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F MONEY-2nd
1989년 3고 불황 경쟁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때 기업들이 발생하는 채권의 이자율이 상승하는 이유는 ‘실질적인 이자율 하락’ 때문이다. 임금이 오르는데 어떻게 해야 비용이 절감되는 걸까? 방법은 투입된 노동력 대비 생산량, 즉 노동 생산성을 향상하는 것이다. 1996년 반도체 위기, 7개월 만에 반도체 수출 반토막으로 1997년 외환 위기를 맞는다. 체력도 약했고 운도 없었다. 1997년 태국이 IMF의 구제 금융을 받는 것을 보면서도 위기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라도 우리가 고정 환율 제도를 폐기하고 금리를 인상했다면, 외환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도 주체 성장의 종말. IMF는 한국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이는 한국에서 한국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요구하는 조건과 비슷했다. 민사 소송을 걸어 재산을 압류하고 상대의 소득 일부를 떼가는 방식처럼, 한국이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도록 조처했다. 즉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 지출을 줄여서 어떻게든 저축을 모아 무역 수지를 흑자로 만드는 것이다.
2002년 카드 대란, 내수 주도 성장의 꿈이 무너진다. 한국 경제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지만, 2000년에 다시 역풍을 맞게 된다. 대우 그룹의 위기와 정보 통신 거품이 붕괴한 것이다. 미국의 기술 기업주가 폭락한 게 우리 경제에 충격을 준 이유는 미국의 퇴직 연금을 대거 주식에 투자하기 때문에 주식 가격이 하락하는 순간 가계 순자산이 하락하는 구조이다. 이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규제 완화를 택했다. 연말 정산에 카드를 쓰면 소득을 공제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 당시 카드 발급은 어려웠다. 소득이 일정하거나 소유 부동산이나 자동차가 있는 대상에 카드를 부여했다. 그러나 규제가 풀리며 카드사는 발급 경쟁이 촉발되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용 금액이 1999년 90조에서 2001년에 443조로 늘었다. 일부 자영업자는 카드 돌려막기가 시작됐다.
2003년 중국 붐, 고객에서 경쟁자로 등장한다. 절벽에 매달린 한국 경제를 구원한 것은 이라크 전쟁과 중국이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란과 북한 그리고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지목한 미 ‘부시’ 행정부는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한다. 전쟁은 단기간에 끝났으며 급등했던 유가는 안정을 되찾아 한국 경제의 회복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국은 선진국을 상대로 수출하는 산업(반도체, 자동차 등)을 보유한 나라이기에 선진국의 소비 회복은 바로 수출 증가로 연결된다. 여기에 호재가 더해진 것이, 중국 경제의 가파른 성장이었다. 중국은 자유롭지 않은 나라이기에 국민 소득이 증가해도 정치는 불안정했다. 근로자 평균 연봉이 583달러에서 2000년에 1,127달러로 증가하고 2017년에는 1만 달러를 돌파하고 2021년은 1만 6,562달러에 이른 것이다. 중국이 이대로 쭉 경쟁력을 강화해도 한국 경제를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명령-지시 경제는 급격한 전환 시기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여준 사례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환자가 발생하면 그 단지를 봉쇄하고 아파트 현관을 철창으로 막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위기는 기회였다. 회사에서 준 자사주가 갑자기 10배 오른다면? 퇴사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며, 회사에 남은 사람은 늘어난 부를 활용해 차를 바꾸거나 해외여행을 다니는 등 다양한 소비를 할 것이다. 반대로 보유한 주식이나 집값이 폭락하면 여행을 가거나 스마트 폰도 바꾸기 어렵게 될 것이다. 금융사와 건설사가 대량 해고가 시작되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부의 공적 자금은 공짜가 아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신 보너스나 월급이 삭감될 가능성이 높으며 핵심 인력이 아니고는 당장 짐을 싸야 할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발생할 때 타격이 큰 곳은, 내수시장이 작은 수출 공업국이다. 한국이나 대만의 내수시장보다 거대한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수출 이외는 활로가 없다. 한국 경제가 불황 이후에 경쟁력이 개선되는 두 번째 이유는 환율 때문이다. 1999년 1,138원에서 2000년은 1,264원으로 2001년 말에는 1,313원까지 환율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이런 현상은 2007년 금융위기에도 다르지 않았다.
2010년 이후의 저물가 현상, FTA와 생산성 혁신 그리고 글로벌 경기 침체. 한국이 저물가 상황을 경험하게 된 이유는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하며 내수시장이 개방된 것을 들 수 있다. 2011년 저축 은행 사태, 규제 완화 이후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2002년 카드 대란 이후 상호 신용 금고에 대한 규제가 풀리게 된다. 상호신용금고가 아닌 상호저축은행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이 조치는 저축 은행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저축 은행은 시중은행과 달리 개인 대주주가 존재하기에 성장의 과실이 고스란히 대주주 일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반대로 경영이 부실하면 대주주들은 주식 지분을 포기하면 그뿐이다. 즉 이익을 대주주가 누리지만, 손실은 전 국민이 부담하는 구조이다. 저축 은행은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을 크게 늘렸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은 회사나 개인이 아닌 각각의 프로젝트 단위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뜻한다.
