 가면 꽃의 아름다움을,
바람의 싱그러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죄인이
되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었고, 나중에는 군인들이 지키는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바오로 사도는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가택연금 중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느님께로 가는 산행과
같습니다. 때로 시련의 비가 내리기도 하고, 고통의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고, 고독과 외로움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면 우리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파도를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멀리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에 있는 꽃들은 멀리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 구름, 바람, 시냇물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미처 피지 못한 꽃도 있고,
색이 바란 꽃도 있고, 이미 시들은 꽃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도 비슷합니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삶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름도 있고, 점도 있고, 작은 상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웃도 너무
가까이에서 보면 허물과 단점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꽃은 분석하고 나누고 평가하면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만나는 이웃을 평가하고, 분석하여
판단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시적인 측면도
필요하겠지만 거시적인 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빛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눈이
좋아도, 빛이 없으면 우리는 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권위와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는 많은 허물이 있었고, 그릇된 판단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은총의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뜨거운 기운이 감싸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의
빛이 우리를 지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 같지만, 주님의 빛이 함께 하고 있음을 늘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좀 더 겸손해야 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땅으로 내려온 사람만이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군대에 가면 포복훈련이
있습니다. 철조망 아래에는 진흙탕입니다. 철조망 위로는 실탄이
날아다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군인은 낮은 자세로 철조망을 통과해야
합니다. 머리를 들면 철조망에 다치기 쉽고 옷을 찢겨 질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총알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낮은 자세로 기어가야 합니다. 삶의 시련도 그렇습니다. 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겸손하게 땅을 향하면 언젠가 하늘로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오늘 산행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것입니다. 서두를 것도
없습니다. 산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도 비슷합니다. 하느님은 항상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로 걸어가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
오늘 산행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께 온전한 마음으로 다가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억지로 하면 헛고생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5월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 15,9-17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 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 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부행정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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