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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이제라도 깨닫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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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제라도 깨닫는
사순 3주간이 되면서 전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전합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과부와 나병 환자만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인 나아만과 과부도 구해주신 분이라고 하여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성전 정화를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치우라는 말씀대로 잡것을 치웠다면,
주님 말씀을 듣고 민족 편견적인 믿음을 깼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인간의 잘못된 믿음들이 여럿 드러납니다.
우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민족 편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편견이 본래 나쁜 것이지만 편견적인 믿음은 더 나쁜 것이고,
편견도 다른 편견이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은 더더욱 나쁜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다른 민족의 믿음은 틀려먹었고 자기들의 믿음만 옳다는 편견,
하느님께서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고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으신다는 편견에서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사랑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믿음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셔서도 안 되겠지요?
나아만의 믿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많이 부족한 믿음이지요.
그는 치유를 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가는데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갔으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랄까 믿음으로 간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간 것이 아니라 종이든 엘리사든 인간을 믿고 간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엘리사를 믿었다는 표는
엘리사가 자기의 치유를 위해 적극성과 정성을
더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의사가 치유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사가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굳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의사가 얼마나 능력에 노력을 더하는지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의사를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으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정성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도 없고
자기 종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실 필요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또 요즘 자연 치유자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이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도 비칩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 강물이 더 좋다고 하고,
물로 씻는 세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이 치유해준다고 믿습니다.
나아만은 또 치유를 받기 위해 자기의 정성도 극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정성이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곧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들에게 밥을 줄 때 아들이 하는 짓 보고 줍니까?
예쁜 짓 하면 주고 미운 짓 하면 주지 않습니까?
먹고 싶어 하면 주고 먹기 싫어하면 안 주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주고 필요치 않으면 주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우리가 받는 조건임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한 나아만처럼 이제라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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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공부를 잘한다.
2등급: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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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기도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다른 면’을 직접적으로 찾는 것입니다(토마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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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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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자기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주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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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이일수록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심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집을 태울 수 있듯이, 사소하게 나간 말 한마디가 큰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농담처럼 사람의 신체에 대한 약점을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예뻐만 보이는 장미의 정원에도 자세히 보면 잎이 찢어진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고, 색이 바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몸매가 균형 잡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안타까운 사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우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더욱 삭막해 질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니 형의 반만 닮아봐라.’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에 훌륭한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이스라엘 왕은 먼저 불평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치유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의 부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부하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나병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제게 위로를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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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왜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할까요? 무엇이 예언자를 환영 못 하게 하는 것일까요?
예언자의 고향 사람들은 그 예언자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모습부터 말입니다. 어릴 적 모습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친인척과 부모와 조상들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선(先)지식은 예언자를 예언자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은 곳에 기적과 표징을 일어나지 않음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바라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비단 선지식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유는 바로 ‘시기’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나보다 더 가치 있고 빛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둠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 순간 시기의 사로잡혀 예언자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후는 같습니다. 예언자를 통해 다가오는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언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를 통해 주님의 말씀과 은총은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선지식이나 인간적 시기가 우리 눈을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라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언자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주님께서는 다가올 것입니다. 내 주변의 예언자를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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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비싼 연봉은?
작년 말에 연봉 협상을 했습니다.
성지 사제로 산다는 것이
기도하는 영성가의 모습도 있지만
운영하는 경영가의 모습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모습 모두 포기할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직원분들과의 연봉 협상을 통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일 비싼 연봉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제일 비싼 연봉이 무엇일까?
답은 이것입니다.
누구도 가져갈 수 없도록 내 머리와 몸에 새기는 것들.
이것이 가장 비싼 연봉이라고 합니다.
누구도 나를 흉내 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비싼 연봉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우리 연봉은 어느 정도일까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선함과 사랑을 지녔다면 가장 비싼 연봉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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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다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인 회개뿐이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43,3)
감로수(甘露水)같은 ‘시대의 현자’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를 여니 새롭게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교황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집을 짓도록’ 격려했다.”
“무장해제는 도덕적 의무이다.”
“우리 모두 말하도록 하자: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Let us all say: “Enough!”, “please!”)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라는 철학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이 책중 나오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동양의 지혜는 역사 없이 존재한다. 이는 곧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며, 특정한 관념에 의해 역사를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역사는 역사를 가질 수 없다. 공자를 비롯해 동양의 현자들이 세상에 대해 그 어떤 편견적인 시각을 투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상 자체에 접근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자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동양의 현자들과는 달리 성서의 현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하느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열왕기하권의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우선 제1독서의 나아만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의 무지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살펴봅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다.’
