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衡平社 11
-형평의 서막
박구경
1.
사냥을 하고 짐승을 잡는다고 하여
인간을 미물보다 천히 여기는 관례를
어찌 사람의 법도로 여길 수 있었겠는가
제 아무리 농자지천하대본의 세상이라 하여도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땅에 산과 들이 있듯이
인간의 업에도 음양 고저는 존재해야 하는 법
백정의 업인들 실생활에 가치 있는 일이었으며
한 편으론 제의祭儀를 포함하는
신성한 하늘의 사업임에 틀리지 않았을 것이었더라
농사는 농민이 짓고
장사는 상인의 일이었듯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백정의 소임이 거기 있었더라
백정의 아녀자는 결코 죄가 아니었고
백정의 자식들은 절대로 피눈물이 될 수 없었으며
죽어서 상여에도 오르지 못할 저주는 더욱 아니었더라
누가 누구를 위해 덧씌운 굴레였더라는 말인가
백정이란 배부른 자들의
음흉한 통제의 수단이 아니었던가
2.
나라를 빼앗긴 자들은 실로 양반들 이었던가
왕이었던가
왕실이었던가
이 나라의 농민운동은 농민들이 일어섰고
개화는 개화의 선지식들이 나섰고
독립운동은 독립군들이 피를 흘렸더니라
그리하여 마침내
1923년
백정들도 분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느니라
“백정도 사람이다”
경상 땅 진주에서 이 나라 최초로
형평사 봉기의 깃발이 올려지고 말았더니라
나라는 벌써 사라지고 없는 식민 시대였건만
백정들도 처음으로 인간의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더니라
어찌 탄압이 없었고
어찌 희생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백정들도 마침내 백성의 일인들이었더니라
백정들도 이제부터 독립운동에도 나서고
백정들도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였느니라
이제 어디에도 더 이상의 백정은 존재하지 않았느니라
백정을 몰아내고 말았느니라
아, 1923
형평의 새 아침이 고고성을 울리며 밝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