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조용헌 교수.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하면 이렇다.
제산은 20대 시절 이곳저곳을 방랑했다.
주로 지리산 일대였다.
함양·산청·남원의 운봉 등지였다.
특히 제산은 20대 춥고 배고팠던 시절 운봉에 자주 들렀다.
운봉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노개식(盧价植)씨가 살고 있었다.
운봉은 지리산 일대의 명당이다.
해발 400m의 고지대라서 여름에도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다.
풍수적으로도 지세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여름에 시원하고 땅 기운도 좋아서
예로부터 기인·달사들이 이곳에 많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노씨의 집안도 그 중 하나였다.
노씨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고, 유년시절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유교 경전을 단련 받아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
한약방을 운영하니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어서 친구인 제산이 찾아오면 항상 차비라도 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고,
고전에 식견이 있어서 호학하는 성품이었던 제산과 잘 어울렸다.
어느 날이었다.
제산과 운봉의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제산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오늘 한약방에 오는 첫 손님은 남자일 것이네, 그런데 그 사람의 성씨가 황(黃)씨일 거야,
그리고 이름은 하수(河洙)이고….
아마도 그 사람은 대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에 사는 사람일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과연 그럴까 하고 지켜보았다.
10시쯤 되어 한약을 지으러 첫 손님이 왔는데, 이 사람 성씨를 물어보니 황씨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과연 하수라고 하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는 그 손님의 집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대나무 숲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하는 것 아닌가.
평소 제산이라는 친구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사람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아맞추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의심이 든 친구는 제산에게 다그쳤다.
“자네 이보(耳報)로 안 것이지?”
‘이보’라는 말은 ‘귀신이 귀에 보고해 준다.’는 뜻이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보통령’(耳報通靈)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통상 ‘이보’라고 부른다.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접신(接神)되는 수가 있다.
접신되면 귀신이 접신된 사람의 귀에 대고 정보를 알려 준다.
이보가 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마치 귀에 리시버를 꽂은 상태로 말하는 것과 같아서
두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가 하고
귀를 쫑긋한 상태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이보통령한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헷갈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친구로부터 “자네, 이보로 알게 된 것이지?”하고 추궁 받은 제산은
“아니다. 격물치지(格物致知)해서 안 것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격물치지란 사물을 유심히 관찰해 알았다는 말이다.
귀신이 알려주어서 안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이성적으로 이치를 분석해서 알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격물치지의 근거를 말해 보라”하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침 햇살이 장판을 비추는데, 장판의 색깔이 노랗게 보이더라,
그래서 황(黃)씨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맡에 목마르면 먹으려고 흰 대접에 물을 떠놓았는데,
그 대접에 담겨 있는 물이 아주 맑게 보이더라. 하수(河洙)는 그래서 알았다.
대접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대 뿌리 회초리를 보고
오늘 오는 사람이 대나무 울타리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운봉에서 원제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노개식(63)씨로부터 듣고
제산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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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