오늘 제1독서는 나아만의 나병치유와 더불어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의 치유과정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치유에 깨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쨌든 나아만에게는 나병이 무지의 병의 치유에 전화위복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온 소녀가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할 것을 누가 알았겠는지요! 이 또한 우리의 선입견을 깹니다. 사소한 작은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나아만의 방문에 두려움에 떠는 아람 임금 또한 무지의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자기만의 편견과 오해로 상황을 재단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등장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할 것입니다.”
나아만의 방문에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의연한 엘리사는 참으로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합니다. 이또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나아만의 근본적 무지의 병인 허영과 교만의 치유를 목표로하고 있음을 봅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 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말그대로 겸손과 순종의 시험입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고 발길을 돌리면서 하는 말들이 그의 굳어진 선입견, 편견, 교만을 보여줍니다. 나병에 앞서 나아만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교만의 무지의 병이 심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부하들의 간청대로 엘리사의 조언대로 겸손히 순종하여 따랐을 때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집니다. 무지의 치유에 순종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으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병도 치유된 나아만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치유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깨어 있는 마음, 열린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무지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주님을 만남으로 참으로 겸손해졌을 나아만은 온전한 건강의 참사람이 되었음을 봅니다. 나아만은 나병과 더불어 무지의 병까지 치유되게 만들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흡사 화답송 후렴 시편이 무지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처럼 들립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시편42,3)
무지에 대한 답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지의 병입니다. 탐욕, 질투, 절망, 원망, 미움, 분노, 두려움,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어리석음, 전쟁 등 끝없이 이어지는 부정적 마음의 현상들 무지로 인해 파생된 징후의 병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들이, 마음속 괴물들을 잘 길들인 이들이 현자요 예언자요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여정, 치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육신의 병도 대부분 이런 무지의 병으로부터 기인됩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나자렛 고향 회당에 모여있던 고향사람들에게도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의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무지한 인간의 한계요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상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로워 겸손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세상 연옥에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지로 인한 아비규환,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참 생존경쟁 치열한 참으로 혼란한 세상 전쟁터입니다.
주님은 엘리야 시대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의 예를 들면서, 또 엘리사 시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예를 들면서 고향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는 차별이 없고 일체의 기득권도 무용지물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 과부처럼,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처럼 겸손히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점입가경입니다.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화가 잔뜩난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흡사 바위에 계란치기처럼 무지의 바위처럼 생각되는 나자렛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을 예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떠나시는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유일한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인 회개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무지의 병의 치유 여정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무지의 병에 좋은 치유제는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시편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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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소유 사이에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빛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퍼지는 빛을
가두려하지 않으니
빛은 늘
퍼지기 마련이요
퍼져야 비로소
빛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흐르는 물을
막으려하지 않으니
물은 늘
흐르기 마련이요
흘러야 비로소
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부는 바람을
움켜쥐려하지 않으니
바람은 늘
불기 마련이요
불어야 비로소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는
이어지는 길을
끊으려하지 않으니
길은 늘
이어지기 마련이요
이어져야 비로소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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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4.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27)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심으로 예언이 이루어지다
나자렛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신 가르침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전에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그러한 그릇된 확신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받을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하지만 넷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가르침입니다. 순교자들을 가리켜 그들이 “죽었다’라고 했지만, 죽음은 그들에게 존재를 가져다줍니다. 한 영성의 대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은 더 나은 것으로 갚아 주는 일 없이 무언가를 파괴하는 법이 없다" 공기가 불로 변하면, 이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공기가 물로 변한다면, 이것은 망가짐이자 탈선일 것입니다. 자연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더 나은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더 나은 것을 대신 주시는 일 없이 하느님은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순교자들은 죽어서 목숨을 잃었지만, 존재를 얻었습니다. 영성의 대가는 “가장 고상한 상태는 존재와 생명과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은 생명이나 존재보다 더 고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식을 뜻함과 동시에 생명과 존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생명은 존재나 지식보다 더 고귀합니다. 예컨대, 돌에게는 존재만 있는 반면, 나무에게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하고 순전한 존재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존재가 지식이나 생명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존재는 존재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앓과 삶도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13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마태 16,13-20.24-28)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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