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의 장편소설
因 緣
<제1편 세상 문>
⑰ 양지호라는 사람-13
어느새 차갑게 식은 방바닥은 발을 디딜 적마다 발끝에 시릿함이 전신으로 번지어왔다. 그런데 정희는 아이를 업은 채 어머니 앞에 꼼짝을 않고 쪼그리고 앉아있지 않은가. 정희도 경산을 닮아서 대꼬챙이 같은 성격인가보았다.
그래서 저렇듯, 다기차고 매섭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정숙은 누운 경산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정희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눈을 감고 잠이 든 듯한 경산의 얼굴을 눈 여겨 보았다.
언제나 정수리에 곧고 또렷하던 단정한 가르마도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뜨려지어 얽히고설킨 봉두난발은 한바탕 난리를 겪은 사실을 증험이라도, 하여주듯이 보이었다. 그러한 경산은 눈을 감은 채로 가녀린 숨소리를 내면서 고요를 찾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빛이 분노의 불길처럼 일렁거리는 게 짙게 그리어져 있었다.
정조가 무엇이기에 하늘 끝까지 치솟는 분노와,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고 살기를 품고서 버둥거리었는지 정숙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유난히 경산의 속생각과 꼭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정숙도 생원의 신분을 가진 가문의 딸이며 어디에다 내놓더라도, 체통을 지킬 만한 양가의 규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시 독신녀로 혼자 살아가기에는 벌판에 홀로 팽개쳐지는 꼴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기에 명색의 수도승에다가 경산과 사이의 친함도 물리치고, 선뜻 파계하여 사바로 돌아온 게 아닌가.
그리하여 만난 남편이 제아무리 술독에 빠지어 아무렇게나 뒹굴러 사는 보잘 데 없는 남자라할지라도, 하루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그래도, 남자의 듬직한 맛이 허탈함을 쫓아내어서 뿌듯한 행복감마저 갖는 게 그녀이었다.
그녀는 이게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맛이라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허탈한 자신의 마음을 보듬는 거였다. 그러니 행여나 남편이 경산에게 막대하며 달리어들어 파렴치한 행동을 보이었다손 치더라도, 그녀는 남편을 저주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저주는커녕 되레 남편을 이해할 수 있고, 남자란 어쩌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넉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대할 수도 있을 거였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일을 평생토록 경험하여보지 않은 터에 모르지만, 그녀는 별나게도 깊고 넓은 이해와 아량으로서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지 몰랐다. 경산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토록 죽음을 헤아리지 않고 막무가내는 이유는 정조를 지키기보다 정숙에게 의리를 저버리고, 못할 짓을 저질러 증오의 화살이 꽂힐 것을 내다보는 경산으로서는 자신의 몸을 생명처럼 지켜야 할 게 마땅한 일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불상사가 졸지에 터지게 된 거라고, 그녀는 나름대로 생각을 굳히었다.
어찌되었든 경산이 잠에 빠지어들었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그녀는 정희의 등에 업힌 세룡이를 빼앗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자, 이내 남편이 누어있는 옆으로 나란히 누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말똥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룡이가 젖을 빠는 동안에도, 착잡한 마음이 조용하게 가라앉지 아니하였다.
첫댓글 제1호 애독자님이시고 또 객원소설평론가이신
대우님께 잠시나마 실망을 끼쳐드려서 죄스럽습니다.
연재물은 다름 아닌 드라마무대라고도 볼 수 있는데 방송사고가 아니라 연재사고를 냈군요.
새벽3시11분 잠이 깼습니다. 그런데 버릇이 5분가량 뜸을 들이는데 그냥 잠들어버린 거지요. ㅎㅎ
서울에 문상왔다가 지금 내려가는 중입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별일이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ㅎ
정숙씨처럼 남자에게 배려가 많은 여자가 때론 그리워지기도 하지요 ^^
대전에서 서울이 비록 차량으로는 멀지 않더라도 낮에는 직장 밤에 활동하시니 어렵겠습니다.
나도 예전엔 소설을 취재하느라 청주로 대전으로 쏘다니다가 새벽 차로 출근하곤 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계시고 인간관계의 친함 때문에 문상 문병도 부지런히 다니게 되지요.
그런데 대우님께서는 매사 적극적으로 대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활달하고 발랄하신 면모가 그려집니다.