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99년전인 1926년 2월 11일에 사망했고 다음날인 2월 12일에 호화로운 장례식속에 한반도땅에서 사라집니다. 그가 그렇게 숭상하고 흠모했던 일본땅에 묻히지 못한 것에 그는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완용은 이른바 나라를 팔아먹은 원흉으로 원흉들이 할 행적을 모두 소유한 한국 역사속에 아주 특별한 악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가 저지른 과오는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3가지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함)때 그는 학부대신(교육부장관)이었습니다. 을사오적(이완용,이근택, 박제순,권중현,송병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을사늑약 2년후인 1907년에 체결된 한일 신협약 (정미 7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법권 위임, 경찰권 위임 등)에 대표적 인물이 바로 이완용입니다. 그는 을사늑약의 공로를 인정받아 총리로 승격됐습니다. 그리고 3년후 한민족의 대표적인 수치인 1910년 경술국치(순종을 협박해 한일 병합조약에 억지로 도장을 찍음)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완용입니다. 매국노 트리플(3가지 업적을 모두 달성)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역사에 기록됐습니다.
이완용은 1882년에 과거에 급제합니다. 이완용의 총명함이 고종의 눈에 들어 급승진에 고종의 아들인 순종의 스승까지 되었습니다.이완용은 영어실력이 뛰어나 1887년 미국주재 공사로 발탁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완용은 근대화된 미국에 매료되고 곧바로 친미파로 둔갑합니다. 이완용이 원래 친일파가 아니였습니다. 그가 귀국후 민비시해사건이 터지고 고종도 일제에게 감금되자 러시아의 힘을 빌어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이완용은 이때까지 일제라면 치를 갈았던 인물입니다. 지금 서대문구에 설치돼 있는 독립문도 이완용이 적극 추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후 러시아에 간섭에 피곤해 하던 그가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실패로 끝납니다. 이때 이완용이 그동안 저지른 각종비리들이 발각되면서 고향으로 귀향하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됩니다. 이때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몰아 러일전쟁에서도 러시아를 격파합니다. 워낙 강대국 선호사상이 있던 이완용은 일제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야말로 친일파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완용은 특히 일제의 군국주의 리더인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후 매국노 트리플을 이끕니다. 이완용의 매국노행위는 일일히 거론하기도 힘듭니다. 그는 심지어 창덕궁을 일본 황실의 별궁으로 만들자고 적극적으로 건의했지만 일본인들도 이건 아니다라고 판단해 거절했다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입니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한 부동산이 지금 여의도 면적에 8배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이완용의 재산은 그 후손들이 해방전에 거의 팔아버려 회수된 땅은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호의호식하던 이완용은 악인치고는 장수를 한 1926년 2월 11일 67세 나이로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나서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이완용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고 말입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일본인과 조선 친일파 등 1,300명이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묘에는 항상 식칼이 꽂혀 있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자에 대한 국민들의 울분이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묘는 지금 돌보는 사람이 없이 그냥 폐허로 남겨져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지난해인 2024년 12월 3일에 터진 비상계엄이후 나라는 혼란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내란을 일으킨 세력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행한 것에 대한 반성은 커녕 오히려 당당함을 나타냅니다. 온갖 덜 된 법률적 궤변속에 시간 끌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옳은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완용의 죄가 120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한때 조선의 최고 인재중 한 명인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나라를 망가뜨린 최악의 인간이 된 것에서 한국 국민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99년전 이완용 장례식을 떠올리며 한국의 역사는 정말 참으로 되풀이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025년 2월 12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