‘뱅크런’은 고객들이 예금을 앞다퉈 인출하는 사태를 말한다. 지급불능이 되면 1인당 5,000만 원까지 예금을 보호하는 제도가 있지만, 저축 은행이 제공하는 상품에 이자가 높기에 예금 보험 한도 이상의 돈을 넣었기에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특히 후순위 채권을 은행 예금으로 알고 투자한 사람도 상당수가 있었다. 은행이나 기업이 파산할 때 다른 채권자들이 돈을 다 가져간 다음에야 자신이 투자한 몫을 돌려받을 수 있는 후 순위 채권은 예금 보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에 피해를 더욱 키웠다. 2011년 부산 상호저축과 서울의 삼화 상호저축은행이 부실 금융 기관으로 결정되고 대전상호저축은행이 영업정지 대상이 되었다.
주식 시장의 흐름을 바꾼 11대 사건. 1962년 증권 파동. 시작하자마자 닫혀 버린 부자의 꿈. 1962년 중앙정보부 강성원 조사실 행정관(소령)과 윤응상 일흥증권 사장이 주도 작전의 시작이었다. ‘투자 귀재’ 윤 사장이 “농협중앙회 소유 한국전력 주식을 빌려주면, 이를 크게 불려주겠다.”라고 주식 문외한이던 중앙정보부를 꼬드겼다. 이후 한국전력 주가를 끌어올린 뒤 팔아서 폭리를 취하고, 이 돈으로 다시 대한중석거래소 주식을 사재기해서 폭리를 취하다 실패한 것이 증권 파동의 실체다. 윤, 강 등 14명이 구속되고 징역 7년을 산다. 1974년 강제 상장 조치. 재벌 총수? 1972년 박정희 정부는 8.3조치를 통해 사채를 동결하고 기업에 빌려준 사채를 3년간 동결하자. 문제는 기업주가 자기 기업에 빌려준 사채는 회삿돈으로 사채놀이를 한 것이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삼호 방직의 정재호 대표 등 14명이 횡령과 배임으로 고발된다. 정부는 기업을 공개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제일제당과 롯데칠성음료 등 소수의 기업만 정부의 상장요구에 응했다. 정부는 ‘기업 공개 촉진법‘을 제정하고 기업공개 대상이 불응하면 강력한 규제를 가한다는 내용이다. 기업의 주주는 회사가 망하면 자기 지분만 포기하면 끝이다. 그런데 기업이 망하면 기업주도 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체 동결도 이익을 보았으니 보유한 주식을 시장에 싸게 내놓음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라는 이야기다. 1976년 ‘증권거래법’이 개정되면서 기업은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한다. 이후 한국은 총수와 그 일가는 아주 소수의 지분을 가지고도 무소불위의 경영권을 행사한다. 반면 소액주주는 경영 참여가 원칙적으로 봉쇄된다. 기업이 성장하고 발전하면 자본금을 투자해 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총수는 “귀한 주식을 너무 싸게 시작에 내놓았다.”라고 판단하기에, 자신의 지분을 매입한 이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며, 나아가, 더 그들의 귀찮은 손님 정도로 취급하는 게 현실인 것 같다.
1978년 건설주 붐. 한국형 ‘붐-버스트’ 사이클이 만들어지다! 배럴당 1달러 내외에 거래되던 유가가 10달러로 급등하자 세계 경제는 충격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14.9%의 경제성장을 이룬다. 이는 삼환기업부터 시작된 대규모 중동 건설 수주 때문이다. 건설 주가는 로켓처럼 상승했다. 50배 상승했다. 상승은 거품을 유발했다. 거품은 시장성과 신용(돈) 그리고 투기라는 3요소의 결합으로 발생한다. 75년 20만 명이던 증권인구는 다음 해 40만 명으로 증가한다. 당시 공모주의 최고 인기는 건설주였다. ‘정진건설’은 1977년 상장 시 자본금은 11억 원이었으나 유상증자로 40억으로 키우고, 고의 부도를 내는 기업들이 나타났다. 건설주 장세는 한국 주식에 교훈을 남겼다. 정부의 증시 부양 정책과 우량 기업의 상장 그리고 저금리 환경이 만나 강력한 주가 상승이 발생하더라도, 금리가 상승하며 통화 공급이 줄어들고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부실기업이 성장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6년 잃어버린 9년을 끝낸다. 한국형 버불 붕괴 2탄. 1985년 총선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35%, 야당은 48%로 미국이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함으로써 1986년 아세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으로 국제적인 행사에 투자자들이 마음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4년 현대건설은 70% 프리미엄을 얻어 850원(액면가 500원)에 상장된다. 기업공개가 1988년 112건, 1989년에 135건으로 늘었다. 액면가 발행이 아닌 시가 발행도 293건으로 늘었다. 이런 조치는 기업에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1992년에 증시 개방이 이뤄진다. 주식 시장의 주도주도 이제 외국인이 결정한다!
2024.08.22.
대한민국 돈의 역사-2nd
홍춘욱 지음
상상스퀘어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